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11. 예고된 운명과,>
'그 날' 윤하의 행동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엄청나게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얼굴만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왜일까?' 라고 수십번 고민해 봤지만 요즘은 그녀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어졌다. 예전에 생각이 단순하고 알기 쉬웠던 때와는 다르게 요즘 그녀의 생각은 너무 복잡하다.
"근데 어디가는거야? 혹시 몰래 생일파티 이런거 해 주려고 그러는 거야?"
이크! 또 어떻게 알고! 이럴까봐 일부러 생일이 언젠지도 안 알려줬는데.
"어... 아, 그, 그게!"
난 이리저리 둘러대려다가 그만 엉거주춤하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윽 제길, 내가 이런 실수를.
"에~이 들켰지? 맞구나!"
아 정말 김빠지게! 눈치는 또 억수로 좋아졌어요! 내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끄응... 너 정말 요새 눈치 빨라졌다. 그래도 놀라는 척이라도 해 주지, 애들 김 빠진다구!"
그녀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차가운 역 안의 공기가 날 거슬리게 만들었다. 뭐지? 이 요상하게 떨리는 듯한 이 느낌은...? 게다가 윤하도 조금씩 떨고 있는 것이 내게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알았어~ 걱정마."
얼마 뒤 그녀는 키득거리며 한 바퀴 빙글 돌아 향기로운 샴푸 냄새를 풍겼다. 그런데 곧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오늘 계획을 위해 숨어있다가 나와 윤하가 지하철을 타고 간 뒤 다음 열차를 타고 오기로 한 우주와 가희가 반대편 승강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난 행여 윤하가 볼까봐 재빨리 그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는 두 사람에게 손짓 발짓 해 가며 당장 내려가라고 했다.
'아니 이녀석들이... 좀 내려가라니깐, 숨어서 지켜보려고 하네..'
불안하게 숨어있는 두 사람때문에 걱정이 좀 됬지만 언제까지고 윤하를 속이고 있을 수는 없어 다시 돌아보도록 말을 했다.
"됐어, 윤하야. 이쪽 봐도 돼 이제!"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도 두 사람이 걱정되어 시선은 여전히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을 보던 가희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나 이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지금 도봉산, 도봉산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ㅡ]
난 섬뜩한 기분이 들어 바로 옆을 보았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윤하를 찾기 시작했다. 어..? 지금 떨어지는 거 설마 윤하야?
위태로운 그녀를 보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내가 그녀를 구하지 않으면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안돼, 윤하야!!"
[빠앙!! 빠앙!!]
제발, 닿아라 내 팔아!!
"크윽!! 안된다고!!"
그러나 내가 기적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조그맣게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몸을 비틀어 날 반대편 승강장 선로 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안돼... 안돼, 안돼는데...!!'
내 표정? 그 때 내 표정은 정말 세상 모든것을 다 잃어버린 듯한 표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꺄악!!"
"윤하야!!"
[우당탕!]
거칠게 선로와 부딪히며 두 바퀴 넘게 굴렀다.
[퍼억!!]
그리고 내가 간신히 고갤 들어 뒤쪽을 봤을 때엔, 이미 윤하는 피투성이가 되어 같은 쪽 선로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젠장...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젠장!!"
부러진 것 같은 팔을 반대쪽 손으로 고정시킨 뒤 양 다리로 터벅터벅 그녀를 향해 걸었다. 팔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통증이 몰려왔고, 다리도 심한 부상은 아니지만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젠장! 이깟 고통따위!
"여기 애가 전철에 치었어요!! 빨리 119좀 불러요!! 구급차도 좀 불러요!!"
반대편 승강장의 사람들이 놀라 우르르 선로쪽으로 몰려와 있었고 다들 윤하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겁에 질렸다. 난 겨우겨우 그녀의 옆에 다가서서 소리쳤다.
"윤하야... 윤하야. 눈 떠!! 안돼!! 제발 눈 좀 떠 윤하야!!"
그녀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머리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관절이 충격으로 인해 뒤틀린 팔도 보였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미칠듯한 소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떻해야 하지? 어떻해야 그녀를 살릴 수 있는거야? 난... 난 도대체 뭘 해야...
"학생!! 나와봐요 이리!! 이 아가씨 빨리 들것으로 옮겨!!"
"제발... 크흑!! 윤하야!!!"
울부짖는 날 발견한 구급대원들이 달려와 윤하를 들것에 싣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팔이 부러지고 여기저기 피멍이 들어있는 채로 윤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날 보고는 괜찮냐며 물어보기 시작했다.
"네, 네 괜찮아요... 제발 우리 윤하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윤하를 먼저 보내고 나니 아픈 줄도 몰랐던 팔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통증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이런... 팔이 부러졌나본데. 이 학생도 데려갑시다!!"
결국 구급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난 윤하가 탄 구급차로 함께 병원으로 실려갔다. 같이 병언으로 가는 도중에도 난 윤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그녀의 심장박동이 행여나 멈출까봐서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자꾸만 그녀와의 옛 일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고, 내가 그간 잊고 있었던 모든 사실을 전부 깨닫고 난 뒤에는 내가 도대체 지금껏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건지 엄청난 자괴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왜? 왜 이제서야 내게 이런 쓰디쓴 기억들을 돌려주는거야 어째서?! 내가 이걸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일 안 일어났을 거 아냐!! 내가 미리 알았다면 절대 그녀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거 아냐... 오늘 어떻게든 그녀를 구했을 거 아냐...
[쾅!!]
멀쩡한 팔로 구급차의 벽을 힘껏 치자 손이 또다시 고통을 호소해왔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구급대원들이 놀라 나를 바라봤고, 내려친 손이 아프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도, 부러진 팔의 고통보다도... 내 마음의 고통이 훨씬 컸다.
*
그 뒤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잘 기억도 안 난다.
누가 병실에 들렀다 갔는지, 내가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자 다 됬습니다. 이따가 점심 먹고 약 꼭 드셔야해요?"
"네...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타박상 치료를 받고, 이틀 전에는 부러진 팔의 수술과 함께 깁스를 했다. 한 팔을 거의 완전히 못 쓰게 된 상태에 여기저기 감은 붕대가 나의부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윤하로 인해 그 부상은 전혀 돋보이지 못했다.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윤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쉽게 적응이 되질 않았다. 처음 사고 직전 봤던 그 때 모습보다야 낫지만,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인공호흡기에 숨을 의지한 채 미이라 같은 모습을 한 그녀도 절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붕대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가 말해주듯, 지난 1주일은 그녀에게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숨막히는 시간이었다.
"재희야?"
"아 엄마. 아빠도 왔네..."
매일 수술실에 들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윤하가 제발 하루라도 더, 하루를 더 버티게 해 달라고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기도해고, 내가 치료받는 시간이 아니면 밥먹는 시간도,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그녀의 옆을 지켰다.
"어제 잠은 잔거니? 팔 부러진 거 나으려면 니 몸도 생각해야 한다니까..."
"잤어~ 걱정마. 언능 나아서 윤하 간호해야 하니까..."
정말 일주일간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많은 수술을 받고 있는 윤하의 생사는 수술에 들어가는 의사 선생님도 장담하지 못했기에, 행여나 그녀가 숨을 거둘까 너무나도 두려웠다. 다행히도 매 수술마다, 매 고비마다 그녀는 모두 이겨내고 살아나주었고, 매일 매일 조금씩이나마 상태가 호전되어나가는 윤하를 보며 담당 의사선생님은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녀가 너무나도 기특해 보였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난 고작 부러진 팔 하나로도 힘에 부친데... 저 엄청난 고통들을 떠안고 누워있는 그녀는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놀라운 기적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기적같이 삶의 끈을 이어가던 그녀가 곧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날 것이라는 나의 실낱같은 희망이 헛된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14.07.11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