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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91화 (90/188)

91화

우주는 목이 타는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마시며 말을 계속했다.

"어찌되었든 지금도 백영은 건재해. '조백'도 이제는 하나의 '백영'의 일부로 합쳐져있고, 그들을 이끄는 건 다름아닌 너희 아버지, 서진 총수님이야."

"그래...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설마 너희 가족도 그 일원이었을 줄이야..."

그 말을 들은 우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의미인가?

"아니, 우리 부모님은 더 이상 '백영'의 일원이 아니야. 두 분은 10년 전 너희 어머니가 희생되기 전, 앞으로 더 이상의 희생을 지켜볼 수 없다면서 백영이기를 포기하셨어. 그래서 내게 이 사실을 알려주길 꺼리셨던 거고... 그래서 지금은 나만 조직의 일원인 상태야."

"그렇군.."

"아무튼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내가 처음에 '조율자'라고 했었지? 그 말 그대로 10살 때 이 작전에 가담하면서 내가 맡은 임무는 작전 중에 너희 둘이 엇갈리지 않도록 일반인으로써 둘의 생활을 조율해나가는 것이었어. 물론 작년 말이 되기 전까지 너는 총수님이 전담하셨기 때문에 난 재희를 맡아 최대한 이녀석을 컨트롤했지."

난 얘길 듣다가 또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우주의 얘기가 모두 끝나면 물어볼 그 질문을 마음 속에 품은 채 난 계속 경청했다.

"사실 영운중학교의 졸업여행 장소는 세림중학교와 같은 곳이 아니었어."

"뭐? 그럼 원래는 그 날 몸이 바뀌지 않았을거란 얘기야?"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레이 누나의 '예지몽'에 너와 재희가 서로 바뀌는 것이 그 날, 그 장소로 예언되는 바람에 급히 수정에 들어가게 된 거야. 난 가짜 예약취소 메일과 음성변조를 통해 영운중학교의 여행 계획을 통째로 바꾸는 데에 성공했고, 다행스럽게도 작전대로 너희 둘은 서로의 존재를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총수님의 염원력으로 몸이 바뀌게 되었지."

이 녀석 알고보면 슈퍼 천재에다가 연기 신 아니야? 어떻게 이런 녀석이 곁에서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아니지, 내 촉까지 속일 정도면 이 놈이 정말 대단한 거일 지도...

"여튼 그렇게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 까진 순조로웠는데 문제가 발생했어. 바로 윤하와는 다르게 너가 가희를 좋아해서 사귀게 되어버린 거야."

"하하하, 그게 사정이 있어..."

"그래 알곤 있는데, 그 덕에 나는 졸지에 네 마음이 돌아설 때 까지 윤하가 다른 녀석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야만 하는 역할이 되어버렸지 뭐야. 홀로된 윤하가 외로워하는 걸 소꿉친구로써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거든."

"아, 그래서 그렇게 자꾸 윤하한테 붙어 있었구나?"

"뭐... 그렇지? 친구로써 당연한 도리지."

잠깐, 그러면 난 몸이 바뀐 뒤로는 줄곧 우주에게 놀아났다는 소리인가?

"아무튼 그래서 그때 내가 말 했잖아. '윤하는 내가 지켜야겠네...'라고."

"아, 기억나. 분명 그 때는 너가 윤하가 좋아서 그런 말을 한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것도 아니었던 거야?"

"뭐 그때는 말이지. 몇 달 동안 너희 마음과 생각도 계산해가며 말하고 행동해 왔으니까 말야. 윤하가 알면 진짜 기절초풍 할 거다. 알려줄 생각도 없지만."

"여, 여튼 그래서 내가 가희 만나느라 윤하를 바람맞힌 그 날 무심코 너한테 전화해서 좀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했었잖아."

"응. 그날 어떻게 될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너가 마침 일을 저지르더라고. 그래서 타이밍 맞춰가지고 커피숍 앞에서 딱 만나서 집에 데려갔어."

어휴 이건 뭐, 윤하가 어디로 걸어갈 지 까지 완벽히 계산한 플레이야.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어. 윤하를 지키며 방관자로 있어야 할 내 마음이 윤하한테 넘어가 버린 거야. 내 소꿉친구인 걸 알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여서..."

"...너도 그런 실수를 하는구나."

다행히 이 녀석도 인간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윤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홀린 우주의 마음은 한동안 진심이었나보군. 그래서 아까 '그때는 말이지'라고 덧붙였구만?

"그래도 난 '조율자'라서 최대한 참으면서 버텼어. 그러다가 윤하가 우리 집에 홀로 놀러왔을 때 하마터면 선을 넘어버릴 뻔 하기도 했지만, 후후."

"윽, 역시 그 때 느낌이 정말 구리더라니만..."

"다음에 윤하가 얘길 해줬는데 너 그때 엄청 화냈다며? 그래서 난 안도했다구. 재희가 그래도 윤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남아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어서 말야."

"그 땐 기억을 잃어서 아마 본능적으로 화를 냈겠지... 무의식중에."

"아무튼 그걸 듣고 난 바로 느낌이 왔어. 이걸 잘 이용하면 네 마음이 다시 윤하에게 돌아가도록 할 수 있겠다고 말야."

"아놔... 그럼 그때 과도하게 내 눈에 띄게 윤하한테 집적거리던 게 남 거슬리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던 거란 말야?"

"응 맞아. 난 어떻게든 '그 날'이 되기 전까지 너희 둘이 서로를 정말로 생각해주고 좋아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잠깐, 우리 둘은 꼭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면 안 됐던 건가?

"아니 근데, 나랑 윤하가 꼭 서로 좋아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엥, 너 총수님께 어릴 때 작전에 대해서 모두 들었던 거 아니었어?"

"어... 난 그냥 재희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해서 엄청 화내고 절대 안 된다고 한 기억밖에는 안 나는데..."

뭐지? 내가 그 당시에는 윤하를 사랑해서 죽게 두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작전의 실행을 거부했던지라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레이 누나 설명좀 해 주세요."

"그러지 뭐. 재희야, 윤하가 널 쭉 좋아했던 건 알지?"

"네... 그런데요?"

"어찌되었던간에 '그 날' 작전의 성공 조건엔 윤하의 사랑만 있으면 되지만 만약 윤하만 너를 좋아하고, 넌 그렇지 않는다면 '그 날'이후 계속되는 작전의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우주는 어찌되었건 날 최대한 거슬리게 만들었던 거였구만? 어떻게든 다시 윤하에게로 내 마음이 돌아가게끔 만들려고...

"아무튼 계속할게. 그리고 나서부터는 재희 너가 질투 때문에 가희랑 사이가 점점 안좋아지는 게 보였어.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사고 한달 전 쯤 서진 총수님, 레이누나, 소이치로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갑자기 재희 니가 또 시들해지지 뭐야."

"끙.. 그때는 가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였어. 여행 전에 윤하와 말다툼하다가 내가 엄청 큰 실수를 저질러버렸던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일본 여행도 계획된 거였군. 어쩐지, 여행 중에 윤하가 아빠를 봤다고 했을 때 알아차리지 못한 게 크다..."

뭐 나중에 윤하가 레이 누나와 소이치로의 얘길 해 줬는데도 기억이 옅어서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던 것도 있고... 몸이 바뀐 뒤 기억을 잃은 게 어느정도는 아빠의 이 작전에 호재로 작용했다고 봐야겠구만.

"하지만 문제는 또 생겼지. 윤하에게 힘을 불어넣으려 총수님이 왔던 그 날, 세 사람의 애길 듣다가 윤하가 밤에 깬 걸 못 보고 만 거야. 덕분에 납치사건 터지고... 난 윤하를 속였다는 사실을 들켜버렸지."

"어쩐지... 여행 마지막날 윤하가 나한테 전화한게 그거 때문이었군요? 내가 기억을 잃었던 상태만 아니었으면 작전이 무너졌을 지도..."

레이누나가 진짜 큰일날 뻔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당시에 난 이 기회에 윤하의 마음을 확인해보기로 했었거든? 마침 그때쯤 윤하도 내게 어느정도는 마음이 있었던 때라, 이 기회에 아예 윤하에게 향한 내 마음을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었더."

"그래서. 어쨌는데?"

"... 고백했어, 보기좋게 차였지만 계획대로였으니 뭐. 근데 문제는 그 다음의 납치 사건이었지... 납치당한 뒤로 윤하에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겼고 남자들이랑 스킨쉽은 아예 하지도 못하게 됐더라고."

그 말을 하는 우주의 표정엔 약간 아쉬움이 보였다. 아무리 '조율자'의 입장으로 윤하를 지키고 있었다지만 그녈 위한 마음은 진심이었던 게 분명하군.

"근데 웃기게도 너랑은 붙어 있어도 아무 문제 없더라? 신기하더라고. 저게 바로 운명의 사랑인가 했어."

"... 확실히 나도 굉장히 이상하긴 했어. 얘가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걸 분명히 들었는데 나는 아무 문제없이 만지더라고."

"...음 그래 그러고보니 위기가 한 번 더 있었구나."

"응? 그 뒤론 별 일 없지 않았어?"

우주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치 '왜 이 사실을 윤하가 재희에게 상담하지 않았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상하네, 이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일인데 그래 도대체."

"요즘 가장 고뇌하며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내 친구녀석 얘기야."

"엥? 설마 장민혁?"

그는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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