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64화 (64/188)

64화

<10. 중세 유럽에 소녀는 지고>

어쩌다 보니 날짜는 훌쩍 지나, 9월 8일인 축제 첫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초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뙤약볕 무더위와 매미 떼의 울음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 날 밤 매점에서 나의 본심을 다시 확인한 일로 인해 재희와 거의 대화는 없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되려 어색한 사이였던 우주와 민혁이와 지냈던 시간이 길어져 버렸고, 그만큼 나로서는 위협적인 도박이었다. 애초에 남자애들에게 닿는 즉시 몸에 이상이 오는데 그런 애가 날 노리는 두마리 사자 곁에서 알짱댔던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주가 함께 있었던게 그나마 안전빵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말실수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되받아쳐주는 우주 덕분에 난 내가 실수했단 걸 깨닫고 그 말이나 행동거지에 대해선 좀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너무나도 날 완벽하게 보호해내는 우주 때문에 어쩌면 얘가 나와 윤하의 교체 사실을 알고 일부러 날 지켜주려고 그러는 것인지 하고도 생각해 봤지만, 어제 있었던 일로 인해 그 의심은 곧바로 접어 두었다.

「야, 니 자꾸 윤하 말 하는데 끼어들고 그래.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건 굉장히 우연이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다가 복도 쪽에서 우주와 민혁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인식하고 재빨리 교탁 밑에 숨어든 나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모두 들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아니야, 난 그냥 윤하 말에 맞장구를...」

「웃기지 마 임마. 너 지금 숨기는 거 있다니까. 그때 말했던 관심있는 애가 윤하 맞는거지? 그래서 자꾸 날 견제하는 거 아냐?」

「그, 그건...」

우주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왜 나한테 관심 있다는 걸 딱 애길 못하지? 내 앞에서는 그렇게 당당히 얘기해 놓고서는 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얘길 못하냐 넌.

「아니면 뭐 때문인데. 그거 말곤 이유가 없잖아. 너 윤하가 나한테 친근하게 대하는게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냐?」

계속되는 민혁이의 추궁에 그저 입 다물고 노려보기만 하던 우주는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 니 말 맞아. 나 윤하 좋아해 됐냐?」

「...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러나 우주의 결단이 담긴 한 마디에도 민혁이는 꿈쩍도 않았다. 민혁이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러고보니 왜 쟤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들이대지?

「하지만 기각이야. 그녀가 아직 네 맘 받아들이진 않았잖아? 나도 윤하한테 관심 있다고.」

그리고 민혁이는 내가 끌리는 이유를 우주에게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우주는 뭔가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는지 입이 살짝 벌어졌다. 뭐가 그리 그의 긴장을 풀리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놓치고 지나간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 게 분명했다.

「윤하랑 있으면... 왠지 너무 편해. 마치 몇 년 동안 알던 친구 같아. 지금까지 수 많은 여잘 만나봤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나도 양보 못해!」

그 후는 둘의 서로 포기하란 말의 연속이었고, 결국 양쪽 아무도 포기하지 않은 채 둘은 '어디 한 번 누구한테 가나 해보자!'는 식으로 다툼을 끝내곤 각자 가방을 챙겨 돌아가버렸다.

여튼 그 일 있은 뒤 난 우주나 민혁이가 둘다 순수히 이성으로써 호감이 있어서 나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이해했다. 두 사람이 날 이성으로 보고 작업을 거는 게 교체 사실을 들키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으나, 앞으로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소꿉친구 두 명이 여자가 되어버린 날 좋아하는 이 어이없는 시추에이션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지.

'게다가 재희까지... 최근 계속 신경쓰이고 있고 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고개는 푹 숙여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기랄, 나란 놈은 애 이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는거야? 첫사랑한테 몸을 뺏기질 않나, 이젠 믿었던 친구놈들에게까지 공략당할 위기고.

"어이, 어이, 안주인. 푹 처져 있지 말고 좀 기운좀 차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줄은 아냐 너?!

"...네네 알았습니다. 누구씨 덕분에 힘들어 죽겠지만 말야, 웃어야지 뭐."

재희는 어제 내게 일방적으로 할 말만 하고는 바로 전처럼 어색함은 풀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냥 같이 살고 있는 동급생 여학우의 마음의 병이 걱정되서 그런 말을 한 것 뿐이야'라니 말이 되냐, 내 생각에 너가 나한테 마음 쓰는건 친구 이상이거든?

"일단 축제기간만이라도 좋게 넘기자. 여태껏 쌓아놓은 게 아깝지도 않아?"

내가 자꾸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재희는 일단 축제만이라도 완벽히 끝내자고 안달했다. 걱정 마라, 그간 준비한 거 생각하면 나도 이제와서 내던지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자자, 로젠 가문의 '귀족의 정원'에 놀러 오십시오! 맛있는 차와 음료, 다과와,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에는 환상적인 풀 코스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지금 바로 예약하세요! 자리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가희는 준비한 멘트를 외치며 연극 포스터와 우리 반 팸플릿을 연속해서 뿌려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그녀를 본 축제 관광객들 왈, '누가 와서 막 부스를 설명해 줬는데, 잠시 후엔 팸플릿만 남아있었다'고.

그런데 굳이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반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런치, 디너타임도 아닌 다과회 시간인데도 대기열이 엄청났다. 결국 식사시간은 예약제로 미리 티켓을 발권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우와... 여기 조리장이랑 조리사 봐봐, 엄청나!"

"양식연구부의 톱 나연이랑, 신흥 요리계 다크호스로 불리는 장민혁이 이끄는 조리 팀이라니..."

말 그대로 두 명의 요리 명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우리 반의 음식은 가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근처 다른 반에서 찾아와서 음식 맛을 보고는 '큰일인걸'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귀족의 정원 컨셉에 맞춰 마치 진짜 중세 유럽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의상과 세트장의 영향력은 가히 대단했다.

"저, 사진 좀 같이 찍어도 되나요?"

"아 네, 물론이죠!"

카운터에서 귀족 부인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나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목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컨셉은 우리 연극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레이아 웰른 부인이었는데, 식사를 마친 관람객들이 저마다 사진 찍자고 난리였기 때문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진을 찍었다. 특히 남자들이 잔뜩 접근해와서 몸이 긴장한 탓에 엄청나게 힘들었다. 첫날 영업 끝나고 입술 주변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으으. 계산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바쁘다 바빠.

다행히 나중에 가희가 홍보 끝나고 와서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첫날 하루 일하고 나머지 이틀을 체력부족으로 몸져 누울 뻔 했다.

"로젠 가문의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한 숫자를 세면 아마 거뜬히 백 번이 넘을 거다. 진짜 손님 접대는 진짜 너무너무너무 힘들다.

"엄청난 걸... 사전 예상 순위 1위라지만 이정도의 인파가 몰릴 줄은."

연극할 때 기자 역할인 우주가 카메라를 들고 오면서 나에게 말했다.

"자 여깄습니다. 잘 나왔죠? 2천원입니다~"

자기 연극 역할에 딱 맞게도 우주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관람객들과 우리 반 부스 스탭들을 같이 사진 찍어주고 2천 월을 징수하는 임무를 배정받았다. 우린 과연 이 판매 전략이 먹힐 것인가를 상당히 의심했는데, 예상 외로 그 파급효과가 엄청났다. 나를 비롯, 메이드복장을 입고 있는 여러 서빙하는 친구들, 귀족 복장을 한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먹으러 오는 사람의 약 2배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흐, 그나저나 윤하는 사진빨 진짜 잘 받는 거 같아. 여행때도 느꼈지만, 새삼 대단하다니까."

"과찬이오~"

난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반 안의 모든 남성들이 일순간 단체로 멍 때린 걸 어렴풋이 느낀 난, 부억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슬쩍 그쪽을 돌아봤다. 이크, 민혁이 녀석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흠, 흠. 계산해야지 계산."

우주도 그걸 봤는지, 오히려 내게 더 가까이다가왔다. 야야 너 그이상 접근하면 안돼! 나 위험하다고! 이 녀석들 진짜로 날 두고 싸움이라도 벌일 기세네 이거.

"모두 집중해 주십시오!"

힘겹게 두 사람의 기 싸움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하며 돈 계산을 하고있는데, 교실 앞문으로 경찰 복장을 한 네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오! 드디어 이 이벤트 시간이구나?

"지금부터 저희가 내는 퀴즈를 맞추신 분께 여러가지 상품을 증정할 예정입니다."

말 하고 있는건 우리 반의 차윤수다. 아버지가 진짜 경찰 간부라서 자신이 연극에서 경찰 역할을 맡고 싶다고 한 애였다. 우린 과연 윤수가 얼마나 완벽하게 역할을 소화해 낼지 기대했는데, 연습할 때 정말 경찰같이 감쪽같은 연기를 보여줘 모두를 놀래킨 적이 있었다.

"상품은 문화상품권, 디저트 교환권, 사진 촬영권 등이며 중복 당첨은 불가하오니 신중히, 그리고 빠르게 손을 들어주세요. 단, 문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한창 런치 타임에 기획한 이벤트 역시 굉장한 호응이었다. 식사하던 손님들은 물론 대기하던 손님들까지 너도나도 상품을 얻기 위해 난리도 아니었다.

"대단한 기획력라니까..."

난 축제 첫날을 보내며 오만감이 교차했다. 특히, 이 모든걸 총괄지휘한 한재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