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왜 그래, 무슨 꿈을 꾼거야? 응?"
꼭 껴안은 재희의 품에서 간신히 울음을 그친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안정시키지 못한 채 꺼윽꺼윽 거리며 힘들게 말을 꺼냈다.
"아줌마가... 헉... 돌아가시는... 흑, 꿈을-허윽... 꿨어..."
그 말을 듣자마자 재희의 얼굴색이 변했다. 단순 걱정이던 표정은 꽤나 심각해져 있었고, 뭔가가 생각난 듯 어딘가에 급하게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결음만이 반복해서 들릴 뿐 전화를 거는 대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쳇, 안받잖아."
누구한테 걸었냐고 물어보니 재희는 아저씨에게 했다고 대답했다. 무슨 이유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건 것인진 모르겠으나 그 나름대로 촉이 왔던 모양이었다. 혹시 재희가 내가 계속 꿈을 꿔온 걸 눈치챈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듯, 그는 확실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막연히 아저씨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 잠깐."
10번째 연결음만 듣고 있던 재희는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다시 걸기 시작했다. 잠옷 소매로 눈물을 다 닦아내고 조심스레 그를 지켜보던 나는 갑작스런 재희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아빤 지금 한국에 와 있구나...!"
"...그게 정말이야?"
재희는 전화를 끊더니 침대 위에 툭 던져놓고는 내게 말했다.
"아빠가 전화를 자동로밍해놔서 예전에도 계속 전화해 봤지, 그 때 공항에서 헤어진 이후로도. 분명 그때는 로밍 소리가 났어 연결음 전에."
"지금은 안 난다는 거야?"
"어. 즉 한국에 있다는거지... 분명 우리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겠지."
아저씨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울음을 그친 지 얼마 안 되어 빨개진 눈으로 재희를 올려다보던 나는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재희는 한잠동안 내게 괜찮냐며 물어보고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주물러주더니 안심이 되고 나서야 날 풀어줬다.
'아저씨가 왔다는건... 그때 오에도 온천에서 했던 말이 곧 현실화된다는 이야기인가?'
분명히 아저씨는 말했었다. 앞으로 '그 날'이라고 부르는 때가 다가올 것이며, 그 날이 다가오면 어떤 알 수 없는 작전을 통해 '참사'를 막아야 하고, 재희의 어떤 알 수 없는 힘과 나의 존재가 그 작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작전은 10년 전부터 계속 준비되어 왔던 것이며, 어째서인지 재희는 이것에 대해서는 일체 기억하지 못했다.
'분명 나도 몸이 뒤바뀐 이후에는 과거 기억이 다 나질 않았었어... 그렇다면 재희 역시 과거 윤하였을 때의 기억이 거의 사라졌다는 얘길까?'
침대에 앉아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재희가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행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들은 난 문득 오늘이 여행 출발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다행히 아직 8시 경이었고, 재희가 전화로 조금 늦을것같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듯 했다.
일단 잡아둔 여행계획을 깰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걸 봤는지 문이 닫히고 나서 재희가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이유야 어쨌든 재희의 배려에 감사하며, 난 샤워중에도 계속 아저씨에 대해 생각했다.
'어라? 그럼 지금 아저씨가 왔다는 건... 레이언니와 소이치로도 와 있다는 얘기인가?'
왠지 가능성 있어 보이는 생각이 떠올라 다른 가능성도 이것저것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불길한 생각도 떠올랐다.
'잠깐, 분명 아저씨가 말한 10년 전 '그 사건'이... 내가 조금 전 꾼 꿈이 맞지 않나? 그런데 그 날 오에도 온천에서 소이치로가 분명...'
「외람된 말이지만 10년 전 '그 사건' 떄와 똑같은 참사가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 녀석은 분명히 말했다. 그 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할 수도 있다고. 어찌되었든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재희가 잘 해주지 않으면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아저씨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앗... 아긋.."
그리고 샤워타올을 집으려 살짝 이동하다가 느낀 발목의 통증 때문에 일순간 난 경직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최근 일어났던 불길한 일이 마구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에 놀러갔을 납치당했던 일, 그리고 '대길'을 잃어버린 것,
'설마... 이 발목도 불길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거라면... 위험한건...'
그러나 마음의 동요가 일자 난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안좋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려 했다. 안 돼, 놀러가는 날인데 나 때문에 또 분위기 흐릴라! 그리고 재희가 걱정만 하게 둘 순 없다구!
"어, 나왔구나. 9시 반에 여기서 나갈거니까 서두르자. 장보는 건 애들이 해주기로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될거야. 배고프면 뭐라도 먹을래?"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재희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뭘 해줘야 할 지 몰라 횡설수설 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재희의 태도와 마음이 내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어왔다. 첫만남은 퉁명스러웠고, 그 다음엔 의중을 알 수 없었으며, 엉뚱했고, 예상외였고, 유유부단했고, 까칠했고, 속이 깊었고, 멋졌고, 빛이 났으며, 자상했고, 부드러웠다.
지금은? 그는 내게 어떠한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처음과 같은 나쁜놈은 절대 아닌 건 분명했지만 어떻게 한 단어로 규정할 수는 없었다.
"토스트 하나만 구워줄 수 있어...?"
"뭐 그거면 돼? 계란? 쨈? 속은 뭘로 넣어줄까."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써주는 재희의 모습은, 일전에 다른 사람에게서 봤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날 사랑했던 사람.
"계란 프라이 해서 해줄래?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
"걱정 붙들어 매고, 어여 준비해."
어째서일까. 그와 대화하면 기분이 좋아졌고, 그를 마주보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항상 다투고 보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기 바빴는데, 나와 스킨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된 순간을 계기로 나와 재희의 관계는 급변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자! 그럼 문화제 우승을 기념하며-! 건배!!"
"건배~!"
다행히 여행계획은 도와준 재희 덕에 정상적으로 실행되었고, 우리는 계획대로 12시쯤에 펜션에 도착해 짐을 풀고 레크리에이션을 할 수 있었다. 원체 계획이 잘 짜여져 있었기 때문인지,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내내 모두들 지루해 하지 않고 잘 따라왔다. 30명 넘는 인원이 한 마음이 되기도 쉽지 않은데 재희 덕분에 화합 하나는 끝내줬다.
"으아 은주가 던지는 공 너무 세-!! 남자인 나도 받기 힘들다고."
"그건 윤수 니가 허약한 탓도 좀 있잖아."
"윽. 나연이 너! 그래도 내가 발야구에서 얼마나 활약했는데!"
아이들은 저녁 시간이 되자 저마다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재희는 또 주최자의 기분으로 자처해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난 매운 연기를 계속 먹고 있는 녀석이 걱정되서 슬쩍 화로 근처로 가 봤다.
"쿠액캑캑! 아우-! 바람이 자꾸 날 따라와!!"
"연기가 너한테 원수졌나본데? 큭큭."
다행히 민혁이가 재희 옆에서 고기 굽는 걸 도와주고 있었던 모양. 난 괜히 끼어들어다가 무슨 일 생길까 싶어, 다시 방향을 돌려 가희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담임선생님을 비롯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보니까 다들 이번 축제 때 연극 준비하느라 고생한 아이들이었다.
난 가희의 무리에 끼어 약 한시간 정도 시간을 죽인 뒤 저녁을 먹고 나서 재희를 따라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내 고기를 구웠으면서도 재희는 내색 없이 난장판이 된 자리를 치우고 있었고, 그 모습이 맘에 든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뒷정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리하는 모습이 귀엽다며 뛰어든 은주 덕분에 정리는 10여분 만에 끝이 났다. 우리가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갔을 땐 이미 여기저기서 게임판이 벌어져 있었다. 고스톱에서 할리갈리까지 다양한 장르로 벌어진 판에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놀고 있었다.
"어째... 건전하게 잘 놀고 있어 다행인걸."
"흐음, 이상하다. 민혁이가 '물건' 챙겨올 거라고 했었는데."
어째 남자애들이 술을 가져와서 배포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아직 그런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설마 담임선생님도 있는데 술판을 벌이려고 할까 싶었으나, 그 생각을 한지 1분도 안되어 술을 들고온 건 다름아닌 담임선생님이었다.
"꺄악!! 선생님?!"
가희도 달려와서 내 편을 들며 술은 안된다고 만류했으나 이때 아니면 또 언제 먹어 보겠냐면서 선생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괜찮아! 겨우 맥주일 뿐인데 뭐. 치킨도 시켜서 곧 올텐데... 너희들 치맥이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보면 알 거라니까?"
결국 나와 가희는 선생님의 설득에 못이겨 포기했고, 얼마 후 치킨이 도착함과 동시에 심히 걱정되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윤하의 인기투표 1등을 위하여!"
"위하여~!!"
억지 웃음을 지으며 녀석들과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두번째 먹어보는 맥주였지만 난 원래 술이 약한 몸인건지 한 캔 밖에 안 마셨는데도 갈수록 끓어오르는 무언가 때문에 기분이 묘해졌다.
'어우.... 술기운인가 이게?'
조금씩 올라오는 술기운을 죽여보려고 치킨과 안주들을 폭풍섭취 해 봤지만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고 민혁이가 어디선가 배워온 술게임을 두 시간 남짓 달리고 나니 어느덧 30명 중 절반 이상이 바닥에 뻗어 자고 있었다.
"오~ 윤하, 좀 센데!"
은주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누워 잠들어버렸고, 주변을 둘러본 난 멀쩡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창 아이들이 골아떨어진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날 톡톡 건드렸다. 곧 남자의 손길이란 걸 안 나는 화들짝 놀랐다.
"... 민혁이?"
술기운 때문에 눈 앞이 좀 흐렸으나 누군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녀석도 꽤나 많이 마신 듯, 얼굴이 붉었다. 그러나 헤롱헤롱하던 정신은 민혁이의 한 마디에 바로 없어져버렸고, 난 눈도 꿈쩍하지 못하고 민혁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윤하. 아니... 재희 맞지. 얘기 좀 하자. 나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