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다행히 가희와 우주가 왔을 때는 난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은 뒤였다. 두 사람은 내가 저녁을 안 먹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당연하다는 듯 도시락을 사 왔다.
"참... 매번 안 사 와도 된다니까."
"됐어.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모여서 밥도 먹고 하겠냐."
내가 매번 도시락을 사오는 우주에게 그만 사오라고 하면, 녀석은 늘 이런저런 핑계나 이유들을 대며 꼭 나를 먹이곤 했다. 그 덕분에 배를 곯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우주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가희의 시선이 약간 껄끄럽게 느껴졌다. 가희는 아무 말 없이 나와 윤하를 지켜보기만 했지만, 계속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은 굉장히 불편했었다. 정말 이상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가 날 보고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분이라니.
분명 기억을 되찾은 뒤로부터 내가 가희에 대한 마인드가 변해 버린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게 눈에 띌만한 큰 영향은 주지 않았었던 것 같았는데 오늘 가희의 색다른 표정과 시선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특히 가희는 나에게 굉장히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 듯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으나 계속 우주가 옆에 있는 통에 그러지 못 한 것 같았다. 중간에 잠깐 우주가 자리를 비웠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오는 통에 우물쭈물 하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조급해 하는지 걱정될 따름이었다.
결국 몇 시간 뒤 가희는 포기한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학원에 가야한다며 자리를 뜨는 그녀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하면서도.. 두려웠다.
"야, 재희야."
가희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우주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하고 의아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는데 문득 우주가 계속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윤하 주변을 서성일 만한 이유가 떠올랐다. 너, 지금 나한테 가희에 대한 걸 묻고 싶은 거구나, 그래서... 가희 나갈 때 까지 기다렸던 거로구만?
"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가희랑... 사이 틀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
하아? 그거였냐? 난 웬지 허탈한 기분이 들면서도 알게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안그래도 오늘 하루종일 가희의 시선 때문에 불안했는데, 너까지 그걸 물어보냐.
"아냐, 별 일 없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요 몇 주간 난 가희와 거의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크게 다툰 적도 전혀 없었다. 내가 계속 병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거의 없어진 탓이었다.
"그래도... 요새 너무 가희한테 소흘한 거 아니야? 명색이 여자친구인데."
분명 일반적으로 걱정해주는 말인데, 왜 이렇게 이 말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걸까? 지금 이 상황에서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어째서 화가 나는거지? 난 아직 가희를 좋아하는 걸로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을텐데 역시 별다른 말 안 하는게 좋겠지...
"무슨 소리야, 그런 걱정 마. 나름대로 양쪽 다 노력 중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윤하 녀석 간호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구."
난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우주와 눈이 마주쳤다간 불안한 내 심리를 들킬까봐서 윤하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로, 차갑고 단호하게 우주에게 못박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 지 대충 예상이 되어서 차마 고개를 다시 돌릴 순 없었다. 우주가 윤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과 같았다면 분명 그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테니까.
"...여튼 알았다. 나 그럼 가볼게, 고생해."
우주는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 버렸다.
"하아..."
난 우주가 돌아가고 난 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었다. 밖에 나가 바람도 쐬 보고, 자판기의 음료수를 들이켜 보기도 하고, 세수도 해봤지만 이 찝찝한 기분을 어째서인지 지울 수가 없었다.
'난 어째서 우주에게 그런 부탁을 했던 걸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내 발목을 잡을 변수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잖아?'
그리고 기억을 되찾기 전 내가 저질렀던 일들이 자꾸 떠오르며 후회가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 후회 중에는 우주와 윤하와 관련된 것도 있었지만, 가희에 대한 것도 있었다.
'가희가...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후회를 안겨주는 역할이 되어버릴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그 날 밤은, 두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
사흘 뒤 10월 11일. 아침부터 나는 거의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로 윤하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금식의 원인을 굳이 따져보자면, 윤수가 주고 간 연극 동영상 때문이었다.
울적한 기분이 끊기질 않아서 결국 다 보지 못했던 연극 동영상을 틀게 된 나는 전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 번 넘게 계속 연극을 보았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가긴 한 건지... 창 밖을 다시 봤을 땐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그렇게 일요일을 멍하니 보내고 나니 월요일 아침인데도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고 멍 했다.
이 날도 가희는 나와 뭔가 이야기 하고싶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날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난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해 주려고 했으나, 어찌 된 운명의 장난인지 가희와 단 둘이 이야길 좀 해보려 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번번히 무산되어버렸다.
다행히도 하교 시간에는 말할 기회가 생겨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가 하고 싶어했던 얘기가 뭐였는지 듣고 나니까 괜히 시간 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재희야. 이런 말 이 상황에 하긴 좀 그럴수도 있는데."
가희의 말도 어찌보면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우주가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듯이, 가희가 나에게 이런 심란함 가득한 말을 하는 것도 절대 이상할 것 없는, 연인사이에 정말 자연스러운 대화일 뿐이었다.
"너, 너... 있잖아."
그런데도 그녀는 말하면서 약간 떨고 있었다. 어떤 감정이 그녀를 그리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난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줄 순 없었다.
"정말 날 사랑하는 거 맞지? 그렇지?"
그녀가 힘든 이유? 분명 한 가지였다.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윤하에게 느끼는 슬픔과 질투가 서로 대립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도 원래 좋아했던 윤하로부터 비슷한 느낌을 받아 지금의 재희인 내게로 움직인 사랑이 위태롭고 불안해서.
"그럼! 예전부터 내가 제일 아끼는 내 여자친구는 가희 뿐인 걸?"
모두 내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가희가 아파하는 것도 전부 나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으로 인해 자꾸만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정말이야? 하지만 요즘 보면 재희 네 여자친구는 내가 아니라 윤하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무서워..."
이런 등신, 머저리! 세상에 제일가는 바보같은 놈! 나 자신에게 아무리 욕하고 화를 내 봐도 사고 직후 되찾은 기억들은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였다. 내가 왜 가희에게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만을 갈구하면서 매달렸으며, 어째서 윤하에게는 그렇게 쌀쌀맞고 차갑게 대했는지 과거의 기억들이 모두 알려주고 있었다.
"가희야. 그래도 윤하는 지금 아버지도 해외에서 아직 못 돌아오셔서 혼자잖아. 나 말곤 이렇게 옆을 지켜줄 가족이 아무도 없는 걸?"
이렇게 말하면 나와 윤하가 사촌간이라고 알고 있는 가희는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지금 그녀를 설득시키고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기 위해선 이 길 뿐이다.
"질투나더라도... 당분간만은 참아 줘 가희야. 윤하는 많이 아프잖아, 우린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울먹일 것만 같은 그녀의 슬픈 표정 위로 내가 너무나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의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10년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재희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잊어버리고 만 너무나도 그리운 모습.
"알았어. 그런데, 있잖아... 나 볼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니?"
"뭐?"
그녀는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내가 되물어볼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후다닥 학원 안으로 도망쳐버렸다.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별거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이내 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가희 앞에선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돌아서고 나니 아쉬움과 함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무나 안타까웠고, 너무나 미안했다. 왜 하필이면 가희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여자와 너무나도 닮아 이렇게 서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인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엄마... 엄마... 너무... 보고 싶어요... 흐흐흑"
내가 가장,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한 여인. 10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와 너무나도 닮은 나의 친구 가희.
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희를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이 겹쳐보여서 가희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옷 소매와 카라 부분이 흥건해질 때 까지 울고 나서야 눈물이 멈추었고, 그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엄마 생각에, 한동안 집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지만, 내가 가장 증오하고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나와 윤하를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일 주일이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