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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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난 사신과 같이 지내게 된 지도 어언 한 달째. 중간계에는 낮과 밤이 없이 늘 밝은 탓에 시간을 잘 알 순 없지만, 사신이 장부에 죽음의 시간을 적을 때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어이구 눈 부은거 봐라 아주 가관이다."
"우씨... 여긴 거울도 없잖아! 어떻게 보라고!"
이날도 가슴아픈 꿈들로 인해 펑펑 눈물을 솓은 뒤라 사신녀석이 꼴이 그게 뭐냐며 놀려대는 중이었다. 중간계에선 잠을 안 잔다고 사신이 말했지만 이상하게 난 눕거나 한 기억이 없는데도 자꾸만 꿈을 꾼다.
"아우... 이런 슬픈 기억들은 이제 그만 보고 싶어..."
"어쩌겠냐, 그 몸의 주인의 인생 자체가 고난인데. 애초에 중간계는 죽은 사람들이 오래 거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너의 그런 상태는 신기하긴 하군..."
좀 전에 꾼 꿈으로 인해 알게 된 윤하의 인생은 고난 그 자체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디 죽어야 마땅한 운명을 가진 아이와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바치기와 수많은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 가족, 동포들의 이야기는 정말 전쟁과도 같은 고난의 시간들이었다.
"하아... 난 어쩌다가 이런 복잡한 아이를 좋아하게 된 걸까."
"그것 또한 네 운명이지."
"끙...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또 문득 아저씨에 대한 생각이 났다.
'윤하를 살리기 위해... 아내를 떠나보내고 무려 10년간이나 노력해왔다니... 진짜 대단하신 분이야. 팔불출이실 만도 하지...'
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 가족에게 힘을 지원받아서... 완전히 등돌려버린 윤하를 위해 매일매일 짜증과 무관심을 받아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도 거의 사라져 없었을 텐데도 엄청 노력하셨을 게 보인다. 나와 윤하를 서로 바뀌게 하기 위해서, 그 뒤 오에도 온천 호텔에서 만난 건 역시 우연이 아니었던 거구나. 아저씨가 윤하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힘을 내게 불어넣기 위해서 오셨던 거였어.
진짜 내 인생도 정말 기구하기 짝이 없다니까. 과거에 윤하 부모님과 만나서 얘기했던 걸 몸이 바뀌기 직전엔 거의 잊고 있었으니... 뭐 그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아저씨의 작전이 순조로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에효...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몸도 내주고, 대신 죽어준 거나 마찬가진데 인간계에 있을 땐 늘 그 사람에게 핍박만 받고 외면당했으니... 참 슬프다 슬퍼."
"듣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구만. 정말 이 몸 주인이 널 한번도 잘 대해주지 않았단 말야?"
난 곰곰히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음... 아니다, 그래도 극히 최근엔 사랑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거 참 다행이구만."
사신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뭔가가 느껴진 듯 날 일으켜세웠다.
"자 일거리다, 어서 가야겠군. 가면서 얘기 하라고."
구름 위를 걸으며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윤하는... 아저씨께 이런 계획이 있다는 걸 몰랐던 걸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이상한 점이라, 한 두가지 있긴 했다. 10년 전 아저씨가 일본에 다녀오신 후 윤하를 데려가실 때 쯤부터 윤하가 나에게 엄청나게 까칠해졌다는 것이었고, 몸이 바뀐 뒤에도 그 까칠함은 끝나지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왜 그녀는 그렇게 갑자기 나에게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던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론 처음 봤을 때의 윤하는 그거보다 더 까칠했지만, 이후에 친해지고 난 뒤에는 정말 사이가 좋았었는데...
"그나저나 너 말야. 정말 몸이 바뀐 채 사고를 당해 중간계로 넘어오면 이런 벌을 받게 될 줄 모르고 온거냐?"
"응 전혀. 아, 아니다 조금은 알았던 것 같기도?"
사신은 내게 뜬금없이 물어보더니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녀석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 몸 주인의 엄마를 만나지 않았냐? 사고 당하기 전 꿈 속에서 말야."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녀석은 뭘 새삼 그렇게 놀라냐는 듯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너도 대충 알다시피, 그녀는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수호 부적이 되어 희생했어. 당연하게도 너처럼 그녀에게 힘을 부여한 모든 이가 죽을 때까지 중간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되었지. 그런데 그녀에게 모아진 힘이 어찌나 거대했는지, 수 년이 지나도 그녀의 몸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고."
빛나고 있다. 분명... 봤던 기억이 있다, 빛나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윤하가 어릴 때 꾸었던 꿈에 빛나며 나타났던 아주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했다. 게다가 사신 녀석이 말했듯, 사고 당일 난 꿈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는 그녀를 분명히 보았었다.
「윤하와 몸이 바뀌어서 완전히 죽진 않지만, 아마.. 운명을 거역한 대가를 대신 치러야만 할 거란다... 그래도 재희 넌 우리 윤하의 운명을 대신 짊어질 거니?」
그리고 그녀가 내게 물어왔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윤하의 짐을 대신 지겠냐는 물음에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으니까.
"그렇게 수만은 염원사들의 힘을 지니고 중간계를 떠도는 그녀는 종종 인간계의 사람들에게 꿈 속에서 나타나는 모양이야. 그것도 대체로 죽기 전날 말이지. 그래서 중간계로 오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선 '여신'을 보았다고 황홀해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고."
"하하... 여신이라니."
하긴... 빛나는 그녀의 모습이 여신 뺨칠 정도로 아름다웠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넌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몸도 지금 약간 빛나고 있어."
"뭐, 내가?"
"그래, 어떤 부적 효과를 받고 있는지는 모르곘지만 아주 약한 수준이지. 네 옷이 괜히 그렇게 반짝이는 게 아니야."
[쑤욱]
"...엄마야."
그러면서 사신은 구름 속에 손을 넣더니 어떤 사람을 쑥 끄집어냈다. 40대정도 되어보이는 아저씨였는데, 옷이 검은빛이었고 표정도 안 좋아 보였다.
"일치, 일치 일치... 지옥행이요!"
녀석은 장부를 빠르게 넘기더니 그 검은 옷의 아저씨를 다시 구름 속으로 쑤셔넣었다. 뭘 하는건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데 이번엔 웬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왔는데 흰 빛의 옷을 입고 미소짓고 계셨다.
"...일치. 영감님 천국가서 행복하쇼!"
"고마우이~"
이번엔 사신이 할아버지를 하늘로 날려보내주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할아버지는 곧 점이 되어 사라졌다.
"차이를 알겠어?"
"흰 옷일수록 선량한 인생을 살았다는 건가...?"
녀석은 장부를 마무리짓고는 옷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래 맞아. 흴 수록 그 사람의 영혼은 매우 순수하고 선량하지."
"헤에.. 그럼 난 무-지무지 좋은거네?"
"뭐 그렇다고 봐야겠지. 개중에서도 영의 영력이 강한 영혼들은 몸에서 빛이 난다고 들었어. 난 지금까지 단 두번 봤는데, 처음이 그 아줌마였고, 두 번째가 바로 너다."
칭찬일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희귀하다는 녀석의 말에 난 으쓱해져서는 기세등등해졌다. 헤헷, 역시 내 영혼은 순수 그 자체라니까.
"음하하, 그런 영혼과 함께 하는 것에 감사하라구."
"...확 버리고 가버릴까 그냥."
"죄송함다."
난 버린다는 말에 바로 엎드려 절했다. 이마가 구름에 닿아 폭신한 느낌이 온 몸으로 전해져왔다.
"아, 그런데 아주머니의 영은 지금도 이곳 어딘가에 있는거야?"
"그렇겠지, 지금도 종종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너도 그 중 한 명이고 말이지."
"그럼 혹시 만날-"
"하지만 만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려 하니 녀석은 바로 말을 잘라먹었다. 어째서 안 되는 거람?
"이 중간계가 말이지 지구 넓이만큼 넓다고. 만나려면 번개 맞을 확률보다 한참 적은 확률을 뚫어야 되는데 가능이나 하겠냐."
"...왜? 번개 맞는 사람도 있긴 있잖아!"
"그럼 혼자 찾으러 가 보시던가... 난 일해야 되서 바쁘다고."
쳇, 죽은 사람들 있는 곳은 잘도 찾아서 가면서.. 이미 중간계로 넘어온 영혼들은 찾아갈 수 없는건가?
"어휴. 너도 참 심심하겠다, 이런 구름밖에 없는 허허 벌판에서."
"남 걱정할 때냐 임마."
사신은 낄낄거리며 날 놀려대더니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내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어쩌다가 이 운명을 지게 된 거냐 넌?"
왜... 내가 윤하를 대신해 희생했냐며 사신이 물어왔다. 왜냐고...?
"그건... 아주머니랑 약속했었어. 내가 이 녀석을 지켜주겠다고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