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결국 가희한테 그 말을 못했네. 그래도 이미 아빠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니 다행인건가..."
가희에게 내가 하려고 했던 말. 그건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돌아가신 우리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빠가 말을 잘 해 놓으신 덕인지 가희는 스스로 그 사실에 어느정도 기쁨을 표시하며 나를 떠나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나에 대한 사랑과 소유욕을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전에 그녈 위해서 아무 미련없이 나에 대한 애정을 양보했던 윤하의 공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윤하는... 저렇게 정신을 잃고 누워있으면서도 날 항상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바보같이 어긋난 사랑에서 헤매고 있을 때 윤하는 그 사이에 알게 모르게 많은 걸 준비하고 떠났구나...'
힘없이 병원 복도를 거닐다가 자리로 돌아온 나는 문득 바라본 윤하에게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
늘 무표정으로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던 그녀가 살짝이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난 그걸 보고 너무 놀라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윤하야. 윤하야? 윤하야, 내 말 들려?"
그러나 그녀는 무슨 행복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미소짓고 있을 뿐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 하는 것 같았다.
"...행복하니 윤하야...? 난 너가 너무 보고 싶어 죽겠는데..."
또 눈물이 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은 채 난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 * * * *
"큭큭... 아 ... 배야, 하아...!"
"그렇게 웃기냐?"
"아...어 진짜, 응?"
한참을 미친듯이 웃던 나는 뒤에서 누군가가 날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봐도 허허구름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사신이 말을 걸어왔다.
"왜 그래? 뭐라도 있어?"
"아... 아니, 누가 날 부르는 것 같아서. 하긴 이런 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리가 없지만."
"이젠 환청까지 들리냐, 슬슬 미쳐가는구만..."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암튼 아까 해주던 그 도둑 얘기나 계속 해 줘봐, 그래서 어떻게 됬는데?"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난 사신에게 다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 녀석 정말 이야기꾼 해도 될 정도로 많은 이야길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계속 이 공허한 중간계에서 혼자 보냈기 때문인지, 나와 함께하는 녀석의 표정도 점차 밝아지는 것 같았다.
"드헉!"
"...어이구, 자, 잡아."
앞으로의 중간계 생활이, 절대 지루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휴... 왜 이렇게 구멍이 많은거야?!"
"발 조심해야지, 그리로 죽은 사람들이 올라온다구?"
왠지 이 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지만, 이 녀석과 함께라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 * * * *
며칠이 지나고, 10월 26일이 되었다.
사고 당시 부러진 줄 알았던 팔은 크게 부서진 뼈가 없어, 수술받고 깁스한 지 약 한 달만인 어제 석고를 떼었다. 의사 말로는 이제 어느정도 뼈가 붙어서 좀더 가벼운 압박대로 바꿔준다고 했다.
내 몸이 거의 다 회복되었다는 생각에 힘이 났다. 이 부러진 팔만 다 낫는다면 윤하를 위해서 좀 더 많은 것을 해 줄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날은 내게 기쁜 일만 일어난 날은 아니었다.
충격적인 날이기도 했으니까.
"재희야, 자고있었어?"
아침의 노곤함에 나도 모르게 병실 밖 의자에 가로로 누워 자고 있던 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우주였는데, 손에 사과 한 봉지를 들고 온 것 같았다.
"어... 우주구나."
난 재빨리 입에서 흐르던 침을 훔치고 똑바로 앉았다. 우주는 잠깬 나를 보호자 대기실로 데려가더니 그 위에 봉지를 내려놓고 과도를 가져와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야? 요즘에 게속 안 보이더니..."
병문안 차 왔겠지만 난 우주가 혹시나 뭔가 할 말이 있진 않을까 싶어 은근슬쩍 녀석을 떠 보았다. 사과를 깎던 우주는 내게 한 조각을 건네주고 다시 나머지를 깎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과를 받아먹으면서도 졸음이 쏟아지려고 해서 눈을 꿈뻑이던 나는 우주의 말에 눈이 번뜩 떠졌다.
"아니 뭐 별일이라기보다, 감사를 표하러 왔어. 재희의 몸 속에 깃들어 있는 서윤하에게 말이야."
"뭐?"
이럴 수가, 우주는 나와 재희가 뒤바뀌었음을 알고 있었다. 분명 가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과 민혁이 뿐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이 두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보여주면 그에대한 설명이 될까 싶네."
말을 마친 우주는 문 뒤를 가리켰다. 곧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문이 열리고 그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같은 흰색의 후드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둘 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여성은 리본을 잔뜩 가디건에 장식해놓았고, 한 꼬마는 삐져나온 금발의 머리칼이 보이는 정도...
"누구지?"
"이번 사건 때 아저씨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두 사람이야. 너도 얼굴을 보면 아마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을걸?"
퍼뜩 과거의, 아주 옛날 기억 속에 남은 두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이 두 사람..."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두 사람이 가볍게 후드를 벗어 넘겼다. 아아... 역시 내가 방금 떠올린 그 두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 모습이 꽤 변했지만 분명 그들이 분명했다.
"오랜만이야 윤하야. 잘 있었니?"
"안녕 누나, 흠. 이제 형이라고 불러야 되나?"
내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가던 두 사람, 재희를 만나기 전에는 내 곁에서 친척과 같은 느낌으로 함께 했었던 가족 같았던, 형제 같았던 이들.
"레이 언니... 그리고 소이치로..."
어느 덧 갓난아기가 아니라 훌쩍 커버린 소년 소이치로와, 늘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나와 소이치로를 지켜주었던 레이 언니가 떡 하고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임과 동시에, 윤하가 과거 일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푸흐흐... 그 모습에 '언니'는 좀 그렇다 윤하야. 아니, 재희야~"
"지금 웃을 때에요?! 나한테는 어떻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윤하를 저 꼴로 만들어 논 거에요 대체!"
깔깔 웃는 레이 누나를 보면서 난 사고 일이 생각나 정색을 하며 화부터 냈다. 생각해보면 10년 전부터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 전부 한 달 전 '그 날'의 사고를 막기 위한 작전 때문이었을 게 뻔했고,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빠랑 셋이서 작당해가지고 윤하를 희생시킨 것도 기분이 나빴다.
"그럼 형한테 말했으면 허락했을 거임?"
"했겠냐!"
{... 어짜피 허락 안 할 거였으면서, 괜히 화냄.}얼씨구, 소이치로 이 자식아 일본어로 말해도 대충은 알아 듣거든? 일본어로 꿍시렁거리지 말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 말 안했지. 어짜피 재희 네가 허락 안 할 거라는 것 알고 있었어. 그리고 아저씨가 널 살리려는 마음과 윤하가 너 대신 희생하겠다는 마음도 엄청 강했구 말야. 결국 2대 1이지? 그래서 숨겼어."
끙... 정말 반박할 마음이 사라지게 만든다니까. 하긴 내가 아무리 반댈 하면 뭐하나. 날 살리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여튼 재희야. 오늘 온 건 우주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쉽게 믿지 못할 것 같아서 우리가 같이 온 거야."
"...무슨 말 하려고 그러는데?"
우주는 잠자코 사과만 깎다가 3개 째로 사과 토끼를 만들고 나서 과도를 내려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려는 말은 말이지..."
============================ 작품 후기 ============================
+14.07.11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