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다음 날 오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닥쳐온 또다른 위기상황으로 인해 난 긴장하게 되었고,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에도 하루에 한 번 씩은 꼭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매일 난 누군가에 의해 구출되곤 했고, 21일이 되어서는 결국 난 밖에 나갈 생각도 못 하게 됐다.
놀러갔다가 오는 날, 모두와 헤어지고 나서 민혁이와는 따로 대화를 했다.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난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했고, 민혁이는 알았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난 계속해서 닥쳐오는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고, 내 머릿속을 잠식하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했다. 놀러갔던 날 나를 굳어지게 했고, 공포에 몸서리치도록 만들었던 바로 그 생각 때문이었다. 어찌나 매일 매일의 공포가 심했는지, 내 몸 하나 간수하느라 다른 모든것엔 신경쓸 수가 없었다.
[쨍그랑-!]
"꺄악!"
"윤하야!"
물론 집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집에 있을 때도 시도때도 없이 날 위협해오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했다. 유리병이나 접시,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물건들은 감히 만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치 침대 위에 이불 뒤집어쓰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이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나의 공포심은 극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발목, 그리고 저번 펜션에서의 손목이 끝이었지만. 잘게 베이는 등 하루도 피를 안 보는 날은 없었다.
"휴, 괜찮아? 다행히 다친 덴 없네."
오늘도 역시 냉장고의 과일을 먹으려고 접시를 꺼내다가 손이 미끄러지면서 그것을 깨트리고야 말았다. 그저께는 과일 썰다가 손가락을 좀 베이기도 한 터라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윤하야... 그냥 안에 있어 내가 가져다 줄게."
"응... 미안해. 재희야."
재희도 분명 눈치는 채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이상하리만큼 위험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인지 녀석은 요 며칠간 내 근처를 떠나지 않고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내가 다칠까봐서 너무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와 침대 속으로 들어간 나는 다시금 요 며칠간을 되뇌여 보았다. 놀러갔다 돌아오는 날, 민혁이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 옆 아파트에서 화분이 떨어지는 걸 재희가 잡아 준 덕분에 살았고, 그 다음날인 14일은 슈퍼 갔다가 높이 쌓여있던 통조림이 무너졌는데 아저씨가 밀어준 덕분에 피했으며, 15일엔 택시잡으려고 인도 쪽에 서 있다가 택시가 빗길에 살짝 미끄러지면서 치일 뻔 한 걸 어떤 꼬마가 미리 말해준 덕분에 피할 수 있었다. 16일은 음식집에서 뜨거운 국물을 서빙하던 직원이 실수로 쏟아 데일 뻔 했으나 옆자리의 아가씨와 먼저 부딪히는 통에 비켜갔고...
"... 어라?"
그런데 그 동안 두려움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이, 재희가 마련해준 잠시간의 여유로 인해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 여기 있어 윤하야."
"재희야, 그... 아무래도 아저씨를 본 것 같아."
특히 저번에 재희가 했던 말 때문인지, 평소라면 아저씨였는지 절대 눈치도 못 챘을 트릭을 가뿐히 풀어내 버린 것 같았다.
"뭐? 진짜? 역시 저번에 내가 생각한 대로였어-!"
게다가... 재희는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아저씨 말고도 내가 아는 두 사람이 이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다들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특수분장이라도 했는지 얼굴로는 도처히 확신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와 행동거지는 분명히 아저씨와 그 두 사람이었다.
'택시 사건은 소이치로, 음식점에서는 레이 언니야...'
재희는 지금이라도 그걸 알아낸 게 다행이라며 언제 봤냐고 집요하게 물어봐왔다. 아마 알려줘도 당장에 찾아가서 따질 수도 없겠지만 기세는 대단했다. 물론 나는 싱긋 웃으며 재희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했고, 그걸 듣더니 재희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아저씰 찾지는 못했다. 아무리 재희라도 그걸 단번에 알아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 아니겠어? 게다가 나간 지 30분만에 내가 걱정되서 돌아온 재희의 표정을 보니 심각해지기는 커녕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웃을 수 없는 나였다. 왜냐구? 이 두 사람이 한국으로 아저씨를 따라 왔다는 것은 실로 '그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 밖이 굉장히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난 다음날인 22일에 집 밖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몰랐는데 그 날 아침 재희가 '오늘 원래 내 생일이야!'하고 말해준 덕분에 알게 됐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내 자신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심 불안감만이 가득하단 걸 숨기려 오히려 더 들뜬 척 했고 즐거운 척 했다.
불안감은 그리고 단지 밖으로 나와서 심한 것은 아니었다.
"여튼 내가 에스코트 해 줄테니까 걱정 말라고! 일단 애들 만나고 실내로 들어가면 안전할 거야."
왜 그렇게 평소보다 더욱, 엄청나게 심한 불안감에 떨고 있었던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늘 새벽에 꾸었던 꿈 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근데 어디가는거야? 혹시 몰래 생일파티 이런거 해 주려고 그러는 거야?"
"어... 아, 그, 그게!"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그 꿈으로 인해 내 마음이 엄청나게 떨고 있었고,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되려 나는 자꾸만 의연해지려 했고 담담해졌다. 나의 속 마음을 들키지 않고 오늘 꿈 속에서 알게 된 진실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숨기고 두꺼운 가면으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해야만 했다.
"에~이 들켰지? 맞구나!"
"끄응... 너 정말 요새 눈치 빨라졌다. 그래도 놀라는 척이라도 해 줘야 된다 이따가? 애들 김 빠진다구!"
그렇게 최대한 밝은 모습을 유지하며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도착한 지하철 역 내부의 공기는 이상하리만큼 싸늘했다. 가을 날씨에, 그것도 지하철 승강장인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느껴지는 한기로 인해 내 몸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알았어~ 걱정마."
그리고 역에 서있는 사람들의 기척에, 꿈의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날 긴장하게 만들었다.
'어라? 왜 쟤들 저쪽으로 올라오지.'
내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샀는지, 건너편 승강장으로 올라온 우주의 손에는 커다락 케익이 들려 있었고, 가희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재희는 두 사람이 잘못 올라왔음을 알려준답시고 허둥지둥 손을 흔들어 댔다. 아마 케익과 선물을 숨기라는 제스쳐를 했을 게 뻔했지만, 난 최대한 모르는 척 뒤로 돌아섰다.
"됐어, 윤하야. 이쪽 봐도 돼 이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만취한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온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한번, 두번, 세번. 내 심장이 강하게 내 몸을 흔들어댔다. 하필 그 순간 재희는 반대편의 우주와 가희를 살피느라 내게서 시선에 떨어져 있었다.
[지금 도봉산, 도봉산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ㅡ]
힘겹게 손으로 승강장 가장자리의 난간을 붙잡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손목부상으로 인한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해, 난 그대로 난간을 놓쳐버렸고 내 몸은 서서히 선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간이 갑자기 엄청나게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기울어진 내 몸을 지탱해야 할 발목은 고통을 호소하며 그대로 날 선로 쪽으로 밀어버렸고, 반대편 플랫폼에서 가희와 우주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리며 경악하고 있는 모습이 내 몸이 거희 승강장과 평행을 이룸과 동시에 보이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안-돼, 윤-하-야-아!"
재희가 놀라 달려오는 모습이 점점 각도가 변하며 느리게 흘러갔고,
[빠-앙!! 빠-앙!!]
굉장하게 속도를 늦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 향해 전철이 그 큰 몸체를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돌진하고 있었다.
"크윽-!! 안-된-다-고!!"
잠시 후 기적적으로 날 구하기 위해 뛰어든 재희가 날 붙잡으려 했으나, 어젯 밤 꿈이 떠오른 나는 이를 악물고 부상당하지 않은 팔로 날 잡지 못하도록 녀석을 흘려보냈다. 내 손을 놓친 재희는 열차가 없는 반대편 선로 쪽으로 그대로 날려졌고, 내 손을 놓친 채 떨어지는 재희의 표정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슬픈 표정이었다.
"꺄-악!!"
"윤-하-야!!"
우주와 가희의 비명소리가 역 안에 울려퍼졌고, 느리게 다가오던 열차는 내 손 끝에 닿는 순간 원래의 속도로 돌변해 거칠게 나를 들이받았다. 열차에 부딪히며 온 몸의 신경이 울부짖는 것이 느껴졌고, 꽤나 긴 시간을 날아 반대쪽 선로에 떨어진 후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처참하게 뒤틀린 팔은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흐려져가는 시야는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이 흐려져가는 와중에도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날 부르는 재희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급차 좀- 불러-!!"
"윤하야... 윤하야. 눈 떠!! 안돼!! 제발 눈 좀 떠 윤하야!!"
"-생!! -요-리! 아가- -으로 -겨!!"
"제발... 크흑!! 윤하야!!!"
재희야... 울지 마. 울면 안 된다구 다 널 위한 건데.
꿈에서 본 아주머니 말대로라면... 아저씨가 일본으로 떠날 때 문자를 보냈던 것처럼, 우린 행복해 질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 울지 마.
'점점... 의식이 흐려져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난 죽지 않을 거야.
'그 날'엔 아무도 죽지 않아.
안 죽어 한재희, 절대로...
절대.
<10. 중세 유럽에 소녀는 지고>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