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3. 예상치 못한 미래>
이틀 뒤 오후에 아빠가 생필품을 사러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계속 병원에서 윤하를 간호하고 과거 이야기를 생각하고, 아빠에게 숨겨진 과거 이야기를 듣느라 전혀 몰랐는데, 내가 없는 방과후 시간동안 친구들 사이에선 많은 얘기가 오고갔던 모양이었다.
특히, 가희에게는 어떠한 큰 심경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다짜고짜 나에게 본론부터 물어보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난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했다.
"재희야, 나 정말 궁금한게 있어서 찾아왔어. 정말 솔직히 대답해 줄 수 있겠어? 정말 솔직하게..."
"어, 어...? 뭔데?"
그러나, 그녀가 툭 던진 한마디는 무려 피할 수도 없을만큼 강력하고 충격적인 한 방이었다. 난 가희의 말을 듣자마자 침착하려 했지만 나도모르게 놀란 기색을 들키고 만 것 같았다.
"너 혹시... 내가 알던 그 윤하 아니니?"
오 마이 갓.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아챈 것일까. 사실 그동안 내가 애정공세를 펼치면서 윤하다운 면모를 여러 번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 믿엇고, 지금까지 잘 그래왔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던 건가?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저 사실을 깨닫게 된 걸까, 지금이라도 더 거짓말을 늘어놓아서 그녀를 계속 속여야 하나?
일단 계속 발뺌하자. 이제와서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된들 좋은 일이 생길리는 절대 없으니까.
"응? 무슨 소리야, 윤하는 여기 있잖아."
최대한, 최대한 침착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한다. 난 원래부터 한재희였다. 태어날 때 부터 한재희였다...!
"거, 거짓말 마. 너 서윤하 맞잖아. 중학교 때 3년동안 나만 사랑해 줬던 내 반쪽 그 서윤하 맞잖아!!"
"아니, 아니라니까. 왜 그래 너?! 나 한재희야, 재희."
안돼, 그녀는 뭔가 확증이 있어서 날 몰아붙이는 거야, 하지만 물증이 없는걸? 내가 끝까지 잡아떼면 제 풀에 지쳐 돌아갈 게 뻔해. 자 침착하자 난 아니야, 가희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진학 후야 그렇게 믿자.
"아니야 그럴리가 없잖아. 응? 윤하야 이제 속이는 건 그만해. 나 이미... 다 알고 왔어. 너 윤하잖아, 날 사랑했던 윤하 맞잖아!!"
"제발, 진정해 가희야! 어디서 그런 얘길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한재희 맞다니까? 너가 말하는 윤하는 지금 여기 있잖아... 그치? 그리고 나와 윤하의 몸이 바뀌었다고 말하려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상식적으로 서로 몸이 뒤바뀐다는 게 말이나 돼?"
강하게 나가자. 강하게 몰아붙여야만, 그녀를 계속 속일 수 있어. 그래야만 그녀가 의심을 누르고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될 거야. 더, 더 몰아붙여야-
"아니잖아 윤하야. 제발... 거짓말은 그만 해. 그래, 물론 내가 너와 재희가 어떨게 몸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그 동안 네가 내게 대해줬던 것 하나하나가... 완벽히 내가 아는 윤하였단 말야!!"
"하아... 내가 그저 널 만나고 나서 성격이 변한 거라면 어떻게 할래. 그것보다... 원래의 재희가 어땠는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거야? 가희야, 어쩌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만 둬...!"
난 차츰 침착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었을 뿐 더러, 점점 울 것같은 표정으로 변하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계속 그녀를 속여야만 하는지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한 거야. 너도 기억하지 윤하야? 작년 12월 졸업여행에 다녀온 직후 너의 성격이 갑자기 변해버린 걸 모른 척 잡아뗄 순 없지 않니? 그렇게 180도 달라진 윤하를 마주하다가 고등학교 들어와서 재희가 된 널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걸-"
"말 끊지 말아 줘 윤하야. 너가 아무리 발뺌하려 해도 소용없어. 난 이미 너가 모르는 증인의 말을 듣고 왔으니까."
뭐? 증인의 말이라구? 설마 윤하가 나와 바뀌었다는 걸 가희에게 말 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냐 그럴리가 없어, 그럼 대체 누가-
"어제 우연히 민혁이랑 대화를 하다가 듣게 됬어. 너희 둘이 바뀌었다는 사실."
민혁이라고? 어떻게 된 거지? 그래봤자 민혁이 녀석도 단지 추측만 할 수 있는게 아닌가? 사실을 우리들의 입으로부터 들어야만 알 수 있는건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민혁이의 추궁 때문에 윤하, 아니 재희가 사실을 말했던 거겠지만 말야."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윤하로부터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윤하는 민혁이에게 추궁당해 결국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는 뜻인가?
"너무 놀라진 마 윤하야. 아직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와 민혁이 뿐이니까. 그리고 재희가 분명히 얘기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너희 둘이 현재 몸이 바뀐 상태라는걸!"
제길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이렇게 되면 결국 거짓말 한 걸 밝힌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어떻게 하지? 이 상태로 계속 그녀를 속일 순 없다.
"말해 줘 윤하야. 제발... 이제 진실을 얘기해 줘, 응?"
그녀의 표정은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거짓말은 그만 두라고, 난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부디 사실을 얘기해 달라고.
"...알았어."
힘이 빠졌다. 그녀에게 사실을 모두 얘기해 줬다간 큰 상처를 받게 될 텐데 어떻게 다 말해준단 말인가. 그녀가 상처받지 않고 끝낼 수만 있다면 난 부디 그 방법을 택하고 싶다...
"나... 윤하 맞아. 네가 알고 있던 그 윤하가 맞아.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야."
"정말이지...?"
그녀는 그 말과 동시에 날 와락 껴안았다. 무슨 감정들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지금까지 굉장한 마음고생을 했다는 점이었다.
"나 그동안 너무나 힘들었어 윤하야... 처음 네가 바뀐 몸으로 내게 고백해 왔을 때도, 원래 사랑했던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재희에게 너무나 미안한 감정 때문에 우리가 다시 친구 관계로 돌아갈 때 까지 잠도 잘 못 잤어..."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굉장히 갸냘퍼져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런 그녀를 안고 있으니 나라고 마음이 편했을까?
"그리고 재희가 사고 당한 후에도 얼마나 힘들었다구! 물론 그 전부터 윤하 너가 자꾸만 재희에게 관심을 더 가지는 바람에 내가 원래 사랑했던 이를 질투심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 때문에 정말 힘들었지만... 너가 완전히 내게서 관심을 버리고 재희를 위해 병원에만 있으니까 난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혼자 울었단 말야..."
점점 흐느끼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진정될 마음고생이었으면 그녀가 이렇게 울부짖는 일도 없었으리라.
"내 과거의 애인을 질투해야만 하다니... 그래도 아직 그녀에게 가졌던 모든 감정을 지워버렸던 것도 아닌데... 그게 마음이 편했겠어? 아니야, 난 진짜... 하아."
숨이 거칠어지려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은 채로 한참을 앉아있었다. 몇 분이나 지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손수건으로 남은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그... 정말 바뀐 거 맞아? 나 사실 민혁이 말을 듣고나서 맞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혹시나 했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거잖아..."
그녀는 아마 내 정체를 알고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쉽게 믿고 인정하겠는가? 나도 처음 재희가 되고나서 며칠간은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는데.
"그 혹시나가 진짜야. 작년 12월 졸업여행에서 난 재희와 눈을 마주침과 동시에 몸이 바뀌어버렸고, 그 후에 예전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렸어.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난 믿을 수 밖에 없었어.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을 알게됬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나와 재희 사이에 얽힌 더욱 더 말도 안되는 운명 이야기 중 어디까지 설명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아... 진실을 밝히고 나서도 어디까지 말해주어야 할 지 엄청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난 정말 이상했어. 그 전날 까지만 해도 나한테 붙어 떨어질 줄 몰랐던 윤하가 갑자기 내 접촉에 불편함을 드러내서 정말 놀라기도 했구."
한참을 고심한 나는, 가희에게는 나와 윤하 사이의 운명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녀가 날 포기할 수 있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 줘야만 한다는 생각에, 어떤 이유를 말해야 할지 또 고민했다.
"그래도 그 당시엔 윤하 너를 상처받게 할까봐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재희였다니... 다시 생각해도 실감이 안 나. 그렇게 때문에, 윤하가 아닌 재희라서 영운고로 진학을 결정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그녀에겐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아프지 않은 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