92화
*
「그 녀석 윤하에게 반해가지고 자기답지 않게 심하게 몰아세웠나봐. 평소엔 여자를 휘어잡던 녀석이라 처음 느끼는 감정에 실수했던 모양이야.」
우주가 말해준 민혁이의 얘긴 좀 안쓰러웠다.
「여행갔던 날 윤하를 닥달하다가 추락사고 날 뻔 하고, 생일날 그녀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 민혁이는 완전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더라고. 마치 자기가 사고낸 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
확실히... 사고 후 병문안 왔던 우주 곁의 민혁이는 정말 힘들어 보였다. 아마 마음속으로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쩝. 그 전에 축제때는 윤하에게 고백하려고 해서 마음 접은 내가 다시 윤하를 좋아하는 것 처럼 뛰어들게 만들더니만... 골치아픈 녀석이야. 아무래도 윤하가 직접 녀석에게 용서를 주지 않으면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얘기를 하면서도 우주는 뭔가 켕기는 게 있었던 듯 이 말도 함께 했다.
「아 그리고 연극 때 말이지, 나 윤하한테 키스 안 했다? 혹시나 오해했을까봐 하는 말인데 진짜야, 믿어줘. 윤하 정신상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겠어.」
뭐 나야 그 건에 대해선 큰 상관을 안 했으니까 우주의 마지막 말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어떻게 하면 윤하의 단짝친구였던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며칠동안 고민해봤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주의 말대로 윤하가 직접 용서하는 것만이 정답일 것 같은데...
"하아... 윤하는 오늘도 깨어날 생각이 없나보네."
"그러게 말야. 흠... 재희야 이거 먹어 오늘 만든 빵이야."
"어, 응 고마워. 늘 챙겨줘서."
고민하고 있는 중에 그녀의 친구들이 또다시 찾아왔다. 이 세 사람은 어쩌다 이렇게 그룹이 되었는지 참 신기하다니까. 각자 관심사도 완전 틀린데.
"크- 역시 내 연극이야. 배우들도 완전 호화 캐스팅이었고... 이거 대회에다 함 출품해볼까?"
"괜찮은 것 같은데. 다혜 연극이 훌륭하긴 했지."
"냐하하 별 말씀을."
그런데 그녀들은 PMP의 연극을 보다가 갑자기 윤하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앗 잠깐, 그 안에는 윤하가 내게 보낸 영상메시지가...
"오, 뭔가 있다. 윤하 나오는건가?"
"와악! 잠깐!! 안돼 그건!"
그러나 그들은 곧 이 동영상이 뭔가 중요한 것임을 감지했는지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센 은주가 날 묶어둔 사이 다혜와 나연이가 멀리 도망가서 동영상을 켜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돼~!! 악, 은주야 이것 좀 놔봐!!"
"안되징~ 받아라 러브 헤드락!!"
"끄악!"
윽- 안돼, 아직 얘들은 저걸 모르고 있을텐데... 가희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됬다고 저런 소문이 나버렸다간!
"흐어... 젠장, 은주 넌 왜 이렇게 힘이 세!! 말랐으면서!!"
"다 골격근입니당~"
"오~! 윤하다 윤하야!"
"우오오- 안됐!"
결국 윤하의 메시지가 담긴 영상을 다혜와 나연이가 보기 시작했고 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은주를 풀어내고 그녀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꺄악!"
[쿠당탕]
아이쿠 젠장할, 나연이가 의외로 몸놀림이 빠르네...
"오 그나저나 재희군. 이거 프로포즌데요 윤하의?"
결국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들키고 말았다.
"하아... 결국 보고야 말았냐..."
이후에 그녀들은 그 낯뜨거운 영상을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 돌려보며 윤하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며 꺅꺅거렸다. 몇분 후 돌아가는 그녀들은 이 말도 잊지 않았다.
"재희야, 고민 엄청 되겠다 너."
"으- 그만했!!"
"꺅-! 우리 갈게~!!"
어휴 하여간 여자들이란... 나도 원래 여자였지만 지쳤다 지쳤어.
"끙... 급히 간답시고 정리도 하나도 안 하고..."
그녀들이 떠나간 자리를 정리하던 나는 열린 채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윤하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핸드폰은 여전히 동영상 목록에서 화면이 멈춰 있었다.
"한번 더 보고 싶은 걸."
그런데 무심코 확인 버튼을 누르려다 그 밑의 아래 버튼을 누른 난 놀라고 말았다. 마지막 동영상이라고 생각했던 윤하의 콘서트 티켓 동영상 아래에 한 개의 동영상이 더 있었던 것이었다.
"어? 뭐지 이건? 왜 못봤지?"
난 문득 내가 저번에 티켓 동영상을 보고 나서 보려다가 우느라 잊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영상을 켜본 나는, 누군가가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 그리고 이전에 가희를 떠나보내며 들었던 생각이 다시한 번 떠올랐다.
*
다음 날, 난 그녀의 단짝친구였던 한 사람을 학교로부터 병원까지 끌고왔다. 데려오는 중에도 어찌나 거부를 하는지 병원까지 데려오는 데만 진땀을 뺐다. 처음 봤을 때는 엄청 쿨하고 멋진 녀석인 줄 알았더니만 이런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군.
"...괜찮은데."
"임마. 됐으니까 빨리 들어와."
"후... 그래도 난 윤하 너도 그렇고... 누워있는 재희를 볼 면목이 없다구..."
이 녀석은 이미 나와 재희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그래도 아직 정신줄까지 놓지는 않은 모양이라 다행인걸.
"천하의 장민혁이 말야 왜 이렇게 소심해졌어? 자 빨리 윤하, 아니 재희한테 사과해. 그럼 재희가 널 용서해 줄 테니까."
"저렇게 누워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해 줘?"
"아- 증말. 밑지는 셈 치고 한번 해 봐~!"
내가 강제로 떠밀자 민혁이는 알았다며 재촉하는 날 말렸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윤하를 앞에 두고 앉아 말하기 시작했다.
"재희야... 진짜, 진짜 미안해. 친구라는 놈이 말야, 힘든 네 맘도 몰라주고 오직 내 욕망만을 위해서 널 괴롭혀서... 너무 미안해. 정말 진심으로 사과할게."
[야, 장민혁 보고 있냐?]
그리고 그의 사과가 끝남과 동시에, 난 어제 발견한 동영상을 틀어주었다. 갑자기 생생한 윤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민혁이는 놀라 내 쪽을 돌아봤다.
[하여튼... 너 답지 않게 왜 그랬냐? 내가 지금 이걸 왜 찍고 있는 지 알아? 내가 오늘 사고 당할 것 땜에 걱정이 태산같은데 말야, 사고 후에 니가 자기탓 하면서 죽은놈, 그래 좀비처럼 걸어다닐까봐서 걱정되서 찍고 있다 이놈아.]
"... 재희?"
그는 내가 건네준 핸드폰을 받더니 눈물을 한바탕 쏟아내기 시작했다. 속는셈 치고 사과했더니 진짜 재희로부터 용서를 받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내가 생각해봤는데 넌 좀 아니야. 난 좀더 나만 생각해 줄 줄 아는 사람이 좋다구. 너 또 바람필거 뻔하잖아? 내가 중딩때부터 지켜봐 왓는데 설마 모르겠냐.]
"하하... 그래, 미안해 내가 진짜 주제넘었지."
눈물을 콸콸 쏟는데도 그는 우는 소리는 전혀 내지 않았다. 오감을 영상 속 윤하에게 집중시킨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야 나 포기하고! 대신 너만 사랑해주는 한 여자, 꼭 한 여자다? 너 이씨 두 다리 이상 가면 나한테 죽을줄 알아 나중에. 암튼 한 여자만 만나 사랑하라고! 내 평생의 부탁이다 임마. 뭐... 정 힘들면 나중에라도 그렇게 하던가.]
왜였을까.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멋있게 보였던 건. 당연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을까? 친구를 향해 독설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그래, 그럼. 난 널 용서했으니까, 이제 기운 내. 넌 그런 모습 안 어울린다.]
"응, 그래. 기운낼게."
[알았으면 난 다시 자러 가야겠다. 어우씨... 너땜에 벌써 5시잖어!!]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와 민혁이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안녕.]
영상이 끝나고 나서도 민혁이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약 5분 후 기운을 차렸는지 벌떡 일어난 민혁이는, 내게 핸드폰을 건네더니 어깨에 양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고맙다 친구!"
그리고는 쌩하니 밖으로 나가버리는 녀석을 보며 난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그리고 뒤로 돌아 잠들어 있는 윤하 곁으로 다가가서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최대한의 존경심을 담아서.
"윤하야, 너 정말... 너무 많은 도움을 주고 갔어! 진짜 최고야...!"
<13. 예상치 못한 미래>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