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마치 가위로 필름을 자른 것 마냥 끊어진 꿈 때문에 약간 놀랐지만, 무슨 영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다른 꿈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꿈은 최근에 꾼 꿈과 너무나 같았다. 정말 가혹하리만큼 불길한 분위기도 너무나 같았다.
그래, 분명히 '그 날' 사고가 나는 그 꿈이다. 좀 전에 보고 들었던 윤하 어머니가 그녀의 '동포'들과 윤하를 위해 희생했던 '그 날'의 기억이 틀림없었다.
윤하가 아주머니 품에 안김과 동시에 가족이 타고 있던 차는 거칠게 충돌하며 공중을 날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윤하의 고통어린 비명소리가 울려퍼졌고, 차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윤하는 차 밖으로 튕겨져나갔다. 멀찌감치 풀밭에 떨어진 윤하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웬 걸. 시점이 윤하 쪽에서 보는 꿈이 아니었다
"엄마... 엄마!!"
이 기억은... 아저씨 기억인가?
"윤하야... 큭ㅡ 괜찮니?"
반대편에 떨어진 아저씨가 다리를 다친 듯 절뚝거리며 윤하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온 몸에 피가 묻어 엄청난 모습이었지만, 윤하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저씨는 쉴 틈도 없이 다시 빠른 속도로 차 쪽으로 이동해 갔다.
"큿... 여기 가만히 있으렴. 엄마... 엄말 구해올게."
타닥. 그가 차 쪽으로 걸어감과 동시에 엔진쪽에서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이다, 이제 곧 폭발하고 말 거야, 아주머니가... 안돼!
"아저씨!!! 가까이 가지 마세요!! 119가 곧 올거에요!!"
"어떻해, 불 날 것 같아... 폭발하는 거 아냐?"
그러나 아저씨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 문을 열어 아줌마를 조금씩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하셨다.
"여보. 살 수 있어. 아직 희망을 버리지 마!"
"아니...에요, 어서 윤하한-테, 가요... 어짜피 난 죽어요...!"
"안 돼, 그럴 순 없어!! 아무리 운명을 신이 결정한다지만... 당신의 희생으로 모두를 구한다 그래도 세상에 어떤 남편이 자기 부인이 죽어가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
어느새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점점 커지고 있었고, 간신히 아줌마를 차 밖으로 끌어낸 아저씨는 다리의 고통이 심한지 잠깐 주저앉고 말았다.
"쿨럭... 나... 가망이 없을 거에요. 어서... 가요. 여보, 가서 윤하를... 지켜줘요..."
그러나 아무리 아주머니가 말려도,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생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지 몰라도, 아저씨는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절대로... 절대로 당신을 혼자 두지 않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엇던 아내의 죽음이라지만, 어찌 그렇다고 해서 눈 앞에서 죽어가는 걸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며간, 당신은 너무 정이 많아서.. 탈...이라니깐..."
아주머니의 눈이 서서히 감기려 하고, 위쪽에선 앰뷸런스의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윤하의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피해요!!!! 아악!!"
[콰앙-!!!]
차가 폭발하며 강한 충격과 열이 두 사람을 밀쳐냈고, 넘어짐과 동시에 위쪽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렸다.
"허윽... 헉... 여... 여보... 큭...!"
"크윽-!! 안돼...!! 정신차려 여보!!"
아주머니는, 크게 피를 토해냈다. 복부와 두부의 출혈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부디... 윤하를 꼭... 살려줘요...? 꼭!"
아... 아아 아주머니...
"아아... 아아!! 유나야... 유나야!!!!"
구급대원들이 달려와 바쁜 손놀림으로 아주머니를 들것에 태웠고, 아저씨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나 없...어도. 행복... 해야되요..."
아아아..!
"꼭... 꼭... 약속 지킬게..."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이내 어둠에 잠겨버렸다.
눈을 번쩍 뜨니, 여전히 눈 앞이 흐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고 있는 이 눈물이 원인인게 분명했다.
그래 모든 게 생각났다, 내가 왜 이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놓여있는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지도...
"저런..."
흐릿한 시야에서 검은 옷을 걸친 한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새카만 옷에 새카만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그는 정말 죽음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가엾게도 네 엄마의 꿈을 꿨나보군."
아아... 그래, 이 사람과 같이 지낸 지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빡 잊고있었다. 이곳에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만 좀 울어. 며칠동안 쉬지않고 울었으면서 또 우냐."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젠장, 나와라... 나와라 목소리야!!
"후.. 어쨌든, 이젠 알았겠구나 가엾은 소녀야."
눈물을 멈춰보려고 애를 써도 쉽게 멈추지 않는 통에, 간신히 옹알이 수준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네가 왜 이런 기구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힘겹게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겨우겨우 눈물을 그치고 눈물을 닦아내고 나니 기력이 없었다. 입고 있던 순백의 롱원피스는 치맛자락이 눈물에 완전히 젖어 살짝 다리가 비쳐 보였다.
난 울음을 그치고 나서도 한참을 검은 옷 사람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꿈의 생생함과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왔기 때문이었으리라.
"혹시... 아저씨가 지금 내 몸 가까이에 와 계신 걸까?"
너무나도 아저씨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꿈을 꾸어서인지, 난 본능적으로 아저씨가 곁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쎄다. 난 이 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게다가 하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내가 알 수 있을리가 없지. '그 분'이라면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검은 옷을 걸친 사람이 내게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를 보는 내 시선은 어떠했을지... 아마 굉장히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계, 어째서 그가 내게 이런 생소한 단어를 썼냐구? 어찌보면 그가 쓰는 말은 전혀 틀린점이 없었다. 여긴 하계, 혹은 인간계라고 부르는 현세가 아니니까.
"몸이 무거워... 좀 일으켜 줘."
그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중죄인이면서 사신을 이렇게 부려먹는 건 니가 처음이다."
그러고는 새하얀 구름 위를 사뿐히 뛰어올라 내 앞에 탁 하고 착지했다. 그가 내민 손은 혈색이라곤 보이지 않는 백색이었지만, 잡았을 때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창백한 피부에 정반대로 완전 까만 로브와 목도리를 걸치고 있는, 내가 늘상 생각했던 이미지와 너무나도 틀린 사신의 모습.
"헤헤... 고마워."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하면 진짜 버리고 가 버린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새파란 하늘과 구름밖에 없는 묘한 곳.
"미안, 안 그럴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마치 내가 산 건지 죽은 건지 알 수가 없는 이상한 세계.
"아무튼 따라와! 너 때문에 벌써 세 명이나 몇 분 째 기다리고 있다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나 알아?"
"죄, 죄송!! 가, 같이가!!"
지금 나 서윤하는,
중간계에 갇혀 있습니다.
<11. 예고된 운명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