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 * * *
모든 얘기들을 전부 듣고 난 다음, 난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오직 나 하나를 위해서 엄마 뿐만 아니라 윤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왔는지를 알고 나니 지금 살아있는 게 그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그럼 윤하는 자기가 이런 꼴이 될 걸 알면서도... 그 사고가 난 날에도 나에게 아무런 말 안 했단 말이에요? 오직 날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어찌 이 무슨 말도 안 돼는 희생정신일까. 그녀는 대체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자기가 저런 꼴이 되었는데도... 어떻게..."
내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데,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혹시 사고 직전까지, 윤하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적은 없었니?"
"...아뇨. 많았어요. 마치 이 녀석에게 곧 위험한 일이 닥칠거라는 걸 암시라도 해주는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아빠의 표정을 보니,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고 계신 것 같았다.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픈 감정은 대체...
"난 윤하가 그런 위기에 닥칠 때 마다 옆에 함께 있었단다. 넌 아마 모르겠지만 일본 여행중에도 불길한 일이 끊기질 않았었지. 설마 납치당할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레이와 소이치로와 함께 그녀를 구하면서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기쁨? 안도? 놀람?
"비록 내 자식은 아니지만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윤하가 다치는 걸 나 역시 보고싶진 않았다. 다만... 내가 10년 간 널 살리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이 좋게 결과를 맺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난 기뻐할 수 있었다."
제길, 더이상 아빠를 볼 수가 없다. 윤하 얘기를 하면 할 수록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정말 윤하에게 어떤 감사의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윤하가 원래의 네 운명을 짊어지고 완벽히 받아들이기로 하지 않았다면, 계획이 틀어져 결국 재희 너가 생명을 위협받게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윤하의 마음은 정말 굳건하고 확실했던 모양이구나... 운명의 화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윤하에게 꽂힌 걸 보면."
아빠 말로는 모두 그녀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잇었던 일이었단다. 아무리 10년간 노력해 온 것이 있었어도, 윤하의 의지가 없었으면 지금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라고.
"마지막 순간에 너도 보지 않았니? 윤하의 의지를."
"마지막... 순간요?"
"네가 떨어지는 윤하를 구하려고 뛰어들었을 때, 윤하가 어떻게 했는지를 말이야."
난 떠올리기 싫었지만,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고 당일의 기억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날 분명 자신을 구하려던 날 도로 밀쳐냈었다.
"윤하는... 날 밀어냈어요. 자길 구하러 뛰어든 내가 다칠까봐서, 오히려 날 위험해서 구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입으로 무언갈 중얼거렸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녀는 날 살리면서 뭐라고 말 했던 거지?
"그리고 뭔갈 말했어요... 뭔가를 내게..."
아. 그 입모양.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그녀가 내게 말해주기 이전에도 언젠가 한 사람이 내 곁을 영영 떠나가며 했던 말이었다. 내 곁을 떠나가던 그 사람은 그 말을 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엄만 이제 가야 해. 이미 죽은 지 49일이나 지났는걸? 오늘이 널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란 얘기야 이해해?」
바로 아빠가 날 재희의 집에 맡기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남겨진 채 꾸었던 꿈에서 봤던 바로 그 사람.
「'그 분'이 엄말 부르고 있어서 가 봐야 해... 그렇지 않으면 더 슬픈 일이 벌어져 버릴 거야.」
정말 그 당시에 너무나 보고 싶었던 우리 엄마가 너무나 진짜 같은 체온과 함께 남겼던 말... 아아 모두 생각난다.
「정말... 미안하구나 윤하야. 하지만... 이건 다 윤하 널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단다. 널 위해서...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난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지났지만, 엄마가 날 마지막으로 보러 왔던 바로 그 날, 매달리던 날 위해서 해 주었던 한 마디의 말. 절대 놓을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낼 수 있게 해준, 나를 향한 사랑이 차다 못해 넘쳐 흘렀던 바로 그 말을.
「널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엄만 목숨도 아깝지 않았어...」
젠장. 윤하는 뭐라고 했었지? 내게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뭐라고 내게 말했던 거니 윤하야. 너도 설마...
'널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난 목숨도 아깝지 않아.'
아아... 아아아...
"기억났니 이제? 네가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던 윤하는 몸이 바뀐 뒤 기억을 잃고 나서도 오로지 너만 생각하고 있었단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하를 봤다. 붕대와 링거,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가련한 그녀의 모습이었지만... 얼굴의 평온한 표정을 보니 너무나도 그녀를 꼬옥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그 말을 말했던 입술도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바보같이... 바보같은 나 때문에 그 동안 혼자 고민하고 슬퍼했을 텐데... 어떻게 내색 한 번 안하고, 내게 말 한번 없이 이런 저주받은 운명을 받아들일수가 있어? 응?"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어 손을 까딱거리며 흐느끼는 내게, 아빠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 앞으로 내미셨다. 뭐지? 아빠가 내게 준 이 물건은. 굉장히 낯익은 물건이다.
"너도 이미 알고는 있지 않았니?"
윤하의 핸드폰이었다.
"윤하가 널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네 차가운 태도에 차갑게 반응했지만, 속으론 늘 따뜻했고, 널 위해 많은 걸 양보해 왔으며, 네 운명까지 짊어지기로 한 걸 말야."
난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무의식중에 자꾸만 그녀가 신경쓰였고, 사고 직전에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기억을 잃은 채였지만 나도 윤하를 이미 마음 속에 두고 있었던 걸까?
"동영상을 켜 보거라. 아마 거기에 네가 보지 못했던 윤하의 모습이 있을 거야."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어 음음. 흠흠. 아아. 잘 되고 있나?]
5초정도 짧은 말이 끝나자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동영상이 꺼졌다. 난 다음 영상을 켰다. 보고 싶은 그녀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음. 자, 그래 재희야, 음... 지금 시간은 말이지 22일 새벽 3시야. 왜 지금 이런 걸 찍고 있냐면 말이지...]
잠옷 차림으로,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은 피곤한 표정인데도 그녀는 또박또박 날 향한 말을 계속해나갔다.
[사실 좀 전에 아주머니를 만났어, 꿈 속에서... 그래서 깨 버렸거든 헤헤.]
그 동안에 받았던 신변의 위협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흐릿한 다크서클과 초췌한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한 모습의 그녀.
[아 글쎄... 예전에 분명 재희 너도 꿈을 꿨던게 기억이 팟 하고 나더라구... 그렇지 기억나지? 아주머니가 꿈에서 나타나셨던 거. 그 때랑 완전 똑같으셔서... 놀랐지 뭐야.]
그녀는 엄마를 꿈에서 봤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이렇게 심각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눈물과 함께 실소가 나왔다.
[암튼 아주머니랑 꿈 속에서 약속했거든? 그래서... 아마 나 이따가 목숨이 위태로워 질 지도 몰라.]
무슨 저런 얘길 웃으면서 하는지... 뭐가 즐겁다고.
[흠. 아니다. 이걸 볼 때 쯤이면 이미 일 터진 뒤겠네. 에... 부디 이 동영상은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찌 할 수는 없지만!]
어째서일까. 그녀가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걸 알고 있는데도 환하게 웃으려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이 왜 이리도 귀여워 보이는 건지, 난 바보같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 아마 안 죽겠지만... 기도해줘, 빨리 살아날 수 있게. 그리고 늘 내 곁에서 좀 지켜주고 있고! 외롭지 않게!]
응, 그래 계속 곁에 있었어. 앞으로도 쭉 곁에 있을게 걱정마.
[아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는데 놀라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화면에서 벗어나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근처를 뒤지는 소리가 나기를 1분 정도. 돌아온 그녀의 손엔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아 저 티켓 나도 알고 있는 거다.
[후후, 이게 뭔지 알아? 니가 말해준 인기투표 부상이야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