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녀석이 이끄는대로 순순히 발코니로 향한 나는 충격에 감히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민혁이가 내가 나인걸 알고 있었던 거지? 차가운 밤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떨리는 건 추워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동안 지나갔던 이야기들을 되짚어보고 혹시 실수한 거 없나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이 녀석에게 진실을 들킬 정도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난 그래서 일단 잡아 떼 보기로 했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래 실수하지 않도록...
"무슨 근거로 날 한재희라고 하는거야 너?"
민혁이는 내가 반격해 올 것이라는 것도 대강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축제 준비할 때. 너가 그때 네 옛날 버릇을 보인 거. "
'아 쫌 모자른디' 때문에 벌어졌던 해프닝을 이야기하는 민혁이는 진짜 속을 뻔 했다는 표정이었다. 젠장, 역시 그 때 실수한 거로 인해 의심이 커진게 맞나보다.
"무슨 버릇? 단순히 그런걸로 어떻게 단정해. 설사 내가 재희랑 진짜 바뀌었다고 해도 넌 어떻게 증명하려고?"
증명할 방법따위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증명할거야? 나랑 재희가 몸이 바뀌었다고 한 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건 불가능한데. 그리고 니가 아무리 날 몰아붙여도 난 끝까지 부정하면 그만이라고.
다른사람에게 이야기? 나랑 재희 조차도 그건 감시 생각하지도 못했다. 다른사람한테 말했다가 정신병원에 처박힐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
"증명? 물론 난 증명할 방법이 없지. 하지만 이 모든 정황상 증거는 충분해."
이놈 역시 스스로도 인정했다.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민혁이는 나와 재희가 서로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단 들어보기나 해. 듣고 나서 결정해, 인정할지 안할지."
약하게 나가면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난 무조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내 앞의 취한 녀석을 상대해야만 했다.
"처음엔 몰랐어. 그냥 너 성격이 밝아진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 비록 며칠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재희는 재희가 아닌것 같고, 왠지 너랑 있을때마다 알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났지."
언제든 반박하려고 긴장한 상태로 녀석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데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리해 낸 사실들을 바쁘게 쏟아내는 민혁이는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너에게 마음을 말하려던 그 날 엄청난 걸 알아채버리고 말았지. 아마 우주는 모르겠지만 난 너가 발목 다친 걸 안 순간 눈치챘어. 아무리 아닐 거라고 생각해 봐도 넌 분명 재희와 너무 성격부터 습관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고."
"잠깐, 잠깐! 너 자꾸 다가오지 마. 거기 서서 얘기해!"
하지만 녀석이 접근할 수록 내 몸이 경기를 일으키려고 했으므로 난 최대한 녀석의 접근을 저지시켰다. 이자식이 할 말 있으면 차라리 멀쩡할 때 하지 왜 술먹고 이러냐고 진짜.
"옛날부터 넌 버릇처럼 다같이 함께하는 일에선 무조건 괜찮은 척 했잖아. 기억 안 나? 중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 고열사건, 2학년 때 기말고사 장염사건, 3학년 때 가출사건!"
그는 내 제지에 결국 멈춰 섰지만 말은 멈추지 않았다. 과거 내가 이번 발목 사건과 비슷한 사건들을 만들어 냈을 때의 이야기를 마구 해주는 녀석을 보니 어찌나 확신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일일히 반응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많이도 기억하고 있네! 이 녀석은 그 세 건 이후에도 내가 혼자 짊어지려 했던 짐들이 결국 들통났던 일들을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미처 기억 못하는 것까지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녀석 덕분에, 난 약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몇 년 동안 내가 녀석에게 내 성격을 크게 각인시킨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뭐 더 말해줘야 해? 이렇게나 오래 지켜봐왔는데... 연극 망칠까 봐 발목다친 걸 내내 숨기고 있었던 걸 보면 당연히 너란 생각밖에 더 들어?"
미안, 하지만 나도 순순히 인정할 순 없어.
"그랬어? 미안,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끝까지 잡아떼던 나를 향해, 녀석은 필사적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내가 취한 상태인 걸 알고 던졌는지, 아니면 내가 무심결에 당연히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던진 것인지 몰라도, 그 한 마디로 인해 난 더이상 발뺌할 수 없게 되었다.
"재우민준!!!"
"화이-"
-팅. 아뿔싸...!
"거봐, 재희 맞잖아."
"..."
녀석이 손등을 보인 채로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한 말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버린 난, 그가 파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말빨로 날 몰아붙인 뒤에 과거 베스트 프렌드 네명이 뭔가 일을 꾸밀 때면 항상 외치던 구호를 내게 던져 줄 줄이야.
"이젠 발뺌 못하겠지? 한재희. 거봐 너 맞다니까?"
더이상 발뺌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했는데, 젠장 술! 취한 탓에 이성적으로 사고를 못하니까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그래. 그런데 어쩔거야 너 다른 사람한테 말은 절대 못할걸?! 당장 정신병원에 잡혀갈 거라고!"
"시꺼, 내 얘기 안 끝났어. 어짜피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어쨌든 '모자른디' 이후로 그냥 '날 설레게 하는 여자애구나'라고 이성으로 판단해버리고 나니까, 너 엄청 내 스타일이었다?"
민혁이는 내가 몸이 바뀌었다는걸 확정해놓고는 뜬금없이 자신의 감정 얘길 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 자식도 취한 거 맞는데 결국 내가 기싸움에서 밀리고 만 게 분명하다.
"볼 때마다 설레게 하고, 말할 때마다 향수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의 그녀. 진짜 못참겠더라구. 어떻게든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
잠깐. 생각해보니 너가 그럼 나인걸 눈치 챈 건 나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라는 거잖아. 야 나 한재희야! 너 그런데도 설마 그 마음 못 접겠다는 거 아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 바로 앞서 말한 너의 존재를 알아챈거야. 하지만 이거 진짜 미쳐버리겠드라? 나... 너가 재희라는 걸 알아버렸는데도-"
제발 아니라고 해 달라고 신께 순간 몇 번을 기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길 바라는 나의 마음은, 민혁이의 본심을 듣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시선을 회피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계속 내 마음이 멈추질 않아. 지금도 널 내 품에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머리는 내 소꿉 친구니까 멈추라 하고 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어떻게 해야돼, 무슨 수로 녀석의 마음을 돌려야 하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민혁이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게- 윽!
[덥석!]
그러나 내가 미처 대안을 찾기도 전에 민혁이의 본능이 날 덮쳐왔다. 거칠게 내 손목을 붙잡은 민혁이는 그대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덮쳐오는 두려움에 민혁이에게 부탁하듯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취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닌 민혁이의 힘을 내 힘으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야 안돼 그손... 놔! 크흣! 몸이 또 말을...!
"재희야, 어찌되었든 지금은 여자 맞지? 그럼... 나랑 사귀어주면 안 될까?"
알고 있다. 이 녀석이 이 정도로 애원할 정도면 절대 거짓말이 아닌 본심이라는 것을. 평소 여자를 대할 때 본심을 드러내는 적 없는 민혁이가, 그것도 원래 친구였던 내 앞에서 이렇게 애처로운 모습으로 애원하고 있다니. 진짜, 이건 정말 고문이다. 왜 몇 년은 함께했던 친구가 내게 고백해야 하는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와 버렸단 말인가.
"민혁아 있잖아~? 너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말야... 난!! 난 있잖아...?!"
뒷걸음질 치던 난 결국 난간에 막혀 멈추고 말았다. 더 이상 도망칠 구멍도 없는 최악의 상황. 안돼 그만 다가와, 나 이 이상 다가오면 몸이 더이상 버티질 못할거야. 그만해...!!
"대답해줘."
난간에 힘겹게 몸을 지탱한 채 머리로 몰려드는 엄청난 공포감과 동시에 몸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놔... 제발...!"
[와지끈]
바로 그 때, 흔들거리던 펜션의 난간이 2명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부서지고야 말았다. 잠깐 여기 2층인데 이대로라면...!
"꺄악-!!"
[타악!]
한 바퀴 돌아 잠시간의 무중력 체험을 한 나는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준 덕분에 간신히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아래를 볼 수 있었다. 2층인데도 꽤나 높은 높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민혁이가 나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떨리고 있는 몸 때문에 난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안그랬다간 미쳐버릴 지경이었으니까.
"윤하야 괜찮아?!"
"선생님..."
내 손을 붙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담임선생님이셨다. 내가 떨어지는 걸 우연히 보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서 손을 뻗으셨던 것이었다. 전만다행으로 민혁이까지 같이 떨어지진 않았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낑낑거리며 선생님을 도와 날 끌어올린 민혁이는 선생님에게 연신 감사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선생님은 부러진 나무 난간에 베여 피가 좀 흐르고있었고, 날 살려준 내 팔목도 멀쩡하진 못했다. 움직일 때마다 틱틱 소리가 나는 것이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자신 때문에 내가 위험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더이상 내게 말을 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간신히 몸과 정신을 추스린 난 도망칠 수 있는 기회다 싶어 민혁이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바로 안 방 쪽으로 배게를 들고 들어갔다.
"미안... 나 먼저 자 볼게. 술기운이 올라와서.."
물론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쉽게 안정되지 않는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빈 자리에 누운 난, 아침에 샤워하며 떠올랐던 생각이 스멀스멀 날 덮쳐옴을 느꼈다.
내가 아침에 생각했던 것. 끝끝내 아닐거라고 부정했던 의구심.
「설마 이 발목도 불길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거라면... 위험한 건...」
그리고, 그것에 이어 지금 떠오르는 생각.
'방금 난간에서 떨어질 뻔 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답은 나와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이것이 내가 알게 되는 미래가 아니길 바라면서 자꾸만 부정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윤하야!!"
게다가 황급히 날 보려고 달려온 재희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 불안감은 자꾸만 증폭되어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약간 취한데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애달픈 재희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서글퍼짐과 동시에 의연해졌다.
재희가 내 옆에 앉아 내 볼을 꼬집어보고 이마에 손을 대 보고 몸을 잡고 흔들어 깨우려고도 했지만 난 최대한 자는 척 하며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 녀석의 얼굴을 봤다가는 바로 눈물이 터져나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난 이 날처럼 조금이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기회를 거의 잃고 말았다. 왜였냐구? 그건 지금부터 모두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