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다음 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민혁이와 우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일단은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너무나 둘이 연기하는게 티가 났기 때문이다.
집에서 나름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 반응이 없으니 좀 당황스럽긴 했다. 물론 재희에게는 두 사람과 있었던 해프닝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젯 밤 집에선 재희가 아픈 날 달래느라 바빴을 뿐, 별다른 대화나 의견 교환 같은 건 없었다.
결국 그렇게 조용한 아침이 지나가고 나자 순식간에 점심시간마저 지나갔다. 그 시간이 될 때까지 난 반 아이들과의 간단한 대화를 할 뿐 재희, 우주, 가희, 민혁이와는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잠을 청했다.
"얘들아 주목해봐! 주목!"
고요함은 4교시가 끝난 후 교실로 뛰쳐들어온 재희에 의해 순식간에 산산조각났다. 녀석이 가져온 소식에 교실이 시끌벅적해진 통에 조금이라도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던 난 슬슬 자리를 피했다.
"자자. 우리 1등이야 1등!! 와우! 믿겨져?"
"뭐? 진짜? 부스? 아니면 연극?"
아이들은 우르르 앞으로 몰려갔고, 난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가며 교실 뒤편으로 이동했다.
"뭐겠어? 당연히 둘 다 일등이지!!"
"우와...! 진짜 상금 엄청난 거 아냐? 얼마였지?"
"아 그리고 윤하야! 기다려봐!"
그런데 급히 자리를 뜨려는 날 봤는지, 재희가 급히 날 불렀다. 제길, 거의 다 도망쳐나왔는데... 문만 열면 나갈 수 있는데 이 녀석! 왜 부르고 그래?!
"그리고 우리 윤하가 말이지. 무려.. 전교생 대상으로 한 인기투표 여자부문 1위야!"
그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오늘 발간한 교내전문지를 가져오더니, 사실을 확인하고는 뒷문에 반쯤 걸려있는 날 다시 교실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날 재희 앞까지 끌고 와 딱 마주보게 세워놓은 아이들은 상금이 얼마냐며 다시 재희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워워, 진정들 하라구. 대충은 다 알고 있지 않아?'
한번 더 뜸을 들여 애들을 기대하게 만들더니, 재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부스 상금이 10만원에, 연극 상금이 20만원. 그리고 부스에서 생긴 순 수익이 무려 20만원 가까이 되거든? 그러니까 다 해서 50만원이라 이거지."
"뭐? 오십만원?!"
이 큰 돈으로 뭘 할 것인지, 엄청난 액수의 상금액을 듣더니 아이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의견들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가장 좋은 호응을 얻은 의견은 재희의 것이었다. 뭐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나 싶을 정도로 계획은 순식간에 짜여졌고, 다음날인 9월 12일을 출발일로 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0여분. 계획이 다 짜지고 나니 다시 아이들의 집중은 나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축하해 윤하야. 내가 너 될줄 알았다니까."
"... 난 이런 투표 하는지도 몰랐는데, 언제 어디서 한거야?"
난 어찌됬든 도망을 가지 못했던 관계로 반 아이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얹짢은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인기투표인가 뭔가는 누구 마음대로 날 후보로 넣어놓은거야? 주최자가 누군지 혼 좀 나야겠구만.
"근데 그거 부상도 있는거야?"
"당연하지. 신문 함 볼래? 여기 잘 나와있어."
은주가 건네준 신문을 펼쳐보니 그것도 1면에 반 우승 소식과 함께 내 사진이 떡하니 걸려있는게 아닌가. 으아, 이거 연극할 때 사진이잖아? 엄청 잘 나왔는데 이거 하나 출력해달라고 해야지 나중에. 부상, 부상... 어디보자 부상이... 어? 뭐야 이게.
"부상 엄청나지? 아마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입장권 두 장이었던 걸로..."
"어? 정말로?!"
그걸로 난 문화제 집행위원회로 달려가서 상품을 수령해왔다. 예상치 못한 횡재에 굉장히 들떠있다가도 이내 누구랑 가야 될 지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티켓은 단 두장, 당연히 남자를 데려갈 경우는 데이트나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당연히 남자애들은 내 몸이 버텨나질 못할테니 안돼고, 재희는 일단 임자 있는 몸인데다 웬지 이런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것 같으니 넘어가고. 어휴 누구랑 가야 돼? 그냥 가희나 은주랑 갈까.
"윤하야? 뭐해, 수업 다 끝났어."
내가 그 고민으로만 한 시간을 다 보냈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교실에 나와 재희 둘 뿐이었다. 어래? 다들 고새 어디로 간 거람.
"요새 왜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 때가 많아? 가희 데려다 주고 올 때까지 쭉 이 상태로 있을 줄이야."
그러고보니, 늘 우주와 함께 돌아갔던 하교길인데 어느새인가 그 자리에 재희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우주였지만 난 그가 민혁이와 같이 하교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날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피하는 이유 역시, 나의 남성공포증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 뭐 좀 생각하느라. 그나저나 너 요새 맨날 가희 데려다주고 다시 오는 것 같네. 설마 둘이 별 일 있는거 아니지?"
그리고 재희와 가희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몇 번 둘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지만 가희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고, 재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한 척 하는 통에 난 그냥 깊이 관여하는 걸 포기했다.
"왜그래 아무 일 없다니까. 발목은 좀 어때?"
깊이 관여한다고 내가 둘의 관계를 회복시킬 순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그 문제로 재희에게 말할 때마다 녀석은 나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어떻냐니까... 자기 혼자 발목때문에 연극 망칠까봐서 꽁꽁 숨겨놓고 말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설마?"
"아, 아니야-!"
그러나 내가 발끈하고 변명하려고 하니, 녀석은 으레 그랬듯이 내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대 말을 끊어버리고는 일으켜 주겠다는 의미로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너랑 같이 산게 벌써 8달 가까이 되는데 이 눈치로 그것도 모를까봐?"
그렇게 말하면서 날 번쩍 들어 일으킨 녀석은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누가 볼까봐서 손을 뺴려고 해도 그는 놓아주지 않았고, 난 그대로 무게중심을 녀석에게 기댄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공연... 이 녀석이랑 보러 갈까.'
잠들기 전 오늘 재희가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며 그런 생각이 든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날 밤. 난 다시한 번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당시 꿈이 열흘 간격으로 계속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나는 마음의 대비를 할 수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축제 마감과 다음날이 여행이라는 생각에 치여 잊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의 충격적인 내용의 꿈으로 인해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야 말았다.
"윤하야. 엄마 손 꼭 잡아."
눈을 뜨자마자 난 차 안에서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앞에선 아저씨가 말 없이 운전하고 있었고, 내가 어떤 꿈인지 알아채려는 찰나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윤하야, 겁내지 마. 절대로...!"
아주머니가 윤화를 품에 안음과 동시에 어두웠던 차의 앞 유리로 엄청난 양의 빛이 쏟아져들어왔고, 시끄러운 타이어 마찰음에 이어 강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아악-!!"
시야가 무지막지하게 흔들렸고, 두 바퀴 넘게 굴러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간 차가 바닥에 충돌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윤하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찌그러진 차 안에서 아주머니가 신음하는 게 들려왔다.
"엄마... 엄마!!"
눈앞에 붉어졌다. 오른쪽 이마가 찢어진 듯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지는 것 역시 느껴졌다.
"윤하야... 큭ㅡ 괜찮니?"
차의 반대편에서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며 걸어오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역시 바닥에 충돌하면서 튕겨져 나간 듯 여기저기 피투성이인 채로 윤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윤하는 차 안에 아주머니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이지 못했다. 타박상은 거의 없었지만 엄청난 공포로 인한 쇼크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게 느껴졌다.
"큿... 여기 가만히 있으렴. 엄마... 엄말 구해올게."
아저씨는 윤하의 외투를 북 찢어 이마를 칭칭 동여매 지혈을 한 후 절뚝거리며 차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차 엔진쪽에서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위쪽에 모인 사람들이 놀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저씨!!! 가까이 가지 마세요!! 119가 곧 올거에요!!"
"어떻해, 불 날 것 같아... 폭발하는 거 아냐?"
그러나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저씨는 힘겹게 차로 걸어가 차 속의 아주머니를 조금씩 차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보닛 부분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차츰 커져가더니 시뻘건 불길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고, 얼마 뒤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차에서 2m정도 끌고 왔을 즈음 위쪽에서 소방차와 앰뷸런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멍하니 앉아 있던 윤하가 갑자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공포스럽고 소름돋는 고음으로...
"아빠... 피해요!!!! 아악!!"
그리고 나서 윤하의 눈이 점점 감겼고, 어두워진 시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난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콰앙-!!!]
그건, 분명 차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아직 차 근처에 있는데. 안돼. 안돼!!
내가 손을 허공에 뻗은 채 허우적거리는 게 느껴짐과 동시에 캄캄했던 눈 앞엔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이불에 투두둑 쏟아졌다.
"안 돼... 안돼...! 어흑... 흐억..."
"윤하야, 정신차려! 윤하야!"
어느새 주위는 내 방으로 변해 있었고, 차도,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온데간데 없었다. 오로지 재희만이 울부짖으며 경련을 일으키는 날 보살펴 주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