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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88화 (87/188)

88화

"윤하야... 나 한 가지 더 묻고싶은게 있는데 대답해줄래?"

"응. 물어봐도 돼... 대답해 줄게."

그녀의 질문이 끝나면 난 그녀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힐지도 모르는 한 마디를 해 줘야만 한다.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윤하 너는... 지금도 날 예전처럼 사랑하고 있니?"

이런, 한 방 먹었네. 그녀는 정말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내가 그 얘기를 하려는 걸 어떻게 알고.... 진실을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내 심경변화 역시 전혀 모르는 상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이렇게 되면 어떻게 대답해줘야 내 마음까지 잘 전달될 수 있을까나?

"...그... 지금 말이지."

그러나 내가 잠시 뜸을 들인 사이, 가희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뜸을 들인다는 것... 그것은 곧 내가 그녀의 말에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다시말해 나의 그녀를 향한 사랑이 예전같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됐어 대답 안 해도 이젠... 알 것 같아."

"가희야."

그녀는 살짝 미소를 보이더니 이내 다시 굳어진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윤하야 너... 사실 재희와 사촌 관계가 아니지?"

"...! 아, 그... 그건 말이지ㅡ"

"괜찮아 더 이상 말 안 해도. 사실 윤하가 사고를 당한 뒤 부터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어. 오늘 병원 앞에서 너희 아버지께 여쭤본 뒤에 확실히 알게 됐고."

당황한 내가 횡설수설하려는 것을 제지한 그녀는 계속해서 자기가 알고 있거나 혹은 대충은 감 잡고 있었던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는 언제 또 가희랑 마주쳤담.

"병원 안에서 생각해 보니까.. 너희 둘의 그동안의 행동으로 봤을 때 집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긴 시간동안 함께 지내다보면 고운정만은 아니더라도 정이 쌓이잖아. 그리구... 나랑 싸우거나 할 때면 당연히 재희와 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가희가 내가 말할 생각도 하기 전부터 날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때부터였다.

"실제로도 윤하 너는 재희에게 되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어. 그리고 사고 나기 전에는 거의 나보다 재희와 더 알콩달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해. 처음 네가 재희에게 마음이 기울려고 해서 재희를 우주와 함께 여행보내기도 하고 두 사람을 자주 붙여놓으려고 애 썼지만 어쩐 일인지 재희는 여행 후엔 오히려 우주와 사이가 더 멀어졌지 뭐야?"

바로 가희가 눈치가 빠르고, 타인의 감정을 쉽게 읽어내기도 했으며 욕심과 소유욕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약하고 양보심이 많은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난 그때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때부터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윤하가... 언젠간 나를 떠나갈 거라는 걸 말야. 그리고 나서 재희에게 갈 것이라는 것도 믿고싶진 않았지만 그 당시 분위기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

이런 그녀에게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은 정말 심한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하지 않으면 그녀는 중학교 3년간 나와 했던 사랑을 모두 거짓부렁으로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오늘 너희 둘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니까... 재희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섣불리 병실에 못 들어왔어. 생각해 보면 재희에게 우주는 정말 어릴 때 부터 소중한 친구였을 텐데 그런 둘의 우정도 모르고 난 우주를 재희에게 떠밀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진짜 너무너무 미안했어..."

그녀에게 그 3년간의 사랑은 참된 것이었다고,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윤하 넌 잊었을 수도 있는데, 네가 나한테 재희의 모습으로 고백했던 날 기억나? 그 날 재희가 엄청나게 힘들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어."

"내가 고백한 날? 분명 그 날 재희가 내게 널 데려가라고 전화를 해 줬던 것 까진 기억나는데... 그게 왜?"

"윤하야 정말 모르고 있었어? 재희는 널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맘 못 느끼고 있었니...?"

아... 아니, 그 마음... 아마 그 당시엔 몰랐겠지만 지금은 알아. 재희가 날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걸...?

"아저씨가 전부 다 얘기해주셨어... 재희가 10년 동안 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재희는 그런 힘든 와중에도 날 위해, 널 포기했던 거야. 10년이나 같은 마음인데도, 바뀐 너희 둘 사이에서 힘들어하던 날 위해 그런 마음을 접으면서까지 양보해 준 거라구!"

그래... 그 때 정말 나는 재희에게 엄청 큰 상처를 주고 말았었다. 그 후 체육대회 끝나고 나서도 놀이동산에서 그를 차갑게 버려두고 떠나버렸고... 그런 그녀가 의지할 곳 찾아 소꿉친구인 우주를 찾아간 것도 당연한 것이었겠지. 다시 생각해도 난 재희에게 몹쓸 짓을 한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전부 다 재희를 위해서, 정확히 말하면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건데. 기억을 잃은 게 나의 잘못된 태도에 큰 굴곡을 만들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운명의 장난. 이게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면 무어라고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난 최근에 윤하 너랑 자주 다투면서 생각했어. '아... 이제 윤하의 사랑은 내게서 떠나버렸구나, 윤하는 이미 내가 아니라 재희를 더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

계속되는 가희의 탄식에 난 뭐라 할 말을 잊은 채 꿀먹은 벙어리처럼 그녀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거 알아 윤하야?"

"응? 뭘?"

한동안 후회를 늘어놓던 가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게 중요한 할 말이 있다면서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왜였을까, 그런 그녀에게서 '그래도 다행이다...'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가 다음에 꺼낼 말이 뭔지 어느정도는 분위기로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나, 이제 곧 유학가 독일로."

"...뭐?"

하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자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하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유학...? 유학이라니, 그런 말 내게 한 적 없었잖아 가희야! 아니, 아니지 설마 그 때 말했던 그게...

「알았어. 그런데, 있잖아... 나 볼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니?」

가희가 나에게 사랑이 진심이냐고 의구심을 표해왔던 그 날, 그녀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면서 학원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며 했던 그 말. 그 말은 분명 그녀가 이미 유학을 결심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11월 17일 밤 비행기로 떠날 거야... 엄마가 이모 소개로 그 쪽 고등학교에 편입시키기로 하셨거든. 마침 나도 가고싶었던 쪽의 특성화 학교이기도 했고, 독일어는 어느정도 할 수 있으니까 갈까 말까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렇다면 가희는 나와 윤하의 일 때문에 섣불리 그 제안을 수락하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내 확실하지 못한 대처로 인해서 하마터면 가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함께 그녀의 절실한 기회조차 놓치게끔 만들어 버릴 뻔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되서 정말 다행이야. 사실대로 말 해줘서 정말 고마워 윤하야. 아니 이젠 재희라고 불러야겠지...?"

"아니야! 내가 미리 말 했어야 하는데 말 하지 못하고 계속 숨겨왔잖아... 정말 미안한건 나야 가희야. 너가 화를 내도 모자랄 상황이라구!"

"아니, 괜찮아. 너와 윤하 사이의 일을 듣고 나니 오히려 내가 끼어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걸? 오히려 이렇게 마음편히 유학 갈 수 있어서 정말 난 홀가분해 재희야."

난... 슬펐다. 그녀에게 아까부터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그녀를 향한 3년간의 사랑에 숨겨진 진실을 말 못 해 준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다. 지금이라도 말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가희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그러시더라. 내가 너희 어머니랑 완전 판박이라구 말야."

잠깐, 아빠가 그런 말 까지 해 줬단 말이야 그럼?

"고마워 재희야. 날 사랑하던 그 때 마치 엄마를 사랑하는 것 처럼 뜨겁게 사랑해줘서. 내가 그 사랑을 받아 행복할 정도로 사랑해줘서 고마웠어."

마지막 말을 남기기 전 그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가 하려던 말까지 이미 듣고 이해하고 마음속에 따스히 간직해둔 상태였다는 걸... 이제서야 알아버렸다.

"그럼... 나중에 봐! 나 갈게!"

그렇게 가희는, 슬픈 표정으로 병실에서 쓸쓸히 나갔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뒤늦게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그녀는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러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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