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나의 그 한마디로 인해 출발도 못하고 있던 우리의 연극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고, 다음날이 되자 다혜는 정말 1시간 30분 분량의 연극 시나리오를 떡하고 우리 앞에 내놓았다.
"우와... 이걸 진짜 하루만에 다 썼다고? 이걸??"
민혁이는 시나리오를 모두 읽더니 엄청나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 추리에 미친 민혁이 놈이 굉장하다고 할 정도면 정말 엄청난 스토리란 얘기였다. 대작의 탄생을 예고하는 서막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너 다혜라고 했지? 혹시 다른 추리 시나리오라던가 없어? 아님 다른 소설이라도!"
민혁인 다혜의 다른 작품들마저 섭렵할 기세로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다혜도 오랜만에 자신과 통하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이거 말고도 생각해둔 시나리오는 꽤 있다면서 문화제 끝나고 보여주겠다고 했다.
"자자, 그럼 이제 배역을 정해야지. 주인공이란 히로인 배역을 정해야 되는데... 다들 시나리오 한 번씩 다 읽어 봤지? 누가 좋을까? 일단 주인공 '휘츠먼'부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반 아이들의 손가락이 한 쪽으로 몰려갔다. 지명당한 당사자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것 같이 보였으나, 내가 보기에도 이 주인공 역은 이 녀석이 딱이긴 했다.
"저... 나도 나인게 맞는 것 같긴 하니까 손가락 좀 치워줘..."
다행스럽게도 본인이 배역을 맡는 걸 인정해서 그런지 반 아이들은 바로 다음 배역을 정하려 했다. 다음 정할 배역은 연극의 메인 히로인 '레이아'였는데, 미처 지목하자는 말도 하기 전부터 아이들의 시선은 내게 쏠리기 시작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 나는 손을 들어 '잠깐-' 을 외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던 모양이다.
"...하하하... 왜 나야~!!"
허탈한 웃음으로 황당함을 표현하는 나에게 반 아이들은 '너가 딱이다'란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안되는 이유를 둘러대려고 했는데, 어째 반박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잠깐! 안돼! 히로인은 다른사람으로 해!"
"왜? 뭐 문제 있어 재희야? 우리가 보기엔 문제 없는데..."
그래 나도 생각하기에도 단지 하기 싫어서 그럴 뿐이니까... 넌 대체 왜 내가 히로인이 되는 걸 거부하는 거냐?!
"문제 없어. 걍 정한대로 윤하가 여주인공 하면 돼."
그러나 재희의 반박은 여왕님의 등장으로 바로 정리되고 말았다. 난 재희가 왜 그랬는지 생각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여주인공을 떠맡았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내심 내가 여주인공을 안하게 되길 바랬는데 어쨌든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가희가 재희를 몰래 째려보며 인상을 쓰는 통에 어째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가희가 재희의 귀에 대고 뭐라뭐라 말하는 입모양을 보니, 아무래도 재희 녀석 당분간 또 휘둘릴 것 같았다.
''이따 보자'라니... 불쌍한 녀석.'
왜 녀석은 내가 히로인을 하려는 걸 반대했을까. 설마 남자주인공이 우주이기 때문이었나?
*
3일 뒤 8월 31일. 어느덧 축제 준비는 중반에 접어들었고 연극 인원을 제외한 반 아이들 모두가 교실 데코레이션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배우 12명과 선생님은 연극 연습에 한창이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연극에 참여하게 된건, 어제 일어난 해프닝 때문이었다.
나와 다혜와 나연이가 각자 연극에 필요한 소품 한가지씩을 들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장난치며 뛰어가던 옆반의 두 남학생들이 뛰어가다가 내 등을 미는 바람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소품을 계단쪽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떨어지면 바로 깨지는 유리였기 때문에 놓침과 동시에 난 그걸 다시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째 내가 놓친 그 소품은 다시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계단 아래까지 공중제비를 돌아 착지하는게 아닌가. 나와 친구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계단 아래에서 소품을 흔들면서 우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선생님?!"
나중에 내 등을 밀어 사고를 일으킨 남학생이 들고 있었던 휴대폰에 녹화된 동영상을 보고 알았지만, 소품이 날아간 게 아니라 선생님이 날아서 소품을 잡고 한 바퀴 돌아 착지하셨던 것이었다. 그 엄청난 공중제비 동영상은 순식간에 온 학교로 퍼졌고,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운동신경에 반 아이들이 모두 열광했다.
"그런데 그런 실력을 왜 지금까지 숨기고 계셨던 거에요?"
"아니 뭐... 그냥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니깐. 혹시 무술 잘하는 거 알면 사람들이 날 피할까봐서... 나 엄청 부끄럼 타거든."
그러면서 얼굴을 붉히시며 수줍게 웃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웬지 엄청나게 멋있어 보였다. 보통 이럴 땐 귀여워 보여야 정상인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우-와. 선생님 저희 반 연극하는데 같이 하시면 안돼요?"
그런데 갑자기 동영상을 보고 온 다혜가 뜬금없이 연극 참여를 제안했고, 난 왜 그러는지 몰라 그녀에게 되물었다. 다혜는 엄청나게 흥분해서는 연극 대본의 인물들 중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이 인물. 보여? 암살자 역할인데 우리들 중 딱히 할만한 애를 못 정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이거 선생님이 해주시면 엄청 대박일 것 같아!"
워워, 다혜야 진정, 진정하고. 그전에 선생님께서 수락하셔야 네가 원하는 대로 연극을 하던지 말던지 할 거 아냐. 일단 침착하고 차분히 선생님께 부탁해!
"선생님. 꼭 같이 해주셔야 돼요!"
"으왓, 지.. 진짜? 아니 그래도 난 선생님이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상관없어요! 우리 애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직접 가 보시면 바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드실 거에요. 네? 해봐요 선생님~!"
그렇게 다혜를 따라 우리 반에 들르신 선생님은 열심히 하고있는 학생들의 모습에 굉장히 기분이 좋으셨는지 단박에 제안을 수락하셨고, 그렇게 연극 배역은 무사히 전원 모집에 성공했다.
"드디어 3막까지 다 외웠네... 이래가지구 연극 전까지 다 외울 수 있으려나?"
"걱정마. 교실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연극에만 집중해 너는."
슬슬 남은 날짜가 줄어들자 모두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나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령탑 재희가 있었던 덕분인지 힘들거나 막히는 일 크게 없이 무사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약간씩 처지는 분위기에 열심히 하던 친구들도 다들 멍하니 걸터앉거나 드러누워서 쉬고 있는 때가 많았다.
"그나저나 오늘 학생회 회의는 꽤나 늦게까지 하네. 벌써 6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무래도 오늘이 문화제 전 마지막 총회의라서 그런가보지 뭐. 가희도 홍보자료 들고 간 걸 보면 각 학급별로 발표회라도 하는 모양이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희가 교실로 돌아왔고, 재희는 씨익 웃더니 회의 결과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자... 이번 발표회 결과."
잠깐의 뜸을 들이며 우리를 긴장케 하던 재희는 우리들을 한번 쓰윽 둘러보더니 힘차게 외쳤다.
"총 30개 학급 중에서 학년 주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반은, 바로 우리 반!"
"와우!"
모두들 신이 나서 저마다 손뼉을 치고 환호하는데, 재희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 반의 연극 시나리오가... 시놉시스만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총 10개 연극 중 기대 순위... 1위!"
이게 무슨 일이래. 재희가 전해준 이 두가지 소식 덕분에, 다 죽어가던 우리 반의 분위기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냈다. 모두들 신이 나서 재희와 한번씩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다시 원래 일하던 자리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나도 슬금슬금 재희의 앞으로 다가와 녀석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단한데? 안그래도 우리 반 분위기 처지고 있었는데 완전 반등 성공이다."
"어, 그래? 다행이네, 나도 이 얘기 듣고 회의실 안에서 난동부릴 뻔 했다니까. 이대로만 가면 문화제 최고 우수반에게 주는 '문화상'이랑 상금은 우리 차지라구!"
그 말을 하며 활짝 웃는 재희를 보니까 그나마 마음이 좀 놓였다. 며칠 전 가희에게 꽤나 시달렸는지 내내 초췌하던 녀석이 그래도 오늘은 이 소식 덕분인지 좀 기운을 차린 것 같은 모양이다.
"이크, 이따 집에서 얘기하자. 연습하고 있어."
날 보며 실실 웃던 재희는 복도에서 누가 걸어오는 걸 느끼자 당황해서는, 후다닥 자신의 연극 대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누군고 했더니, 발표회 정리로 인해 돌아오는 게 조금 늦은 가희였다. 녀석... 이젠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아네.
"후우~ 힘들었다."
"고생했어 가희야. 엄청 반응 좋았다며?"
가희의 표정도 어제의 냉랭하던 표정은 모두 사라진 듯 했다. 역시 반응이 좋았던 것이 기분을 좋아지게 한 모양인지, 어째 재희와의 트러블도 잊었나보다.
"다행이다. 노력한대로 좋게 되서. 이번 문화제는 여러모도 굉장하네."
"그렇지? 좋았어, 발표회도 끝났으니 다시 부스랑 연극에 집중이닷!"
그렇게 우리들의 연습은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되었고, 가희를 데려다주기위해 먼저 학교를 나선 재희를 빼곤 모두 다같이 뒷정리를 한 후 학교에서 걸어나왔다. 이제 내일이면 9월인데도, 밤늦은 시간 치고 날씨는 무더웠다.
"윤하야. 오늘은 부모님이랑 같이 야식 먹기로 해서 먼저 가볼께. 늦은 시간이라 같이 가봐야 되는데... 미안."
"워어 아냐. 괜찮아, 아직 가로등 불빛이 있다구?"
괜찮은 척 우주를 보내고 나니 어째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시추에이션이 되어버렸는데, 터벅터벅 집으로 가던 난 얼마 안 가 굉장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정신질환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또다시 날 짓눌러 오기 시작했다.
납치 사건 이후 혼자 있으면 조그만 소리에도 엄청나게 반응하는 내 몸 때문에, 누가 옆에서 같이 걸어주지 않으면 밤길이 어찌나 두려운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움 가득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집에 가고 있는데, 멀리서 달려오는 듯 한 사람의 발소리에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야 말았다.
내가 빨라지면 뒤쪽의 발소리도 빨라졌고, 내가 뛰기 시작하니 덩달하 뒤쪽 발소리도 뛰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다다다다닷!]
"히익!!!!"
엄청 가까워진 그 발소리에 놀라 난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