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부상... 부상? 언제 받은거지?
[설마 모르는건 아니지? 니가 말해줘서 내가 한걸음에 달려가서 받아왔잖아.]
아! 설마 축제 인기투표 1등 해서 받은 그건가?
[암튼... 이게 날짜가 오늘이더라구. 내 생일이기도 한데 누구랑 가야 할 지 결정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구. 애들이랑 분명 파티도 할 거고 한데... 이게 또 시간이 오후 6시잖아? 그래서 파티하다가 중간에 빠져나가면 될 것 같더라구!]
혼자 말하고 혼자 신나서 박수치고, 혼자 깔깔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어떻게든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어졌다.
[그니까 이렇게 말할게 잘 들어? 혹시 만약에 말야, 정~말정말로 만약에 내가 아무 일도 없이 저녁을 맞이한다면...]
그녀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계속 끌었다. 왜 그러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맞이한다면...?
[아무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콘서트에 가주지 않을래?]
어... 어? 너 데이트 신청하는거야 지금? 그것도 임자 있었던 사람한테?!
[나 말야... 요즘 진짜 이상하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너만 떠오르고, 눈 뜨기 전에는 항상 너에게 따스히 안겨 있거나 손 잡고 있는 꿈을 꿔. 분명... 니가 날 놀이공원에다 버리고 가희를 만나러 갔을 때 완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럴까? 그리고 남성공포증이 생겼는데도 이상하게 너는 만져도 아무렇지 않은 거 있지? 그래서 더 그런가?]
얘, 얘, 얘가 무슨 소리야 지금!! 아빠도 보고 있는데 부끄럽게!!
[그런데 이 느낌 처음이 아닌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과거에 한 번 이렇게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 걸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처음이 아니라구. 그래, 나도 알아 처음이 아닌 게 맞지. 아마 윤하도 알고 있겠지만 이 당시에는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던 걸까?
[아무튼 약속해줘. 꼭이다? 히히... 마지막으로... 좋아애. 진짜진짜 엄청 좋아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동영상은 끝났다.
그리고 윤하와 함께였던 과거의 기억들이 눈 앞으로 하나하나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그는 내게 엄청나게 관심을 보여왔다. 반대로 당시에 충격이 굉장히 심했던 나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야.」
왜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다가온 그의 첫인상은 굉장히 부드러웠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녹아내려 갔다.
「티비만 보지 말고 나랑 놀자.」
「...」
엄청나게 어두운 오라를 풀풀 풍겨대는 내 곁으로 그는 어떻게 다가와 말을 걸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그런 밝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수가 있었을까.
「윤하야, 윤하야!」
아... 정말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몸이 바뀌기 전인 10년 전에도 난 재희에게 참 몹쓸 짓을 많이 했었구나. 하여간... 이놈의 성격은 정말 답이 안 나온다니까.
「...저리 가.」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까칠하고 지독한 성격의 나에게 그칠 줄 모르고 달려들어 내 마음의 벽을 아주 조금씩 깎아내려갔다. 정말 대단한 집념이다 싶을 정도였다.
「가라니깐!!」
이런식으로 다가오는 재희를 밀쳐내고, 밀어내고, 쫓아내기를 아무리 반복해도, 그의 날 향한 공세는 멈춰지지가 않았다.
「윤하야~ 윤하야~!」
「가까이 오지 말라구 했다?」
아빠가 내 곁을 떠나 잠시 해외로 가 버린 중에도 재희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안 웃을거야?」
「영원히, 쭉, 계속.」
신기한 건, 그렇게 여러 날 동안 내게 버림받고 차였으면서도 수많은 대화거리를 가져와 내게 이야기 해 주었고, 매 번 다른 방식으로 내게 접근해왔다.
「아~좀 같이 놀자! 혼자 놀면 심심하잖아!」
「싫다구 좀!!」
아이구... 가끔은 좀 심한 폭력도 휘둘렀구나. 미안 재희야.
하지만 내가 재희에게 이렇게 까다롭게 굴었던 것도, 엄마를 만난 뒤에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엄마가 내게 사랑의 말로 마음의 벽을 허물어준 덕에, 난 재희에게 나의 본심대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진짜 뭐가 이렇게 어려워?」
「윽, 안돼! 자꾸 그렇게 던지면 컨트롤러 망가져~!」
그와 같이 게임도 많이 하고, 대화도 많이 했다. 아빠가 돌아오기 전 계속되는 시간동안 재희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함께하는 동반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우, 진짜. 너 잘하니까 좀 봐 줘도 되잖아?」
「아... 지금도 충분히 봐주고 있는데 어떻게 더 봐줘?」
「아씨 나 안해. 진짜 다른 것 좀 없어? 맨날 치고박고 싸우는 것도 질린다.」
어찌보면 아빠가 없는 그 동안, 재희는 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 안돼~! 진짜, 오늘은 이거 하기루 했잖아...」
「그럼 다른거 해. 그럼 계속 한다.」
물론 재희가 대부분 내 이기심을 받아주었고, 어리광도 받아주었고, 모든 귀찮은 일과 짜증들을 전부 대신해서 해결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휴, 알았다 알았어. 그럼 '햄스터 헌터'하자. 이건 같이 할 수 있어.」
「...? 그건 또 뭐야. 처음 듣는 게임이네.」
「흐흐 말도마. 너 이거 하기 시작하면 못 빠져나와.」
재희는 정말 내게 엄청나게 헌신적이었고 희생적이었다.
「좋아 그럼 하는 법 좀 알려줘.」
「헤~ 맡겨만 주시라! 잘 봐?」
어찌나 그렇게 나에게 희생적일 수 있었던 걸까 재희는...?
예나 지금이나 날 위해 매번 양보하고 이해하고 희생하는 것, 그가 생각하는 나만에 대한 무언가가 있는 걸까?
「짜잔. 이게 뭐~게.」
「오... 장미야? 그런데 종이네.」
「응 종이로 접은 장미니까. 오늘 배운거야.」
아빠가 돌아와 나에게 운명과 운명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주기 전 까지는 재희는 나의 연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그의 모습대로만 보면.
「근데 이런 건 왜 줘? 꽃냄새도 안나잖아.」
「끙... 기다려봐봐.」
그리고 정말 까다로운 성격으로 인해 아무도 쉽게 대시해 오지 못했던 서윤하에게 유일하게 프로포즈 해 온 사람이기도 했다.
「헤헤, 짠! 봐, 이쁘지?」
「우와. 이렇게나 많이 접은거야? 진짜 이쁘다!」
「그, 그리구 말야 윤하야. 할 말이 있어.」
그 때, 재희가 건네주었던 종이 꽃다발에 뿌려진 인공 향료의 냄새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응? 뭐?」
그리고... 재희가 꽃다발과 함께 내게 했던 말 역시, 모두 기억에 선명하다.
「좋아해 윤하야! 나중에 커서 꼭 내 신부가 되어줘!」
난 그 때 뭐라고 했더라? 기분은 어땠었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으려나?
「그... 그래.」
내 대답에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내 볼에 뽀뽀했던 재희가 문득 엄청나게 그리워졌다. 내 옆에 비록 다른 모습을 하고 누워있지만 단 한번만이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냐구? 난 그의 프로포즈를 승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저버려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믿을 것 같아?」
「윤하야. 제발 진정하고 잘 생각해! 너희 엄마가 내게 남기고 간 마지막 부탁이다. 널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 힘을 보태고 있는 지 아니?」
「아...! 진짜! 기껏 돌아와서 한다는 얘기가 그거야? 그럼 나보고 어떻하라구... 재희한테 가서 나 대신 좀 죽어달라고 얘기라도 하란거야?」
얼마 후 일본에 갔다온 아빠가 돌아와 나의 운명과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해 주었고, 난 그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모든 이야기가 어처구니없었지만,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건, 날 살리기 위해서 재희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안 돼... 난 그렇게 못해. 내가 혼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재희는 안돼!!」
당신이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하나뿐인 혈육인 아빠도 급한 일이 있다고 떠나버려 홀로 남았던 내게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이었던 사람을... 나 하나 살겠다고 희생시키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하야, 제발... 재희도 이미-」
「싫어, 싫다고!! 난 당장 여길 떠날거야!!」
결국 죽었다 깨도 재희를 희생시킬 수 없다고 다짐한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