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2. 예정된 사랑과,>
내가 사신을 만난 건 사고를 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후였다.
재희의 비명 소리를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겨버린 후, 난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붕 뜬 기분이었다.
"어디보자... 무려 16년의 세월을 거역한 인간이 한 명 왔군..."
정신이 들었을 때 주변은 온통 구름 뿐이었고, 내 옆에는 시커먼 로브를 걸친 이상한 사람 한 명 뿐이었다.
"깨어났군. 이봐, 정신이 드냐?"
우와 창백해! 이 사람 완전 귀신같이 생겼는데? 옷은 또 왜 이런 시커먼 걸 입고 있는거야? 마치 사신이나 저승사자 같은데 이거...
"내가 신기한가보군. 사신 처음보나? 하긴 처음 보겠지, 크크."
자칭 사신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낄낄낄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우아, 정색하니까 완전 무서워!
"흠... 꿈같겠지만 말야, 여긴 진짜라고?"
그러면서 낫을 스윽 꺼내드는 사신. 정말로 게임같은데서나 볼 수 있던 데스 사이드였다. 날 부분이 빛에 번쩍이는게... 조심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듯 했다.
"아무튼 기다려 봐, 여긴 중간계니까. 네 녀석을 천국으로 보내던지 지옥으로 보내던지 할 거라고."
아, 잠깐. 나 진짜 죽은거야? 천국, 지옥이면... 죽은거야?!
"...일치, 일치... 엥 뭐야? 너 서윤하가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나 서윤하 맞는데...가 아니지. 하긴 원래는 한재희였으니까. 그래 나 서윤하 아니다 어쩔래 임마, 살아있어야 될 사람인데 지옥이라도 보내려고? 그건 안 될걸.
"끙... 그렇군, 10년 전의 '그 사건'을 일으킨 '염원사'놈들의 자식이었군. 또 한번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난 녀석이 혼자 중얼거리는 동안 내 몸을 살펴봤다. 어째... 영혼만 남았겠거니 싶었는데도 윤하 몸에 기생해 있는 것 같았다. 옷은 또 웬 롱 원피스냐 이건. 질질질 끌리도록 긴데도 장식이 하나도 없어 밋밋하구만.
"하여간, 왜 자꾸 '그 분'께서 정한 운명을 거스르려 드는지..."
게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째 구름들이 눈마냥 폭폭 들어가긴 해도 밟고 서 있을 수가 있었다. 이거 참... 중간계 맞나보다 여기...
'하아... 한재희 이 놈... 괜히 뛰어들어가지고 큰일 날 뻔 했네. 내가 어떻게 이 결심을 했는데, 다 된 밥에 재 뿌릴 뻔 했잖아.'
어찌되었든 재희를 밀쳐낸 것 이후 녀석이 소리치던 것까지만 기억나다가 기억이 끊어졌고, 이런 이상한 공간에 이상한 놈이 있으니 녀석이 사신이라는 걸 믿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설마 이것도 꿈인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꿈일까도 생각해봤는데 이게 웬 걸, 볼을 꼬집으니 통증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어이 아가씨, 원래 이름이 뭐지?"
"에... 한재희 라고 하는데요."
사신 녀석은 이름을 듣고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뭔지 궁금해서 고개를 쭉 내밀자 녀석은 재빨리 장부를 덮어버리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저... 그런데 아까 말한 '염원사'라니요? 그게 뭐에요?"
녀석은 장부를 옷 속으로 쓱 넣더니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염원사'라는 분들 꽤나 사신들에게 미움받는 모양이다.
"'염원사'가 누구냐면 말이지.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신 유일신 '그 분'이 정해놓은 시간과 운명을 거스르는 고약한 놈들이야. 최근에는 그 수가 거의 없지만 한 100년 전만 해도 그 '염원사'들 때문에 우리 사신들의 장부가 아주 엉망이 되어버렸지! 10년 전 즈음에 그들이 떼거지로 이 중간계에 몰려오는 통에 사신들이 죗값을 치르게 하느라 또 고생했고 말이야."
아아. 염원사라는게, 아저씨 같이 그 뭐냐 '꿈꾸는 힘'으로 운명을 거역했던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보구나. 그렇다면 총수님도 죗값을 치르신 걸까?
"어쨌든 한재희? 귀찮으니 원래 몸 주인인 윤하라고 부르마."
사신은 갑자기 날 알 수 없는 힘으로 무릎꿇리더니 외쳤다.
"원래 운명을 거역하고 서로의 삶을 바꾼 이 죄의 장본인인 너의 아버지가 이 죄를 져야 하나... 지금 살아있는 자의 운명을 바꿀 순 없는 법이니! '그 분'이 정하신 법에 따라 네가 죗값을 치러야겠다!"
어... 어? 뭐라고? 잠깐, 이런 얘긴 난 못 들었다고?
"자, 네가 죄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수갑이다."
[펑]
사신이 손을 뻗자 내 양 손목에 회색의 돌 같은 두꺼운 수갑이 생겨났다. 어, 어? 이런 안 빠지잖아?
"그럼 판결을 내리지. '그 분'의 이름으로 운명을 거역한 네게 네 아비가 대신 이 죄를 짊어지러 올 때까지 무기한의 중간계 살이를 선고한다!!"
"에에엑?!"
잠깐, 지금 나 무기 징역 선고받은 건가? 아니 어째서,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거야아?!
"다시 말해 넌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이 중간계에서 영원히 네 아비를 기다리며 떠돌게 되겠지. 이해 되냐?"
"야, 뭐? 정말? 왜! 내가 왜 그래야되는데!"
다급해진 난 존대말이고 '요'자고 뭐고 다 버리고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한 짓도 아닌데 왜 내가?"
"왜긴, '그 분'께서 정한 법에 따른 판결이다."
"아... 뭐야 이게, 인정 못해 난!"
"뭘 어쩌겠어, 그게 니녀석 운명인가 보지."
아 완전 어이가 뺨을 떄리네. 아주머니! 분명 '그 날' 새벽 꿈에 나타나셨을 때 이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그리고 10년 전에 만났을 때도, 내가 종신형 당할거라는 말은 안하셨다구요!
"아무튼, 잘 있어라. 나는 또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야해서.... 엉?"
난 내 누손을 못쓰게 묶어놓고 도망가려는 사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 자식이 날 이 꼴로 여기에다 버려두고 가겠다는거야 지금?
"아 잠깐만! 난 그럼 뭐하라구 여기서! 손도 이렇게 묶어놔 놓고 말야!"
내가 묶인 팔을 보여주면서 화를 내자 녀석은 뜬금없이 내 양손을 잡더니 좌우로 쭉 뻗게 만들었다. 헉... 뭐야 이거?
"그 수갑 돌처럼 보이지만 구름이라고. 그렇게 늘어나니까 걱정 말어 무게도 전~혀 안나가니까. 그럼 간다 됐지?"
"아, 아아! 기다려봐!"
"왜 또!"
"아니... 근데 여기선 뭐 해? 밥은 어디서 먹고 화장실은 어딨고... 잠은 또 어디서 자!"
난 어떻게든 혼자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녀석의 옷자락을 절대 놓지 않았다. 사신은 한숨을 푹 쉬더니 조곤조곤 설명했다.
"자. 중간계에선 말야, 안 먹어도, 안 자도 살 수 있으니까 걱정마. 여긴 밤도 없고 너에게 해를 가할 만한 존재 자체가 없으니까! 자, 이제 진짜 간다? 응?"
그러나, 난 아무리 사신이 가려고 해도 그의 옷을 놓을 수 없었다. 난 다급하게 녀석의 발목을 붙잡았다. 제발 그냥 날 버리고 가지 말아주세요 사신님...
"아 정말, 나 가야한다니까?! 바쁘다고!"
"그... 그럼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돼?"
난 엄청나게 애절한 눈빛으로 사신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 놈 조금 반응이 오는가 싶더니만 바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는 제 갈길 가는 게 아닌가!
"어, 야 잠깐!"
"아 증말 따라오지 말라니까? 난 일 해야 하고 넌 죄인이고 벌을 받는 중이라고!"
"그래도... 나 외로운 건 진짜 싫단말야..."
그러면서 슬쩍 눈물을 흘려주었더니, 드디어 반응이 왔다! 진짜 나 버리고 가는 줄 알았잖아 이 나쁜 사신놈아!
"하아... 정말로. 알았어 내가 졌다 졌어, 맘대로 해라."
"정말?"
난 신나서 사신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생긴건 얼음같이 차게 생겼어도 그래도 온기는 느껴지는구나 사신도.
"야, 야! 달라붙지 마! 암튼 일하는데 방해하는 순간 바로 버려지는 줄 알어, 알았어?"
"응! 알았어, 고마워!"
입이 빼죽 나와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신을 쫓아가면서 내 얼굴엔 미소가 가득 번져갔다. 홀로 떨어지기 싫다는 내 억지로 인해, 운 나쁜 내 담당 사신은 졸지에 짐을 하나 달고 다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