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최후의 수단은, 바로 이웃집이던 우리 집을 멀리 이사시킴과 동시에 재희와 영영 안녕을 고하는 것이었다. 나의 일부나 다름없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재희를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난 떨어지기 싫었지만 떨어져 사는 것을 택했다.
「최대한... 길가다가도 마주치지 않게... 멀리 가요.」
그리고 그와 확실히 연을 끊기 위해 다시 그에게 까칠한 태도를 보였다. 재희로써는 프로포즈까지 받아 준 이성의 갑작스런 변심에 충격받았을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확실히 연을 끊지 않으면 재희가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나설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덜컥 들었기 때문이었다.
「재희라면 분명 사정을 알아버리면 날 살리겠다고, 자기가 대신 희생하겠다고 울며불며 매달릴 게 뻔해. 난 그런 잔인한 상황을 눈으로 보긴 싫어...」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급작스런 변심에 재희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래, 그렇게 크게 놀라는 게 오히려 좋을지도 몰라, 확실하게 날 잊어버려. 재희야.
「앞으로 아마 볼 수 없을 거야. 그럼 갈게.」
「아... 진짜 가는거야?」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뒤돌아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 준 뒤 그의 곁을 떠나고 싶었다. 영영 재희를 볼 수 없을거라 믿었기에 마지막으로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보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들었지만 그마저 그를 위해 포기했다.
「미안... 다 널 위해서란걸 알아줬으면 해.」
아마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한 마디는 재희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기 직전 나는 재희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었을지. 혹시 엄청나게 미움을 받거나 한 건 아닌지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재희를 떠나고 난 뒤부턴 난 새로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중학교에 진학한 뒤 가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최대한 재희를 잊고 있어야 내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란 강한 신념 때문이었는지, 난 빠르게 엄마와 너무나 닮은 가희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어버렸다.
결국 3년이라는 중학생 시절동안 가희에게 푹 빠져버린 나는 본능적으로 재희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혀져 버린 재희의 존재는... 아마 내 기억 속 한켠에 조용히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한창 가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재희는 그 10년간 날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다시 만난, 그것도 아주 우연히 만나게 된 그의 모습은 옛날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날도 난 그를 거기서 만나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 했다.
문제는, 그를 보자마자 잊고 있던 내 슬픈 과거가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재희를 보기가 무섭게 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재희가 왜 여기에...!」
하지만 서로 눈이 마주쳐버려 시선을 회피하려 한 순간, 난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정신이 들었을 땐 난 이미 재희의 몸에 들어온 뒤였다. 사고가 일어난 뒤 지금 현재까지 내가 가장 후회하고 있는 것. 재희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그 뒤 가희에게 엄마를 향한 그리움으로 인한 맹목적인 사랑만을 갈구하던 나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혔는지도 모른다.
난 왜 그녀에게 차가울 수 밖에 없었던 걸까? 해답은 바로 그를 내 운명에 휘말리게 하지 않기 위해 멀리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까칠한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난, 그에게 차가운 감정만 남아버렸던 것이다.
* * * * *
"우왁?!"
으아 놀래라, 구름 사이에 구멍이 있는지 전혀 몰랐네 이거. 이 녀석이 안 잡아줬으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자 올라왔!"
사신이 힘껏 잡아당겨 준 덕분에 난 가뿐하게 구름 위로 다시 올라왔다. 어찌나 그 힘이 셌는지 하늘로 높이 떠올랐다가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며 큰 대자로 떨어졌다.
[퍽-]
새하얀 나의 원피스가 아름답게 펄럭였고, 내가 떨어진 자리의 구름들이 부서지며 눈처럼 피어올랐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에, 난 순간 하던 말도 잊은 채 하늘만 보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지?"
"어... 아 맞아. 아주머니랑 약속했다고 했지. 윤하를 지키겠다고 말야."
"그렇게 버림받고 냉대받으면서도 말이냐?"
사신이 내가 대답함과 동시에 한심하단 듯이 쳐다봤다. 대충 표정을 읽으니 '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미련퉁아-'란 말을 하려는 듯 했다.
"아우, 젠장. 그건 다 이유가 있을 거라니깐! 막판에는 완전 분위기 좋았다구!"
"으이구... 잘났다 잘났어."
"뭐 그런 녀석의 태도에 실망해서 중간에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긴 했지만 말야."
사신은 뭔가 말하려는 듯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은 듯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난 마침 예전의 놀이공원에서 재희에게 버림받았던 것이 생각나 약간 울적한 기분이 되어버린 상태여서 분위기를 읽고 그냥 듣고 있기만 하기로 해준 사신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 땐 나나 재희나 기억이 없어서 좀 특별한 상황이기도 했었고... 기억이 돌아오고 나니까 내가 그토록 재희에게 매달리려 했던 이유도, 재희가 내게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도 모두 이해가 되더라구."
난 나지막히 얘기하다가 문득 더 옛날 일이 떠올라 손뼉을 딱 하고 쳤다.
"아 그리구, 진짜 오래 된 얘기지만... 난 여기저기다 다 약속까지 하고 다녔거든? 특히 재희에게는 더욱 더 강하게 약속했고."
「좋아해 윤하야! 나중에 커서 꼭 내 신부가 되어줘!」
그 말을 윤하에게 하고 나서 난 그녀와 평생 지켜야 할 약속을 한 가지 했었다. 윤하는 알고 있었을 지 모르겠지만, 난 그 당시 이미 그녀의 아버지와 얘기해 뒀던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널 꼭 지킬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아마 이 말 때문에 헤어졌던 우리 둘이 다시 기적적으로 만나게 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누가 그랬던가. 난 그녈 위해 정말 간절하고도 간절히 매일매일을 보냈었다.
*
"야, 서진. 유나도... 저렇게 많은 이를 위해 스스로 나서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라고 안 그럴 수 있겠어. 게다가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딸아이를 위해서라는데 말야... 그리고 우리 재희도, 이 제안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뭐?"
그 때, 꿈을 꾸다가 꿈은 잘려나갔지만 난 기억하고 있었다. 윤하가 우리집에 오기도 전에 난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고, 그녀의 얼굴도 보기 전에 그녈 위해 희생하겠노라 선언했다.
"안녕하세요."
"아... 재희구나, 그게 무슨 말이니 너..."
그 땐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나로서도 그 이유가 신기할 따름이다. 다만 추축해보건데, 난 그녀의 부모님을 만났을 뿐이었는데도, 그녀에 대한 상상속 이미지만으로 첫눈에 반했던 게 아니었을까.
"저요, 절 써주세요... 이미 부모님과도 얘기했어요."
"아니, 재희야. 이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란다. 자칫하다간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라구!!"
그 당시부터 어찌나 그녈 구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는지, 그 때의 의지가 윤하가 온 뒤까지 쭉 이어져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녀가 돌아가기 전 까칠한 태도만 아니었다면... 난 그녀와 빠른 시일 내에 연인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관없어요 아저씨. 전 이미 결심했는걸요. 윤하의 운명은 너무 딱해요... 제가 나서서 그녀의 운명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전 진짜 행복할 것 같아요."
"재희야..."
"그러니 제발,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이건 제 의지이자... 윤하를 향한 마음이에요."
마지막으로 윤하의 어머니가 내게 물었을 때에도, 난 담담한 태도로 그녀의 질문에 또렷이 대답했다.
"아마 죽진 않겠지만, 운명을 거역한 대가를 재희 네가 대신 치러야만 할 거란다... 그래도 넌 우리 윤하의 운명을 대신 짊어질 거니?"
"...네, 물론이요!"
그리고 난 그 질문을 10년 후에 또 한 번 받게 되었다.. 바로 사고 당일날 내 꿈속에 나타나셨던 윤하의 어머니로부터 말이다.
「그래도 재희 넌 우리 윤하의 운명을 대신 짊어질 거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 역시 10년 전 그날과 같은 대답을 했다.
「네, 물론이요」
그리고 거기다가 10년동안 커져버린 내 한결같은 마음도 같이 덧붙여 그녀에게 전했다.
「왜냐하면... 전 윤하를 제일 사랑하니까요. 처음 만났던 7살 때 부터 쭉, 제 유일한 사랑은 윤하 뿐이었어요.」
그렇게 눈이 높고 까다로웠던 나의 성격이, 단순히 확고한 이상형 때문은 아니었단 걸, 내가 한 이 말은 분명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내가 단순히 눈이 높았던 게 아니라 한 사람만을 원해서 그리 된 것이란 걸. 내 첫 사랑이자 10년 째 사랑, 그리고 마지막 사랑이 될 윤하를 향해 말이다.
<12. 예정된 사랑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