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오... 휘츠먼, 정신이 들어요?"
헬라가 알려준 덕에 민혁이 때문에 잡생각 중이던 난 다시 연극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대사 순서를 놓칠 뻔 했는데, 다혜가 날 보며 윙크를 날리는 걸 보니, 그걸 알고 있지도 않았던 대사를 애드리브했던 모양이다.
"크읏... 예, 여전히 엄청나게 아프지만 그래도... 큭, 웰른 부인이 주신 약 덕분에 그나마 좀 나아졌습니다."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런 험한 꼴을 당하다니.."
휘츠먼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마주보았다.
"아니요, 괜찮-윽! 습니다... 덕분에 웰른 부인이 무사하잖아요?"
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사를 계속했다. 연극의 대단원에 돌입하는 감동적인 순간, 나도 울고 관객들도 울고... 강당 안은 숙연한 분위기였다.
"고마워요 내 생명의 은인... 도대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그리고 내가 그렇게도 걱정하던, 결말을 알리는 키스가 눈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먼저 우주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난 대본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뿌옇게 흐려지는 걸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동시에 관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우주의 얼굴이 내 쪽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내 몸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버티자 좀만 더...!
"윤하야, 이따가 교실에 좀 남아줘. 할 얘기가 있어."
어라? 뭐지? 난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떳다. 우주는 내 입술이 아닌 볼에 얼굴을 가까이 댄 채로 교묘하게 키스를 한 척 연기하더니 내게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난 그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떳고, 그와 동시에 객석에서 환호 소리가 터져나왔다.
우주는 곧바로 얼굴을 떼더니, 대사를 계속했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우주를 바라봤고, 후에 이 표정이 연극인지 실제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대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부인, 이걸로 충분해요."
천천히 무대의 조명이 소거되었고, 관객들의 환호소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전 출연진이 무대로 나왔고, 재빠르게 인사 대열을 갖춘 우리는 불이 켜지자 마자 배꼽인사로 관객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그러나 그 난리통 속에서도 난 오로지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민혁이가 건넨 쪽지와, 우주의 한 마디로 인해 고요하던 내 마음 속은 다시 뇌우가 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프던 발목까지 잊어먹을 정도로, 여파는 엄청났다.
*
몇 시간 뒤 재희와 가희는 총학생회의를 하러 갔고, 난 우주와 민혁이 때문에 교실에서 창 밖만 보고 있었다.
'설마 장민혁과 나우주가 똑같은 목적이었을 줄이야...'
공연 끝나고 나서 살짝 열어 본 민혁이의 편지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윤하야.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다 끝나고 교실에 좀 남아주라! 꼭이야?!]
나는 문득 우주도 교실에 남아라 했었던 걸 떠올리고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우주와 민혁이를 둘다 만나 중요한 얘길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도대체 누구의 이야길 들어야 한단 말인가.
'대체 뭔 일이길래 둘이 동시에 이러는거지. 설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경우인 그건 아니겠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 두 놈이 나에게 사랑얘기를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연극 내내 계속되었던 두 놈의 긴장된 모습과 시선회피 때문이었는데, 뭔가를 말하기 위해 계속 머뭇거리는 모습 때문에 내 입장에선 좀 거슬리는 기억으로 계속 남아있어 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렇게 시간을 재고, 타이밍을 고려하면서까지 나를 견제하듯이 시선도 피해가며 마지막으론 교실에서 기다리라고 한 걸까. 그것도 한참 정신없는 연극 무대 가운데에서.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온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뚜벅 뚜벅]
올것이 왔다 싶은 발소리가 우측 복도에서 들려온다 싶더니만,
[뚜벅 뚜벅]
좌측 복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들리기 시작했다.
"...? 어?"
"야... 너 뭐야. 왜 지금 여길!"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밖의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양쪽의 발 소리는 멎은 상태였고, 잠시간 정적이 흐른 뒤, 약간 목소리가 낮춰진 채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나우주, 설마 너도 윤하한테..."
"설마 민혁이 너도 그것 때문에 온거야?"
문 쪽에 가까이 붙어 작아진 둘의 얘길 엿듣던 나는 뭔가 안좋은 예감이 들어서 재빨리 전에 숨었던 교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이로써 저 두 놈들 때문에 이 곳에 신세를 지게 되는게 무려 두 번째로군.
[드르륵!]
"윤하야, 사실-!!"
"윽, 안돼 내가 먼저... 어?"
서로 지가 먼저라며 우당탕탕 교실 안으로 들어온 두 놈은, 내가 교탁 밑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텅 빈 교실을 어리둥절하게 둘러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 윤하 아직 안 왔나?"
"... 안 온거 아니야?"
둘은 기운이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직접 보진 못했는데, 자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둘이 움직일 때 마다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꽃다발까지 준비해왔던 모양이다. 이 자식들,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진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아주 제대로 들떴네, 들떴어.
"...잠깐 누가 온다."
"!! 숨어, 우리 이러고 있는 걸 들키면...!"
게다가 프러포즈를 준비한 걸 들키기라도 할 까봐 걱정이 됬는지,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자 두 녀석은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잠깐, 너희들 교탁 밑으로 숨으려는 건-
"-아-읍!!"
으악!! 하마터면 소리지를 뻔 했네. 진짜로 둘 다 이리로 오면 어떻해! 게다가 너희들 정장은 언제 맞췄어?!
"...."
둘은 날 보더니 약 3초간 정지했다가, 날 홱 끌어내서 교탁 밖으로 내보낸 뒤 후다닥 좁은 교탁 밑으로 숨었다. 야 거기 둘이 들어가기엔 좀 좁을텐데?
[드르륵!]
"윤하야?"
"어? 재희야."
난 교탁 쪽에 있던 시선을 황급히 문 쪽으로 돌려 재희를 봤다. 민혁이와 우주의 어색한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옆을 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슬며시 재희에게로 다가갔다.
"... 가자. 가희 데려다주고 왔어."
"엉? 그래, 그, 그러자."
게다가 약간 화난 듯한 재희의 표정과 억양에, 덜컥 겁이 났고, 난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나타난 재희에게 손이 붙들려 따라가야 했다.
"아읏-!"
"...! 왜그래?"
그러나 교단에서 한 걸음 내려간 바닥으로 내려오다가 그만, 삐었던 쪽의 다리를 살짝 다시 삐고 말았고, 연극 내내 참고 있었던 고통이 한순간에 터져나오며 날 쓰러지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 소리에 재희는 엄청나게 놀라 날 부축했고, 숨어있던 두 사람도 놀랐는지 교탁이 살짝 흔들렸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날 보던 재희는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치우더니 심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 발목 다쳤어? 왜 이렇게 심해?"
"아니... 그게 다친지 좀 됬거든... 하하하."
재희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내게 버럭 화를 냈다.
"왜 그럼 진작 말을 안 한거야! 너 설마 이 다리로 연극 내내 뛰어다녔던 거야?"
"..."
난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연극을 위해서 아픈 것도 참고 계속했던 거긴 했다. 만약 아픈 걸 숨기고 있는 걸 들켰다간 날 걱정하는 재희가 이렇게 화를 낼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화내는 걸 보면서도 난 괜스레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지만, 녀석이 날 위해 신경써주는게 왜그리 기분이 좋았던지...
"...울어?"
재희는 내가 아무 말 못하고 멍하니 있자 화를 낸 게 후회됐는지, 내 얼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내 눈에 고여가는 눈물을 보더니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등을 보이곤 업히라는 시늉을 했다.
"업혀, 발목 많이 아프면."
"...응."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재희의 넓어진 등에 업혔다. 그의 넓은 등에 업혀 가면서도 훌쩍이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왜였을까, 재희의 등에 업힌 탓인지 내 심장은 더욱 더 시끄럽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울지 말고 마음을 잡으라고 아무리 외쳐보아도, 내 마음은 들은 체 만 체 계속 내 가슴속을 간질였다.
아마도 아팠던 것 같다. 내가 구석으로 치워두었던 그 감정이, 날 부정하지 말라고 내 가슴을 계속 찌르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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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11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