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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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꿈의 내용을 되뇌이며 감춰진 의미를 유추해내기 위해 정신이 딴데 가있던 나는 결국 주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나머지 우려하고 있던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 대화 상대가 민혁이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난 엄청난 실수를 해버렸다. 하필이면 이 녀석 앞에서 그 습관이 튕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고,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임기응변을 마구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아... 아니 왜?"
난 일단 민혁이에게 양 팔을 잡혀서 몸이 요동치는 것부터 막기 위해 그를 뿌리친 후 약간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우... 젠장 몸아 진정좀 해라 제발...!
그 뒤 나는 최대한 여자다움을 어필하기 위해 놀랐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양 팔로 가슴께를 보호하듯이 감쌌다. 내가 이런 행동을 보이자 민혁이도 약간은 당황한 듯 잠시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아 쫌 모자른디...'
이 한마디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난 상상도 못했다. 내가 뭔가를 살 때 돈이 부족하면 항상 하던 말이었지만, 민혁이가 이걸 기억에서 끄집어낼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지금 윤하의 모습이고, 그 한마디만으로 날 재희로 단정할 순 없으리라 굳게 믿고, 난 끝까지 잡아뗐다.
"민혁아... 너 왜 그래, 무섭게?"
"아. 아아아 아니! 미안, 절대로 뭔가 해치려거나 하려던 건 아니야!"
민혁이는 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내 페이스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난 여세를 몰아 웬만하면 잘 하지 않는 여자다운 행동들을 생각나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민혁이가 나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리기 전에 모두 지워버려야 한다.
"아... 아무튼, 그럼 됐어, 빨리 다른 거 사러 가자."
난 쭈뼛쭈뼛거리며 최대한 녀석 때문에 겁먹은 듯한 티를 팍팍 냈다. 남자공포증 때문에 녀석이 날 붙잡았을 때 몸이 경련을 일으킨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자연스러웠다.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는 날 뒤따라오는 민혁이의 모습이 눈 앞에 선했다. 다행이다, 아직 그렇게 심하게 의심받고 있진 않은가보다.
"이거... 이게 좋겠다."
다행스럽게도 그 뒤로 민혁이는 전혀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아닌 척 해서 녀석이 의심할 시간도 주지 않은 게 승리 포인트였던 것 같아, 난 더 이상 이 놈이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못을 박는 한 마디를 추가적으로 던졌다.
"민혁인... 부드러운 앤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칠구나?"
이러면서 볼에는 홍조를 슬쩍 띄워주니, 민혁이 녀석의 반응이 참으로 굉장했다. 아니 한재희나 이놈이나 내가 여자다운 모습만 보여주면 왜 이렇게 좋아하는거야?
"푸핫ㅡ 아냐아냐!!"
엄청난 속도로 손을 휘젓는 녀석의 얼굴은 터질 정도로 빨갰다. 재희였을 떄 이 녀석의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기분 참 요상하네. 아니 그것보다, 장민혁은 절대 여자 앞에서 이런 무방비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대체 이건 무슨 경우란 말이냐!
*
여튼 그렇게 한 번의 위기를 넘긴 다음 날,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물론 민혁이는 그때처럼 대놓고 '다시 말해 봐'처럼 물어오진 않았지만 자꾸 스리슬쩍 나에게 접근해 오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뭔가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 때문에 좋아서 그렇다나 뭐래나.
'아무래도 내 옛날 말하는 투라던지가 분명히 남아있긴 한가본데...'
그래도 내가 재희라는 쪽으론 생각 안 하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었다. 이 녀석이 조금이라도 생각을 트는 순간 나와 윤하의 비밀이 밝혀질 것 같은 위태로운 줄타기의 연속일 뿐, 그 줄에선 절대 떨어지진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 웬만한 정황증거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 사람의 몸이 바뀐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진 않을거다.
"오... 휘츠먼. 정신이 들어요?"
"크읏... 예, 여전히 엄청나게 아프지만 그래도... 큭, 웰른 부인이 주신 약 덕분에 그나마 좀 나아졌습니다."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다니..."
"아니요 괜찮ㅡ윽! 습니다. 덕분에 웰른 부인이 살았잖아요?"
그러나 한창 연극 연습을 하던 중 발생한 뜻밖의 문제로 인해 난 민혁이에게 의심할 수도 있는 덜미를 잡히고야 말았다.
"고마워요... 내 생명의 은인... ..엉?"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우주의 손을 힘겹게 잡은 채 겨우겨우 이어나가던 나는 괄호로 쓰여 있는 설명 부분을 읽다가 갑작스럽게 가까이 접근하는 우주를 본능적으로 밀쳐내 버렸다.
내 정신질환으로 인한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그 행동을 하고 나서 나를 비롯한 모든 급우들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난 다시금 그 괄호 속 문장을 마음속에서 되뇌이며 큰 고민에 빠졌다.
'레이아, 눈물을 흘리며 휘츠먼에게 가볍게 키스한다... 라니?! 젠장, 내가 이 몸 상태로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난 당황해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괜히 움직였다가 문제만 더 커질 것만 같아서 행동이나 말을 자제한 것도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아이들의 의구심만 커져갈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 이게 뭐야?!"
"우후후후.. 이제 발견한거야?"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방법을 생각한 끝네, 난 가장 소녀틱한 방법을 택했다. 물론 진짜로 내가 이 키스신이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이런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올 수 있었고, 마치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다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야 이게! 다혜 너 이런 장면 있다고는 말 안해줬잖아?!"
"왜~? 근데 어쩔 수 없었어. 반 애들의 95%가 이 장면을 넣는데 찬성했다구."
남은 5%가 누군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일단 내 현재 상태를 알고 있는 우주랑 나와 우주사이를 이상하리만큼 걱정하는 한재희 이렇게 둘이렸다.
"끙.. 나 매점 좀 갔다올게. 머리도 식힐 겸 음료수 하나 마셔야겠어."
"헤헤, 그러셔. 맨정신으론 아마 못 할지도 몰라 이 장면~"
"다혜야!"
난 부끄러움과 언짢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며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매점아주머니에게도 평소와 다르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동전을 쾅 하고 내려놓으며 '오란디 사과맛 하나 주세요!'하고 외치고 나서, 혹여 누가 보고있지 않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난 음료수를 가볍게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탄산이 내 목을 괴롭혔지만, 따가움 정도야 지금의 내 답답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오!"
캔을 거칠게 내려놓으면서 난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리고 나서 교정의 벤치에 털썩 주저않은 후 난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남자들이랑 손도 못 마주대서야 원... 진짜 큰일났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개중에는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재희와 접촉할 때마다 간간히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네, 왜 다른 남자애들은 닿기만 하면 내 몸이 난동을 부리는데 재희만 멀쩡한거지?'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석 원래 여자였기 때문에 그런가? ... 아니면 그냥 원래 내 몸이라서??'
머리를 긁적이며 멍하니 하늘을 보던 나는 어느새 붉었던 하늘이 어둑해진 것을 발견했다. 시커먼 어둠이 가득 채운 하늘에선 몇 개의 별만이 그 자릴 지키며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해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서윤하!"
난 퍼뜩 정신이 들어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한참 달리다 왔는지 헐떡대고 있는 재희가 서 있었다. 흠칫 놀라서 핸드폰을 찾던 나는 그것이 교실의 가방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재빨리 근처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으악 벌써 여덟 시가 넘었잖아?
"아 정말, 왜 이렇게 안 와? 두 시간이 넘게 여기서 죽치고 있었냐?"
"여긴 어떻게 알고... 아니지, 뭘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와?"
내가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재희는 내 머리에 꿀밤을 한대 콩 먹이면서 버럭 화를 냈다. 아 깜짝이야, 내가 물론 정신 놓고 하늘만 보느라 깜빡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화를 내-
"아 증말!! 너 납치당했다고 위에서 얼마나 난리인 줄 알아? 핸드폰도 놓고간데다가 두 시간동안 아무도 널 못찾아가지고 이상한 루머가 돌고 있잖아!"
"윽, 진짜? 왜... 아무도 못찾았을까? 하하하."
"그래!"
괜스레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 진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그러나 며칠 전 반응과는 또 다른게, 이 녀석 아직 할 말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너 진짜 그래서 연극 할 수 있겠어? 그 남성공포증인가 뭔가 하는 병 걸린 후 우주 손잡는것도 엄청 버거워 보이는데!"
"그... 그러게... 본능적으로 자꾸 겁먹어 버리네 나도 모르게..."
나도모르게 또 납치될 당시 생각이 나서 눈물이 눈에 가득 고여버렸다. 한 마디만 더 쓴소리를 들었다가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으아 여기서 울면 안 돼, 참아라 참아 눈물아... 제발!
"젠장, 이래서 너 히로인 하는거 그렇게 반대했던건데..."
"!!"
난 재희의 방금 그 말이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얘가 날 이렇게나 생각해주고 있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우주랑 얘기도 이미 했어, 하지만 반 애들은 모르잖아! 젠장... 가희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윤하만 자꾸 챙긴다고 난리지... 진짜 나보고 어쩌라고!"
그 녀석의 계속되는 말은, 요새 자꾸 틀어지는 가희와의 사이가 어째서 나 때문인지를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확실히, 재희는 여행 다녀오고 나서 문제가 생긴 나를 너무나도 걱정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난 도대체 그런 재희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가 날 생각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잊고 있었던 그에 대한 내 마음이 다시 한 구석에서 밀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완전히 잊은게 아니었어... 빌어먹을 이놈의 미련...! 왜 안 없어지는 거야!!'
정신없이 교실로 뛰어가는 날 재희는 굳이 따라와 붙잡지 않았다.
<9. 미련>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