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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59화 (59/188)

59화

그날 저녁 난 재희에게 기억나는대로 주의사항을 얘기해 주었다. 몸이 바뀐 탓에 사라진 기억들로 인해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일단 나머지는 재희의 센스에 맡기기로 했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들키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연구했다. 최대한 여자다움을 연기하되, 재희 때 민혁이에게 했던 장난이나 말투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자기 전 재희에게 여성스러움을 부각시켜주는 이런저런 행동들과, 혹시나 모를 민혁이의 대시에 대비한 연습까지 마치고 나서야 우린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다음 날, 예상했던 대로 장민혁의 등장과 함께 교내 여학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민혁이를 본 반 아이들은 저마다 굉장한 미남이 왔다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는데, 굉장한 파장이었다.

물론 중학교 시절 우리 세명이 함께 다닐 때면 지나갈 때마다 여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 3인방 중 2사람은 이미 미인과 엮였고, 그러다보니 솔로인 민혁이가 주목받게 되는 건 당연했다.

당황스럽게도 교실에 선생님과 함께 등장하자마자, 이 놈은 나만 보이도록 윙크를 날렸다. 전날 그가 당당하게 말했던 나를 소개시켜달라는 말은 허튼 말이 아니었던게 분명하다.

"이름은 장민혁. 온서고등학교에서 왔습니다. 요리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 추리소설 매니아입니다. 물론... 그것보다도 아름다운 레이디들과 함께 하는 걸 더 좋아하지만요 하하."

마지막에 윙크를 찡긋 하며 웃는 녀석을 보고 여자애들이 꺅꺅거리며 폭소를 터트렸다. 남자애들도 재밌는 놈이라며 웃고 있었지만 유독 내 표정만 '내가 못 살아...'였다.

"잘 부탁합니다 여러분-!"

어째 재희도 녀석을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게 엄청 경계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심해 임마,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녀석이라고...

"자 그럼, 전학생도 왔고 2학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오늘은 자리를 옮기고, 학급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자 얘들아~."

선생님의 제안에 모두 환영했다. 다행히 개학 이틀째라 4교시 단축 수업을 했기에 망정이지, 점심시간이라도 끼어있었다면 저렇게 은근슬쩍 추파를 던져대는 민혁이를 점심시간 내내 피해다녀야 했을 지도 모른다.

"모두 불만 없지? 이대로 그럼 중간고사 끝날때까지 않는거다?"

어찌어찌 자리바꾸기가 끝나고 나니, 난 운 좋게도 창가쪽 자리를 갖게 되었다. 기온이 조금씩 떨어지는 가운데 겨울을 맞이하기엔 별로였지만, 답답한 복도쪽보다야 훨씬 좋다. 옆자리에 않아있는 사람이 재희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윽 젠장. 하필이면 왜 너야? 가희가 앉아야 되는데."

물론 민혁이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렇게 됬다면 내가 민혁이 추파에 못이겨 전학가버렸을지도.

가희도 재희의 분단 건너 옆이었기 때문인지 녀석은 내가 자기 짝이 된 것에 크게 불만을 갖진 않았다. 가장 우려했던 민혁이는 나연이와 짝이 되어 내 뒤로 두번째에 앉게 되었고, 우주는 내 앞, 은주는 가희 앞, 다혜는 내 뒤에 앉게 됐다.

그런데 민혁이만 생각하던 나는, 곧 다가올 커다란 행사가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큰 행사를 걱정하는 이유는 당연히 내 짝이 되신 이 분 때문이었고, 내가 잠깐 한눈만 팔았다 하면 나를 지멋대로 노동력으로 사용하느-

"자 그럼 올해 우리 반 문화제 추진 위원으로 이 다섯 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박수~"

"-으으엥?!"

아뿔싸, 잠깐 정신 판 사이 학급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은 다름아닌 곧 다가올 문화제 추진 위원이었다! 난 눈 깜짝할 사이에 재희에 의해 손이 들려 위원으로 선출되어 버렸고, 거기에 우주 가희 민혁이까지 합세한 총 다섯 명이 된 것. 억지로 선출된 꼴이 되버리자 난 극구 거부했지만, 반 아이들은 날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눈 뜨고 코 베인 나는 '총무'라는 직책에 떡하니 앉혀졌다.

"그럼 '위원장' 재희를 필두로, 총무는 윤하, 세트팀장 우주, 홍보팀장 가희, 판매팀장은 민혁이로 결정되었습니다."

한바탕 박수갈채가 지나고 나서 내가 어느정도 상황파악을 해 가려는 찰나에, 선생님께서 또다시 큰 떡밥을 재희를 향해 던지셨다.

"참, 그러고보니 학년 대표로 연극할 팀을 구하던데 너희들 혹시 우리반을 대표로 나가볼 사람 없니?"

"하겠슴다!!"

재희 녀석의 손을 고정시키려고 발버둥쳤지만 이 자식 뭐 이렇게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들어버린 재희는 막중한 책무를 또하나 맡아 버리고야 말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재희는 나의 방어선을 무자비하게 무너트려버렸다.

"어째서... 어째서어어..."

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가희가 날 다독거리면서 위로해줬다. 하교길인데도 전혀 신나지가 않았다.

"윤하야 기운내... 그래도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잘 해보자."

나란 사람은 원체 나서는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희같은 녀석과는 이런 부분에서 상극을 이룰 수 밖에 없다. 난 뭐든 나서서 안 하려 하고, 얘는 뭐든지 자기가 안 하면 안 될 것처럼 나서고...

"그런 일이 있었단 말야?"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해 줬지. '이런 식으로 싫다는데 자꾸 날 귀찮게 하지 마. 너랑 사귀느니 차라리 여장한 재희 사귀겠어.'라고 말야."

"헐... 대박. 그건 좀 심한데?"

'여장한 재희'라는 말에 난 뜨끔해서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세 남자를 힐끗 봤다. 마치 진짜 나처럼 민혁이와 우주 사이에서 호탕하게 웃고있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울적한게 옛날 생가깅 났다.

'히잉... 내가 이 상태만 아니었어도 저 자리엔 내가 있었을텐데...'

어째 재희는 걱정을 괜히 했다 싶을 정도로 나인 척 하며 민혁이와 굉장히 잘 어울려 놀았다. '얘 알고보니 꽤 재밌는 앤데?'라고 나한테 말까지 했으니, 결국 나만 조심하면 된다는 얘기를 돌려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안그래도 시끄럽던 재희가 친구 때문에 더 시끄러워졌네..."

"하하하..."

가희의 걱정스런 말에 난 허탈하게 웃으며 표정이 굳어짐을 느꼈다. 그래도 어제 우주와 무슨 얘길 했는지 민혁이는 아침 윙크 이후 나에게 들이대지는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거란 생각이 마구 들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는 생각에 일단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자리 바꾸고 나서 처음 만난 척 하며 악수할 때의 그 능글맞은 표정을 생각하니 공포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공포증 때문에 악수 하는내내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다행히 민혁이에 대한 걱정도 어느정도는 사라지게 되서인지, 그나마 집에선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진정이 된 내가 단박에 재희 방으로 달려가니, 이 녀석은 컴퓨터 앞에 앉아 메신저 대화를 하며 히히덕거리고있었다. 이 나쁜 자식, 오늘 날 혼이 빠지게 해 놓고 넌 웃으며 놀고 있다 이거지?!

"어? 아 윤하야 일루 와바. 지금 다혜랑 연극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좋은 생각 없어?"

그러나 내가 복수를 위한 얼음 지뢰를 등에 심으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재희는 날 불러세우더니 내 손을 잡아서 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얼떨결에 녀석의 침대 위에 앉게 된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멀뚱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또다. 유일하게 재희한테만 반응을 안해.'

또다시 재희에게 반응하지 않은 내 몸 때문에 놀란 나는 메신저로 대화하고 있는 내용을 보고 한번 더 놀랐다. 재희가 한번 채팅 할 때마다 턱을 괴고 펜을 핑그르르 돌리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의견을 내놓는 신중함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서 묻어나오는 진지함 때문인지, 녀석의 '일단 하고본다!'라는 성격에 어느정도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졌다.

"저... 좀 도와줄까?"

"엉? 도와주고 있는 거 아니었어?"

... 확실히 이 녀석은 제멋대로에 늘 자기중심적이라니까. 지멋대로 나를 아군에다가 편입시켜뒀잖아?

뭐 그래도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대단한 녀석, 너가 멋있어 보이긴 또 처음이다 한재희.

"일단 애들 모아서 메신저 상으로 상의해볼래? 다는 못 와도 사람이 많으면 좋은 생각이 많이 나올 거 아냐."

"오, 좋은 생각인데 그거? 너도 방에서 빨리 접속해, 내가 사람 모으고 있을 테니까."

"응."

난 내 방으로 랄랄라 달려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고보니 반 아이들을 이렇게 메신저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그런지 굉장히 긴장됐다.

[한재희 님이 대화에 초대하셨습니다]

"예스~!"

과연 한재희라는 선장이 이끄는 우리의 문화제가 어떻게 항해해 나갈지, 점점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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