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나야, 나!!"
겁에 질려 달려오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 나는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 놀랐잖아!!"
너 설마 나랑 집에 같이 가려고 뛰어온 거야? 근데 왜 안도하는 내 표정을 보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거니.
"얌마! 좀만 기다리지 아무도 없는데 이 야밤에 혼자 가냐?"
"에... 글쎄. 너 좀 늦을 거 같아서..."
녀석은 헥헥거리며 주저앉아 내 손목을 잡았다. 혹시라도 또 혼자 가버릴 것 같았는지 못 움직이게 하려는 것 같았다. 역시나 또 내 몸은 반응하지 않고 얌전했다.
난 조심스레 숨을 고르고 있는 재희 옆에 쭈그려 앉아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참을 헉헉거리던 녀석은 간신히 날 일으켜세우며 일어났다.
"너 납치당한 다음부터 정신질환 생겼다면서. 그런 애가 혼자 가냐?!"
"... 미안."
난 배시시 웃으며 뒤통수를 긁젂였다. 그런데 웬걸, 평소처럼 쏘아붙이지 않고 슬며시 사과를 했더니 재희의 반응이 엄청 놀라웠다. 내가 착하게 반응한것에도 놀랐지만 그 반응을 본 재희의 반응 역시 놀라웠다.
"... 알았으면 됐어! 얼른 가자, 괴한이라도 나타나기 전에."
"흐흐. 그래!"
이게 정말 재희가 맞나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편안한 반응에 내 마음도 누그러져, 내 손을 잡아 끄는 재희를 따라가며 실실거리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리가 들어오는 걸 반기셔다. 꽤 늦은 시간인데 둘다 돌아오질 않으니 현관에서 전화기와 문을 계속 번갈아 발아보고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바로 학교 쪽으로 돌아온 재희의 행보가 궁금해져서 물어봤더니, 녀석은 먹던 시리얼을 입에서 뿜어냈고, 난 간발의 차이로 우유와 시리얼이 섞인 혼합물이 내 얼굴을 덮치는 걸 피할 수 있었다. 분명히 가희의 집까지 갔다가 왔다면 아무리 뛰어왔다고 해도 그렇게 빨리 도착할 수 없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캑, 캑캑, 캑!'
"으악! 드럽게 왜 그래?!"
난 벽과 식탁과 바닥에 묻은 건더기들을 근처에 있던 행주로 재빨리 닦아냈다. 엄마가 이걸 보면 놀라 자빠지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습을 다 하고 나니, 재희는 체한게 겨우 풀렸는지 날 퀭한 눈으로 바라보며 힘들게 말하기 시작했다.
"... 너 눈치 좀 빨라졌다?"
내가 원래 아예 눈치가 없었던 건 아니야! 그쪽이 너무 눈치가 빨랐던 것 뿐이지. 그래도 이거 칭찬으로 듣는게 맞겠지? 칭찬일 것이라 생각한 난 바로 썩소를 지어보여주며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뭔일 있었는데, 얘기해봐."
재희는 못내 들킨 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입안 한가득 시리얼을 담아 물고 우물거리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쩝... 그게 말이지... 싸웠어."
"아 그래- 가 아니지 뭐라고?"
멍하니 그릇만 바라보며 숟가락으로 우유를 휘적거리는 재희를 보니 그 말이 거짓말인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왜 또 싸웠담, 간신히 관계가 회복되었나 싶었더니만. 어떻게든 둘의 관계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로선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인걸.
"아니 왜, 왜 싸웠어? 또 뭣 때문에"
"윽... 아 왜! 내가 싸우던 말던 뭔상관이야. 누군 다투고 싶어서 다툰 줄 알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나를 또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재희의 눈이 '너 때문이잖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뭐야, 설마 또 나로 인한 다툼이라고 얘기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분명 가희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있는데 왜 내가 문제가 돼?
"...왜, 또 나때문이라고? 내가 뭘 잘못했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또 저번 이야기의 연속이냐는 의미로 버럭 소리를질렀다. 그러자 이 녀석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의 의미를 표시하는게 아닌가?
"하아... 아니다 말을 말자."
뭔가 말하려다가 다시 삼키는 녀석의 반응이 수상해서 캐묻고 싶어졌지만, 정면으로 들이대면 또 '됐다'하면서 도망가버릴 게 뻔했으므로, 최대한 돌려말하며 이 놈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고 했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이 생겨서는 왜 이렇게 쿨하지 못해? 집착이야, 집착."
어쨌든 나 때문이라니, 녀석이 자꾸 나에게 관심을 갖고 챙기려 하는 통에 벌어진 일인듯 한 예감이 들어, 난 내게 집착하지 말라는 투로 살짝 속을 긁어봤다.
"...뭐야, 이제와서 걱정해주는 척 하지마."
어래? 진짜 나한테 집착하고 있는 거 맞아? 나 그냥 던져본건데?
"나처럼 쿨하에 잊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난 이미 너랑 가희랑 사귄 다음에 네가 그 날 놀이공원에 날 버려두고 갔을 때 널 지운지 오래야. 어때 쿨하지? 너도 이렇게 쿠-울 하게."
"야, 너 그 날 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내가 오래 전 바람맞은 일 얘기를 꺼내들자 여석은 '예상외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쿨하게 잊었다고 해도 그 사건은 나름 큰 충격이었는걸 어떻하겠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인지 잊혀지지도 않네.
재희는 한숨을 푹 쉬더니 그릇에 남아있던 우유를 단숨에 들이켰다. 녀석은 빠른 속도로 설거지를 하더니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이야기했다.
"속 편해서 좋겠다."
"뭐?"
방문 앞에서 난 살짝 돌아본 뒤 다시 고개를 돌리며 녀석은 이 말을 남기면서 방 안으로 사라졌다.
"난 요즘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낸들 무슨 상관...?
*
다음날 밤 싱숭생숭한 기분 탓이었는지, 난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으로 빠져들자마자 뭔가 요상한 느낌이 드는 게 어쩐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긴... 분명 전에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를 만난 장소인데?'
그리고 그 생각 하기가 무섭게 시야로 윤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타나셨다. 저저번 꿈에서 봤던 모습 그댈인 걸 보니 확실히 이전 꿈과 이어지는 내용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 두 분의 표정엔 근심걱정이 가득했고, 불안한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니 윤하야? 다친 데 없어?"
아저씨가 윤하의 볼과 머리 손을 만져보며 말했다. 난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왜 차도로 갑자기 뛰어오고 그래! 엄마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니!"
그리고선 윤하를 꼭 안은 아줌마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윤하는 사고를 당할 뻔 한 충격 때문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윤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저씨는 그녀의 머릴 쓰다듬고, 팔을 주물러주는 등 애를 쓰고 계셨다.
'뭐지? 설마 차사고가 날 뻔한거야 지금?'
대충 상황이 파악된 나는 차도의 한쪽에 스키드마크를 길게 낸 채 서있는 승용차 한 대와 근처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엄마... 엄마 혼자 가면 안돼... 진짜... 나 두고 가지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윤하가 저리 되어버렸는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아마도 저저번 꿈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그 장면 때문에 어린 윤하가 차도로 뛰쳐나간 건 분명했다.
"무슨 소리니 윤하야, 왜그래!"
윤하는 아무리 흔들어도 같은 말만 중얼거릴 뿐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아저씨 아줌마는 윤하를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뒤늦게 사고를 처리하고 달려온 다른 가족들도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윤하의 이상 증세는 좀처럼 복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삼십 분 가량을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나서야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윤하가 빨리 회복하길..."
그러면서 귓속말로 조용히 윤하의 어머니께 속닥이는 아유 씨의 말을 난 미처 듣지 못했다. 분명 윤하가 이런 이상 상태에 빠지게 된 사건과 관련이 있는 얘기일 텐데 들리질 않는다.
"알았어요 아유 씨.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줌마는 곧 윤하를 아저씨에게 업히도록 했다. 윤하는 어느새 중얼거림을 멈추고 아저씨의 등에 업힌 채로 조용히 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내겐 여전히 알 수 없는 암흑일 뿐인 이야기들만 흘러가는 이 꿈이, 갈수록 야속해질 뿐이었다.
"윤하야.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오늘 일은 부디 잊었으면 좋겠어..."
뭘 잊으란 말인가요. 윤하는 도대체 무얼 봤길래 그런 건가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윤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여보?"
"아니야. 아직 이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 슬프게도 내가 윤하에게 가혹한 운명을 쥐어줘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아줌마는 목이 메어졌는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날'이 되기 전까진 모든 걸 숨겨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