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학교를 갔다온 뒤 그날도 여지없이 병실을 지키던 나는 무심코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는데, 곤히 자던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철컥]
조용히 문이 열리고 몇 발자국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살짝 잠이 깬 나의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고이장히 떨리고 있었다.
"윤하야..."
왜였을까, 반년만에 듣는 목소리인데도, 단 하나뿐인 혈육인데도 듣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랐던 건. 사고 후에 기억이라도 안 돌아왔다면 화가 덜 났을 텐데... 돌아온 기억으로 인해서 난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렸다.
"도대체.. 어딜 갔다가-"
난 벌덕 일어나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어딜 갔다가 이제 와요 이 아저씨야!!"
한쪽 팔에 여전히 깁스를 하고 있었던 탓에 한 팔로만 밀었는데도, 아빠는 저항 하나 없이 그대로 벽에 부딪히였다. 그동안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이기도 몸이 가벼워진 건지. 화가 나면서도 안쓰러움에 눈물이 찔끔 났다.
"어떻게 1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어떻게 이렇게 손쉽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할 수 있어요!"
화가 나서 아빠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분노는 사그러들지가 않았고, 되려 슬픔이 분노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내가 가장 힘들 때엔 곁에 없었고... 지금은 재희가 삶과 죽음을 오락가락 하는데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찾아오지도 않는 게 말이 돼?!"
그러나 내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빠를 밀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그저 내 외침을 듣기만 하면서 묵묵히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왜요... 왜, 어째서 재희여야만 한 거에요. 왜... 왜!!"
슬픔이 되어버린 분노는 내 눈을 촉촉하게 적셨고, 사고와 함께 돌아와버린 모든 기억들은 내게 하나뿐인 혈육에게 역정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빠라면... 내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재희를 지켜 줬어야죠...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흘러가도 아빠가 나서서 이런 거 막을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모른 척 해외로 떠나버리고... 재희에게 가혹한 운명을 떠넘겨 버리고는... 이렇게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냐구요, 왜!!"
얼마나 역정을 냈는지 머리가 다 아팠다. 하도 심하게 화를 내서 그런지 혼이 빠진 것 같은 허전함과 함께 슬픔만이 남아버렸다.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조차 잃어버린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왜... 왜 어째서 내가 그냥 운명에 순응하게 두지 않은 거에요..."
주저앉은 채로, 난 고개를 떨구고 목놓아 울었다. 엄마를 잃고 나서 기댈 곳은 오로지 아빠 뿐이었는데, 그런 아빠마저 반 년 넘게 또다시 날 외톨이로 남겨둔 채 떠났었다는 야속한 감정만이 날 괴롭혔다. 반가움도 아니고, 안타까움도 아닌... 이상한 기분이 날 사로잡았다.
"어허어엉... 허어어엉..."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내 곁으로 아빠가 조용히 다가왔다. 그동안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을까? 그 동안 얼마나 마음졸였을 지 알지만, 쓴소리만 튀어나올 뿐 별다른 말을 못하겠어.
"윤하야, 아니. 이제는 재희구나."
아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약간은 떨리면서 경직된 목소리가 지금 얼마나 불안한 마음인지를 잘 알게 해 주었다.
"지금부터 네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몰랐던 사실들을 얘기해 줄 테니 들어주겠니?"
아빠는 조심스레 누워있는 윤하의 뺨을 한 번 쓰다듬더니 보호자용 의자에 차분히 한아 얘길 하기 시작했고, 그 목소릴 들으며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는지 눈물이 조금씩 그치기 시작했다.
"아빠가 10년 전 일본에 갔다 온 후 네게 해 줬던 말 기억하니?"
난 나즈막히 대답했다.
"내가 곧 죽게 될 거라고. 살기 위해선 재희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하지만 말야, 그 사실을 아빤 이미 더 이전에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재희가 도와줘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모두 다 너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한 사람이 내게 부탁했던 것이었거든."
날...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 말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운명적으로 죽게 될 널 꼭 구해내라고 끝까지 부탁한 것도 그 사람이었지. 난 그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어."
그 사람. 그 사람이 내가 이렇게 될 걸 알고 부탁한 것이었다고...? 윤하가 전철에 치어 내 대신 운명을 짊어지길 원한게...
"엄마...가요?"
* * * * *
"무슨 말이야 여보. 분명 어제 약속 했잖아, 그런 운명 받아들이지 않기로!!"
으... 익숙한 목소리. 되게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모두를 구하기 위해선 방법은 이것 뿐이에요. 난... 내가 죽더라도 우리 동포들을 살릴 거에요."
그리고 최근에 들었던 또다른 목소리. 아, 아저씨와 아줌마구나. 웬일로 내 꿈에 이렇게 사이좋게 나타나셨지?
"왜, 어째서 그래! 아니야, 물론 모두의 목숨이 더 소중하단 것은 나도 알지만 나도 있고... 무엇보다 당신 없인 못 사는 윤하는 어떻하라구!"
두 분 무슨 일로 싸우시는 건 진 몰라도 이러다가 윤하 깨갰는데요. 굉장히 심각한 얘기를 하고 계신거 같은데...
"여보. 이건 당신과 윤하를 위해서이기도 한 일이에요..."
"...!!"
왜인지 난 꿈의 내용보다도 곤히 자고 있는 윤하가 깰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 참... 이런 상황에서도 윤하 걱정이라니.
"아버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당신의 원래 운명을."
"내 원래 운명?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말씀을 내게 하신 적이 없는데..."
그러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뜬구름 잡던 난, 곧 지금 지나가는 대화들이 전부 윤하와 관계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당신은... 원래 9세 되는 날 사고로 죽을 운명이었지만, 아버지께서 '힘'을 사용하여 당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대요."
"...그게 정말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저주'로 인해 우리 동포들이 하나하나 거역한 운명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처럼 당신이 죽었어야 했을 그 날, 당신도 목숨을 잃게 될 거라구요!"
그러나, 아저씨와 아줌마가 하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운명? 힘? 저주? 얼마 전에도 이런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디서 들었더라...?
"그리고 원래 산 사람이 아니었던 당신과 저 사이에 태어난 윤하도, 마찬가지로 원래 없었어야 할 존재... 윤하의 생일이 아마 윤하가 운명을 거스른 대가를 치르는 날이 될 거에요."
원래 없었어야 했다고..? 윤하의 존재가 운명을 거슬러 탄생한 존재이고, 그 거스른 운명으로 인해 다시 존재하지 않도록 돌아가야 한다 이건가? 그래서 윤하가 수많은 생명의 위협을 겪게 되었던 거고?
"그럼... 당신의 희생으로 모든 동포들은 물론이고, 나와 윤하의 운명까지 바꾸어 놀 수 있다는거야...?"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잘 모르는 단어도 많았지만 대강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서 난 얼추 상황파악이 다 되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동포라던지, 저주라던지,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제 희생으로 동포들과 당신의 죽음, 즉 대가는 모두 대신할 수 있겠지만... 윤하의 경우는 좀 달라요. 내가 희생을 치러도 윤하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운명의 날을 10년 정도 늦출 수 있을 뿐일거에요."
"윤하는 그것만으론 부족하단 뜻이야? 거역한 운명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래요 여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무에서 유를, 생명을 하나 창조해 낸 것이나 마찬가지... 그 거역한 운명의 정도가 틀려요."
아저씨는 머리를 감싸쥐고 어찌해야 할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우리 윤하를 살릴 방법은 없는거야?"
"여보, 그래서 지금 말 하고 있잖아요."
아줌마는 아저씨를 진정시키고는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일단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거에요. 오로지 이 방법을 수행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당신 뿐이구요."
아줌마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저씨를 일으켜 집 밖으로 함께 걸어 나갔다. 어두워진 마당을 지나 대문 밖을 나서면서 보니, 굉장히 익숙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바로 왼쪽 집의 문 앞에 선 아저씨와 아줌마를 보며 난 경악하고 말았다. 두 분이 나왔던 집의 바로 옆 집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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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11 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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