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내가 가운데, 양 옆에 나연이와 그녀의 친구 해리가 섰다. 뒤쪽으로 조연인 친구들끼리 서고 나서, 난 대사를 시작했다.
"오늘도 훌륭했어요 오트먼 부인. 역시 최고의 피아노 연주에요."
"호호 별 말씀을... 그러헤 따지면 로젠 부인의 하프가 더욱 아름다웠죠."
그렇게 세 여자가 까르륵거리며 웃고 떠들고 있는데, 인파 사이에서 담임선새님이 짠 하고 등장했다. 이야, 남장 엄청 잘 어울리시잖아?
"어머 포란 백작님. 이제 오세요, 어딜 갔다 오신 거에요?"
한창 인물들이 소개되는 시점이라 그런지 관객들도 팸플릿에 있는 등장인물 소개를 보면서 집중하고 있는 듯, 주변은 발소리만 들릴 뿐 적막함이 감돌았다.
"어휴, 중간에 부인들을 놓쳐서 한참 해맸지 뭐요. 뭔 놈의 저택이 이리도 넓은 지 원."
"어머~ 그럼 저희 집 오시면 영영 못 나가시겠어요 백작님?"
"아니 무슨 뜻이오 웰른 부인?"
"저희 집은 여기보다 2배는 넓으니까요, 호호호."
"하하하! 그렇군요, 이것 참 하하."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며 우린 서서히 교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간이 무대를 조율하고 있는 상황팀을 따라 은주도 차분히 주변 관객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얼마 쯤 가자 인파 속에서 우주가 나오더니, 우리 쪽으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걸어오다가 나와 부딪쳤다.
"꺅!"
"억! 괜찮으십니까? 허... 헉 웰른 부인!"
그걸 본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 나에게 달려와 우주를 밀쳐냈다.
"무례하긴! 괜찮으시오 부인?"
"아... 네, 발목을 살짝 삐끗 한 것 같지만요..."
"쯧... 사람 거 앞 좀 바로 보고 다니시오!"
한 소리 들은 우주는 쭈뼛거리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물러났다. 돌아가면서도 우주는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며 카메라를 후후 불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괜찮아요 웰른 부인? 운이 나쁘군요 오늘. 아까도 프리슨 백작과 부딪치더니..."
"그러게요.. 기껏 장만한 새 옷에 얼룩 지겠어요."
"허.. 천하의 대부호 웰른 부인도 그런 걸 걱정하는군요."
선생님이 너스레를 떨며 내 옷을 터는 시늉을 했다. 난 씨익 웃으며 그에 화답했고, 장소는 서서히 교실 쪽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학교 건물로 들어서는데, 안에서 두건을 뒤집어 쓴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상한 모습의 그 사람은 재빨리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난 최대한 연기에 집중하며 언짢은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걷고 있는데, 위에서 신호가 왔다.
"왜 그래요 부인? 무슨 걱정이라도-"
"꺄-악!!"
"!!? 무슨 소리지? 어디서 난 거야?"
"2층이에요!!"
우리들은 황급히 2층으로 뛰어올라 갔고, 관객들도 따라서 빠르게 이동했다. 몇 초나 걸렸을까, 계단에 도착했더니 메이드 복장을 한 다혜가 헐레벌떡 뛰어내려왔다.
"헬라! 무슨 일이니?!"
"헉... 헉. 안주인님, 큰일..났어요. 위에, 주인님이... 주인님이..!!"
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다혜의 표정을 보며 그녀의 연기로 인해 내 마음마저 울컥함을 느꼈다. 다혜가 제대로 연극에 몰입해 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다.
"여기 앉아서 쉬고 있으렴.."
다혜를 미리 준비해 둔 의자에 앉힌 난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랐다. 선생님과 나연이가 내 뒤를 따라왔고, 교실 문을 열자마자 난 온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비록 분장이었지만... 얼마나 진짜 같았는지 섬뜩할 정도였다. 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그 죽은 걸로 분장한 우리 반 친구 앞으로 걸어갔고, 한 걸음 남았을 때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웰른 부인!!"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선생님이 날 향해 달려와 날 마구 흔들었지만 난 눈을 감고 연기에 몰입했다. 실감나는 실신 연기를 위해 얼마나 연습했던가!
"여보, 괜찮아요? 레안, 일어나 봐요!!"
내가 들어왔을 때 교실 안의 상황이 어떠했는고 하니, 설정된 컨셉이지만 실제로 보니 처음 본 나도 놀랬을 정도였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책상들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액자들과 장식품들, 그리고 그 사이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내 오빠 역할의 재희와, 내 남편 역할을 맡은 승호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액체를 발랐길래 저렇게 진짜 피 같은거야? 하여간 다혜의 연극 연출력은 정말 굉장하다니까. 물론 민혁이의 엄청난 추리극 배경 지식 덕도 조금 있겠지만... 왜이렇게 우리반엔 능력자 투성이야?!
"끄으... 엘리제...? 당신.. 맞소?"
"맞아요, 레안, 레안,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나연이는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 하며, 재희의 얼굴을 마구 쓰다듬었다. 피가 묻은 곳을 전부 더듬어 보고 나서야 상처가 크지 않다는 걸 알았다는 듯이 그녀는 재희를 거칠게 껴안았다.
"윽... 두건을 쓴 괴한이 나타나서... 날 때려눕히곤... 큭 웰른을..."
선생님은 날 바른 곳에 눕힌 후 승호의 맥을 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틀렸어.. 이미 사망했소. 괴한의 목표는 아무래도 웰른이었나 봅니다..."
"맞습니다.. 포란 백작님. 그 때... 내가 웰른과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살짝 교실의 복도쪽 창문을 봤는데,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압권이었다. 마치 TV속 로보트를 잡으러 빨려들어갈 듯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이 우리 교실 안을 보며 몰입하고 있었다.
"습격 당했소... 그것도 순식간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극의 프롤로그는 끝이 났다. 단지 프롤로그만을 했을 뿐인데 모든 출연진이 모여 짧게 인사할 때 쏟아진 박수갈채는 굉장했다. 그렇게 한 바탕 하고 나서 6시까지 교실을 정리하고 나서 디너 타임 영업을 하려고 보니... 아까 연극 보던 관객들이 그대로 줄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이거 연극의 여파인가?"
민혁이가 엄청 놀라서는 인파가 몰려오는 걸 보더니 부엌으로 달려갔다. 나연이도 민혁이가 달려가는 걸 보곤 황급히 부엌으로 가서 요리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큰일이네, 두 시간동안 이 인파를 전부 수용하기에는 우리 반이 좁아."
얼굴에 묻은 피색 물감을 수건으로 지우면서 재희가 걸어왔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겠지? 전부 들여보낼 순 없잖아."
분장을 지우고 난 깨끗한 재희의 얼굴을 보다가 난 나도모르게 그 녀석을 멍하니 보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내가 저 몸의 주인이었을 때 거울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뭔가... 좀 더 이성적 판단에서 벗어난, 본능으로 느껴지는 감각. 뭐지? 도대체..?
"흠... 어떻한다. 추첨하기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 무리고... 이제 개점까지 30분 밖에 안 남았는데 뭔가 뾰족한 수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녀석의 입술만 바라보던 나는, 재희가 내 이상행동을 느끼고 나에게 다가오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난 황급히 녀석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돌렸다. 제길, 바라보고 있던 거 들켰나? 심장은 왜 이리 뛰는거야!
"윤하야, 뭐 좋은 생각 있어?"
"아, 아아, 그, 그게 있지..."
생각하자 뭐라도 방법을 얘기하지 않으면... 아!
"그! 다목적실을 쓰자!"
"다... 목적실? 거기 그런데 6반에서..."
무턱대고 쓸 수 있을만한곳을 골라 말했는데, 도움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튀어나왔다. 재희가 안된다는 이유를 말하려던 찰나, 담임선생님께서 교실로 짠 하고 등장하면서 말씀하셨다.
"아냐 쓸 수 있어 재희야."
"선생님?!"
분명 아까전만 해도 연극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지시고 안 계셨었는데 어딜 갔다 오신거지? 연극 의상도 그대로 입으신 채로 어딘가에 빠르게 다녀오신 모양이다.
"어디 갔다오셨어요?"
"응 좀전에 다목적실에 갔다왔어. 교실 나오는데 사람이 엄청 많아서 공간이 더 필요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거리도 가깝고 공간도 충분한 다목적실에 가봤는데..."
선생님도 우리 반 부스에 엄청 열심이신 건 확실했다. 진짜 연극 같이 하자고 말하길 잘한 것 같은걸. 되게 시크하신 줄 알았는데 같이 하면 할수록 선생님의 진짜 성격이 굉장히 부드럽고 사교적이라는게 느껴졌다.
"아니 글쎄 6반 애들이 철수하고 있는거야!"
"엥? 진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