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10년 전의 우리 집 모습은 지금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르다면 내부 인테리어 정도였을까? 집 안으로 들어오니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감돌았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진아."
"태수야, 민아도?"
게다가.. 집 안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아닌 10년 전의 우리 아빠와 엄마. 아저씨가 부모님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걸 보니, 역시 엄청 친한 친구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쉿, 재희가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부엌으로 와."
"어... 여보 이미 알고 있었어? 태수가 있다는거..."
부엌으로 가며 아저씨는 놀란 표정으로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네. 윤하를 살리기 위해서... 아버님 뿐만 아니라 태수와 민아도, 지금 이 자리엔 없지만 이노우에 가문과 혼다 가문도 모두 도와주기로 했어요."
아저씨는 그 말을 듣고는 감동했는지,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 하고 눈에 눈물이 고여버리곤 재빨리 소매로 훔치셨다.
"왔구나 진아. 앉아라.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에 도착하니,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잿빛 머리카락의 중년 남성이 아저씨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풍채와 느낌을 보아하니... 아저씨의 아버지 되시는 분 같아 보였다.
"아버지...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 이 사람이 분명, 오에도 온천 여행때 들었던 서 진 아저씨의 아버지, '서 총수'님이라고 불렸던 바로 그 분이구나. 지금 이들이 말하는 알 수 없는 집단의 동포들을 구한...
"일단 유나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것...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지금 이 총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건지...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짓고 계셨다. 윤하 어머니의 희생을 슬퍼하고 계신걸까?
"하지만, 유나가 스스로 나선 건, 너도 알다시피 내 손녀딸 윤하와 너를 끔찍이도 사랑하기 때문이란 걸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아저씨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하지만... 우리에겐 힘이 없잖아요. '저주의 날'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은 우리에게 이제 '꿈꾸는 힘'따윈 남아있지 않잖아요. 아닌가요?"
총수님은 뭔가 말하려다가 아직 아저씨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더 기다려 주시려는지 아저씰 지켜보기만 하셨다.
"전 그래서 유나가 희생한다고 해도,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들 모두의 힘이 없어 절대로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윤하와 모두를 위해서라도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이내 아저씨의 말이 모두 끝나고, 총수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힘이 없다면 내가 어찌 이노우에, 혼다 가문과 더불어 유나와 함께 남은 동포들을 살려 낼 생각을 했겠느냐?"
"예? 그게 무슨..."
총수님은 그 말을 하시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네 딸아이 윤하의 운명은... 우리가 예측한 것이 아니란다. 엄연히 누군가의 '예지몽'에 의한 것이지."
"설마... 유나의 힘으로 알아낸 거라구요? 그럼 아직 우리 힘이 건재하다는 뜻인가요?"
"아니다. 유나는 아니고... 이노우에의 딸, 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이 소멸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직 우리의 힘은 아주 미세하게나마 존재하고 있지. 다만 그 힘이 너무 약해져서 모두들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저씨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놀랐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줌마 한 번, 그리고 우리 부모님 한 번, 총수님 한 번씩을 본 아저씨는 얼굴빛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 처럼 보였다.
"난 '저주의 날'에 내 아내를 잃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내 가족과 남은 동포들을 모두 지켜내겠다고 말이야. 그 길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 나의 필연적인 책임이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부탁이기 때문이었지..."
조금은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총수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저주의 날'부터 지금까지, 또 지금으로부터 윤하를 운명해서 구해 낼 10년 후 '그 날'까지는, '저주의 날' 몸소 자신을 희생해 가며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려준 그녀의 의지가 쭉 이어질 거다."
"어머니의... 의지..."
"이제 나는 곧 운명에 의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이노우에 씨와 혼다 씨와 함께 유나에게 내 마지막 '꿈꾸는 힘'을 모두 불어 넣었지. 그 뿐만이 아니다, 과거 '저주의 날'에 네 어머니의 희생을 위해 모든 동포들이 힘을 빌려주었던 것처럼, 남아있는 동포들이 유나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이제 유나는 곧 살아있는 '꿈꾸는 힘'의 수호 부적같은 존재가 되겠지."
난 이 말을 들음과 동시에 과거에 꾸었던 꿈의 내용이 떠올랐다. 분명,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가 함께 나왔던 그 꿈이 분명했다. '모든 동포들이 힘을 불어넣어 아줌마를 수호 부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 분명 꿈 속에서 윤하는 이노우에 가족과 혼다 가족이 지금 시간 이후에 아줌마에게 힘을 응축시키던 걸 목격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본능적으로 안좋은 일이 일어날 거란 걸 느끼고 차도로 뛰쳐나가 아줌마에게 달려간 것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도... '그 날'이 되기전에 운명의 대가를 치르셔야 합니까?"
"그래... 공교롭게도 '그 날'은 내 '운명의 날'보다 사흘이 지난 후로구나. 난... 구원받지 못하고 그 후를 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네가 살아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진아."
꿈에서 계속 봤던 것 처럼, 아저씨와 아줌마는 윤하에게 이 사실을 계속 숨겨왔으니, 윤하는 결국 아저씨가 아줌마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걸 거야.
"진아, 넌... 꽤 큰 책임을 지게 될 거다. 아마 내가 죽고나면 동포들은 네가 다음 총수가 되어주기를 바라겠지. 거의 무너져가는 조직이지만 그들은 그래도 너 같은 기둥이 서서 무너지지 않게 해 주길 바랄게다."
"..."
"그래, 가장 중요한 얘기를 깜빡하고 있었군. 우리 손녀딸, 윤하를 살릴 방법을 알려주마."
"네... 아버지."
윤하도 아줌마를 잃고 나서 힘들었겠지만, 아저씨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단, 정확히 10년 뒤 올해의 '그 날'과 같은 날에 또다시 운명의 마수가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윤하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고 할 거다. 그런 윤하를 살려내기 위해선 윤하를 정말 진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같은 나이의 남자아이가 한 명 필요하다. 그리고 혼자 될 너의 수 년간의 노력이 필요할 게다."
순간 아련한 기억이 엄청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려 10년도 더 되었고, 몸이 바뀌고 나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그나마 그래도 동포들 중 힘이 많이 존재하는 이노우에 가문과 혼다 가문에게 먼저 힘을 부여받아 오거라. 네 몸을 하급의 수호 부적으로 만드는 데는 거의 한 달 정도가 걸리겠지."
분명 아저씨는 윤하를 우리 집에 두 달 가까이 맡겨두셨었다. 아마도 그 두 달간은 방금 총수님이 말한 과정을 수행중이었을 것이다.
"그 뒤 윤하에게 돌아와, 윤하가 10년 뒤까지 사는 날인 5840일 분의 기원을... 해야 한다. 남은 시간이 10년이 채 안되니까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번 이상씩 꾸준히 노력해야만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기원을 모두 마치고 나면, 너의 염원으로 윤하를 사랑하는 동갑내기 남자아이와 서로 육체가 바뀌게 하거라. 운명의 마수가 완전히 속아넘어갈 수 있도록... 최소 '그 날'까지 반 년 이상의 시간을 남겨 둔 시점이어야만 한다."
"바꾼다구요?"
"그래. 마지막으로 '그 날'이 되기 약 한 달쯤 전에 너와 이노우에, 혼다 이 세 가문의 힘을 모두 영혼이 뒤바뀐 윤하의 육체로 불어 넣으면 그 뒤에 모든 것은 알아서 해결 될 것이다."
그리고 난, 아저씨와 만난 적이 있었다. 한재희일 때.
"하지만 그럼 그 남자아이가 대신 운명의 대가에 직면하게 될 텐데... 설마 그 아이가 태수와 민아의 아이인 재희를 말하는 건... 아니죠 아버지?"
10년도 더 된 일이었고, 몸도 바뀌었던 관계로 전혀 기억나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똑똑히 기억이 난다. 바로 그 때, 그 장소에서 내가 했던 말,
"맞아 진아. 우리 아들이... 재희가 그 남자아이야."
"무슨 말이야 한태수! 니 아들이라고, 엄청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야!!"
"괜찮아. 난 다 잘 될거라고 생각해. 물론 두렵지만... 괜찮을 거야."
그리고 굉장히 단호했던 우리 가족들의 태도 역시 기억이 난다.
"민아야... 아니야,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야 서진. 유나도... 저렇게 많은 이를 위해 스스로 나서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라고 안 그럴 수 있겠어. 게다가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딸아이를 위해서라는데 말야... 그리고, 우리 재희도-."
뚝.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꿈이 끊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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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11 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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