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중간고사를 삼 일 앞둔 10월 1일. 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분명 살아날 것이라 믿었던 윤하의 앞으로에 대한 말이었는데... 충격이 어찌나 심했는지 그 날은 하루종일 입에 음식을 대지 못했다.
"아무래도... 혼수상태가 장기화 되는 걸 보니 환자분이 뇌사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뇌사...요? 식물인간 상태라는 말인가요?"
"말씀드리기 굉장히 죄송하지만, 이 뇌사상태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환자분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뇌사라니, 그렇게 엄청난 수술들을 이겨내고 이제 의식만 회복하면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거라고 했는데 하필이면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에 난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 나날이 그녀의 몸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지만, 그녀의 의식은 정말 어디로 홀연히 자취를 감춘 듯 날 만나러 오지 않았다.
"야, 한재희. 너 괜찮아?"
시험 첫 날, 쉬운 두 과목을 정말 빠르게 풀어제낀 뒤 바로 병원에 틀어박혀 윤하가 있는 중환자실 앞의 의자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데, 우주와 민혁이가 찾아왔다. 몇 번째 오는 건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서너번째 쯤 되는 것 같다.
"어? 어... 뭐, 괜찮아."
"그래도 임마... 몇 주 째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고, 너 진짜 살 많이 빠진 게 눈에 보여!"
물론 우주는 날 생각해서 이 말을 했겠으나, 난 그닥 달갑지만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몇 주 째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엄청나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 윤하를 기다리며 그 옆을 지키고 있지 않으면 내 자신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한 의식이 없는 윤하의 숨이 언제 멎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점점 커져만 갔다.
"저녁은, 먹었어?"
게다가, 웬지 윤하를 보며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민혁이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아직."
"이럴 줄 알았다니까. 기다려, 도시락 사 올테니까 같이 먹게."
그래도 우주는 그나마 정신적 충격이 덜 한듯 나를 챙겨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은 사람이 참 좋은 것 같다. 윤하가 힘들 때 같이 있어주고 여행도 다녀올 정도로 윤하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던 녀석이니까.
"자, 먹어. 남기면 죽어? 아주 그냥."
녀석은 장난도 섞어가며 식음을 거의 전폐할 뻔 한 내게 꾸역꾸역 밥을 챙겨먹였다. 다행히도, 오랜만에 먹는 따스한 밥은 정말로 맛있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떳을 때 난 보호자 대기실의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분명 책상 펴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 일어났어? 좀 자니까 개운하지?"
다행히도 병실 앞에 가 보니 내 빈 자리는 우주와 민혁이가 지키고 있었고, 앉아서 자고 있는 민혁이와 밤을 샌 듯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우주의 모습을 보니 입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짜식들... 너네 정말 재희의 단짝친구가 맞긴 맞구나.
*
그러나 우주가 이뻐보인 건 채 일 주일을 가지 못했다. 직접적인 원인을 따져보자면, 분명히 내 심경과 마음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고 직후 잃어버렸던 지난 10년간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가희와 윤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내 맘은 오롯이 윤하만을 위해 방향을 바꾸었고, 이런 내 마음이 원래 윤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우주와 충돌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우... 내 품에 안겨 발버둥치고 있어야 할 윤하가 저렇게 누워 있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
이 날 시험이 끝난 직후에는 사고 당일 찾아왔던 반 친구들도 함께 모여 병문안을 왔다. 중환자실에 한꺼번에 여러명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조를 나누어 매일 다른 팀이 일 주일간 방문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은주 너, 조심해. 그러다가 윤하 더 다치게 할라."
"묶어둘까 나연아? 은주가 러브 헤드락이라도 걸었다간 큰일난다구."
"우악! 안 그래! 너희들 날 너무 괴물로 보는 거 아냐?"
첫날엔 은주와, 다혜, 나연이와 윤수가 병문안을 왔는데 역시나 은주 트리오가 찾아오니 개인 병실이 시끌벅적해졌다. 나연이는 직접 만든 도시락과 과일들을 내게 가져다주며 먹고 기운 좀 내라며 등을 토닥였고, 다혜는 심심하거나 윤하 간호하면서 읽으라고 추천 소설들을 한 묶음 가져다주었다.
"이... 이런, 너희가 그렇게 많이 주면 내 선물이 너무 초라해지잖아..."
다혜와 나연이의 선물들이 워낙 통이 컷기도 했으나, 은주는 또 그게 걱정인지 조심스레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아... 이건
"자. 재희 너 운동 좋아하지? 윤하가 가끔 얘기했어. 딱히 기억나는 게 이것밖에 없기도 하고... 나도 거의 운동만 하니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녀가 건네준 건 아령이랑 악력기였다. 나 참, 이건 또 나름 괜찮은걸. 윤하 녀석 그런건 또 친구들에게 언제 말하고 다녔대.
"이야, 좋아. 마침 안 그래도 몇 주동안 운동을 안 하기도 했고..."
난 그녀가 준 아령을 들고 살살 움직여 봤다. 어유, 역시 내가 평소 쓰던 무게랑 같은데도 한동안 안 해서 힘들구만...
"자, 먹어. 이거 완전 햇과일밖에 없다구."
나연이가 깎아준 배와 사과를 먹으며 잠시나마 윤하에 대한 걱정을 덜고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거라 그런지, 나도모르게 기분이 들떠서는 참지 않아도 나오지 않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마 후 저녁시간이 되어 돌아갈 때가 다 되서야 밖으로 볼일 보러 갔던 윤수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PMP한 대가 들려 있었는데, 급하게 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병실로 들어왔다.
"어유,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미안... 오다가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다시 집에 다녀오느라고 늦었지 뭐야. 그래도 이걸 안 줄 수는 없잖아!"
윤수는 고이 모셔온 PMP를 내게 건네며 해맑게 웃었다. 은주와 다혜 나연이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따가 함 틀어봐, 동영상 한 개 있거든?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마음에 꼭 들거야. 오늘 우리가 주는 메인 선물이니까!"
"어... 그래? 뭔데?"
네 사람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이따 보면 알 거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인사를 하고는 병실을 나섰다. 윤수는 가면서 '힘내!'라는 말을 잊지 않았고, 난 PMP속의 동영상이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밤에 온다고 했던 우주와 가희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몇 시간짜리 동영상인지 확인해 본 나는 두 시간 남짓 남은 사이시간 동안 윤수가 주고간 동영상을 보기로 했다.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기대를 안고 시작한 동영상은 처음 1분간은 어둠 뿐이었다. 앞쪽에 사람 머리같은 것이 보였고,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살짝살짝 빛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이때까지 난 이게 무슨 영상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약 1분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어수선하던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자, 지금부터 영운고등학교 1학년 2반의 연극, '음모의 대저택'을 시작합니다!]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의 멘트와 동시에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동시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무대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난 일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펼쳐지는 연극 무대에 넋을 놓고 말았다.
'우리... 우리가 한 달 전에 했던 연극 무대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물이 다 있다니. 난 정말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고마워, 얘들아 진짜 너무너무너무 고맙다!
[거기 서랏 침입자!!]
[으아아앗~!!]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한 손은 PMP를 잡은 채 떨리고 있었고, 반대 손은 긴장된 나머지 입술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주가 나오고, 민혁이가 나오고, 윤수가 나왔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친구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야 이름을 대!!]
그리고 얼마 후 다혜가 나와서 우주를 총으로 위협하기 시작했고, 난 본능적으로 이 다음에 등장할 사람이 누군지를 알 수가 있었다.
[휘... 휘츠먼입니다. 뉴욕 타임즈의 기자에요!!]
아... 난,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닭똥같은 눈물이 입을 잡고 있던 오른손이 떨어졌고,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볼에서는 얇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헬라 그만둬!!]
윤하다. 윤하가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사뿐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기품이 넘쳤다. 분명 발목을 다쳐 엄청나게 아팠을 텐데도,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감정이 풍부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참을수가 없었던 나는 결국 PMP를 끄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난 몇 분동안 목놓아 운 뒤 부은 눈을 한 채 터벅터벅 병실로 돌아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