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어 이미 준비도 다 마쳤어. 8월 24일이야. 그래서 지금 학교 가는 길 탐방 중이었지."
"넌 온다면서 우리한테 말도 안하고 뭐야 바로 내일이야?! 빨리도 준비했네, 재희도 만났어 너?"
난 재희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대화를 도청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둘은 오랜만의 재회라 그런지 내가 사라진 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직. 뭐 어짜피 내일 볼 건데 굳이 급할 거 없잖아? 재희라면 여전히 오는여자 다 싫다고 거절하고 있으려나, 잘 지내고 있지?"
우주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몇 초간 대답이 없던 우주는 뭔가가 생각하고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 뭐... 잘 지내고 있긴 한데. 예전이랑 좀 달라졌지."
"뭔데? 뭔일 있어?"
난 다음에 나올 우주의 말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 말을 들은 민혁이의 반응을 듣자마자 또한번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큰일났는데.
"재희 여자친구 생겼어. 그것도 엄청 미인에 글래머인 애."
"뭐?! 그 한재희가? 설마 다른 사람인 건 아니지? 중학교때 내 친구 한재희 맞지?"
"그럼. 나도 처음엔 얼마나 놀랐다구. 근데 확실히 고등학교 오면서 애가 좀 변하긴 했어."
민혁이는 손을 턱에 괴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곧 뭔가 이해라도 한 듯 계속 이야기했다.
"하긴, 졸업여행 갔다온 뒤로부턴 좀 더 남자다워지긴 했지."
큭... 저 말을 들으니 원래 몸 주인인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장민혁 이 자식아 그럼 윤하가 나보다 더 남자답다는 소리냐? 너 나중에 보자 아주 죽었어.
"그건 그렇고, 아까 걔 누구야? 너가 인사했던 여자애."
"누구? 아 설마 윤하 말하는건가? ...어라, 얘 어디갔지."
우주는 이제서야 내가 옆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우주를 보고 있자니 나도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확실히 저녀석 여행 때까지 센스있던 모습은 또 사라졌어.'
내 이름을 불러대며 주변을 서성이는 우주를 보며 민혁이가 키득거렸다. 아마도 이 놈은 내가 몰래 근처에 숨어 있는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야야, 걔 갔어. 윤하라고 했나? 일으켜줬더니 화들짝 놀라더라? 그리곤 우리 얘기하는 사이에 저 쪽으로 몰래 가던데."
"그래? ... 어느새 가버렸담."
"쟤구만? 니가 관심있는 애가."
혹시나 이쪽으로 오진 않을까 걱정이 되서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게 만발의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다.
"뭐? 아- 아냐! 윤하는 그냥 친구일 뿐이고-"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우주의 반박하는 말을 듣고 나더니 민혁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헐 저 눈빛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텐데.
"나 쟤 관심 있는데 좀 도와주라 그럼."
오 마이갓. 장민혁 이 자식이 날 타깃으로 찍어버렸잖아?! 하필이면 내가 이 녀석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예상했던 시나리오 중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냐고오-!
'안그래도 남성공포증 비슷하게 생겨버렸는데 내가 너한테 넘어가면 장을 지진다.'
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유일한 사람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찾아가면 어떻게든 내 자신을 숙이고 낮춰서 대해야만 마음을 열고 내게 진정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어줄 사람 한재희에게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듣기로 한 나는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이 '한 마디만...'이라는 생각 떄문에 우주의 속마음마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지만...
"글쎄.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걸... 네가 중학교때 만났던 애들과는 뭔가 특별하게 다를 거야."
"뭐? 어떻게 다른데. 좀전에 보니까 다짜고짜 손 쳐내는게 좀 성깔 있어 보이긴 하더라."
그 말을 끝으로 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앞으로 우주가 나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으며 민혁이를 만류할 게 뻔했지 때문이었다. 젠장 괜히 한 마디 더 들으려 했나... 우주 녀석, 내가 확실히 거절했지만 아직 포기 못했잖아.
*
집에 도착하니 신기하게도 학교에서 먼저 나온 나보다 재희가 먼저 와 있었다.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가기라도 한 듯 어질러져있는 신발을 본 난, 피식 웃으며 신발을 정리하고 슬그머니 거실로 향했다.
우리 집 현관문이 전자잠금장치로 되어있어서 문이 열릴 때 재희가 눈치 챘겠지만, 난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서 편히 걸을 수가 없었다. 까치발로 살금살금 거실을 통과한 나는 재희 방의 문이 열려있는 걸 보고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후딱 지나가야지, 또 딴지걸기 전에.'
발은 여전히 까치발인 채로 재빠르게 문 앞을 통과한 나는 내 방의 문을 닫은 채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맨날 오는 한재흰데 오늘따라 낮의 일 때문인지 마주보기가 엄청나게 껄끄럽다. 재희는 누구랑 메신저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는지, 키보드 소리만 자각자각 들릴 뿐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했다.
아직 여름 더위에 푹푹 찌는 날씨로 인해 땀으로 젖어든 교복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고 얼른 반팔 티와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은 나는 속옷이 굉장히 걸리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아우, 땀띠나겠네. 여름이라서 엄청 불편하잖아...'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묶어 올리며 거울을 본 나는 지금 내 모습이 은근히 섹시하게 느껴짐을 깨달았다. 여자인 내가 봐도 이 정돈데, 재희가 보면 어떨런지 약간 걱정이 됐다. 전과가 있는 놈이라 함부러 맨살을 드러내면 안될것 같긴 했지만...
'설마 생각이 있는 놈인데 나쁜짓은 안하겠지? 맨날 봤기도 하고...'
난 교복 상하의를 빨래 바구니에 넣어놓은 뒤 냉장고에서 딸기 우유를 꺼내 들고 재희 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까칠한 상태일 것 같아서 어떻게 대응할 지는 이미 생각해 뒀다. 재희가 딴 소리 안하길 빌며, 난 조심스레 녀석의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니나다를까, 발 하나를 방에 넣자마자 재희가 내게 고개를 홱 돌리고는 '뭐야?!'란 듯한 표정으로 날 째려보는게 아닌가. 그런데 이 녀석 이내 시선이 가슴과 다리쪽으로 향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해 댔다. 오, 옳거니 지금이 기회다!
"저.. 재희야. 아까 낮에 일은 진짜 미안한데, 우리 얘기 좀 하자."
헛기침을 하던 재희는 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더니 다시 날 보고는,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무슨 얘기? 얘기하다가 또 아까처럼 대판 싸우게?"
아우~!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참는다. 확실히 오늘 싸운 여파가 크긴 큰건지 어제랑 태도가 너무 다르잖아 너!
"아니... 그, 진짜 얘기해 줄게 있어서 그래."
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뭔데 그래. 오늘 아침이랑 낮에 있었던 일 얘기하려는 거면 그냥 가라."
다행히도 그 얘긴 아니다만, 아마 들으면 깜짝 놀랄 걸 너. 아니다... 너가 얘를 모르니 그렇게 크게 놀라지도 않겠구나.
"그거 아냐. 진짜 중요한 얘기란 말야. 좀 들어줘!"
내가 앙탈을 부리자 재희는 마음이 좀 누그러졌는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표정도 그나마 조금은 편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대답이 압권이었다.
"뭔데 그래? 그리고 신경쓰이니까 앙탈 좀 부리지 마!"
젠장... 나한테 저런 모습 보이는 녀석을 보니 확실히 내가 여자답긴 한가보다... 너만은 제발 내 여자다움에 반해서 그런 표정과 말좀 삼가주면 안되겠냐.
난 허탈하게 웃은 뒤 난 민혁이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약 10분에 걸친 상세하고도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고, 난 이놈의 '여자 후리는' 성격을 아주 집중적으로 재희에게 주입시켰다. 어째 친구놈 단점을 마구 후벼파는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나와 재희의 위기상황인데.
재희는 집중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상을 쓰다가, 키득거리다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뭔가 민혁이에 대한 이미지가 확립되었는지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얘 때문에 우리가 서로 바뀐게 들통날 수도 있다 이거지?"
"응 바로 그거야. 그게 제일 걱정되는거야."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어째 재희는 그것 외에도 다른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2분정도 녀석을 지켜보고 있자니, 다시 말을 해 왔다.
"그럼 앞으로 완벽하게 널 연기해야 하는건가. 행여 말실수라도 했다간 바로 들킬테니."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그거야!'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역시 재희는 알아듣는 속도가 빨라서 설명하는 나에게 믿음을 주는 녀석이었다. 다만 너무 자주 다퉈서 문제일 뿐.
"너도 말야, 지금도 충분히 귀엽고 여성스럽긴 한데..."
뭐라고 했니 방금. 나 귀여워? 여성스러워?
"아직 예전 습관들이 남아서 좀 위험해. 게임 많이 한다던지 만화책도 '투피스'같은 소년만화만 보고 말야. 좀더 여자로써의 수양을 쌓아, 난 얼마나 멋있어졌는데, 봐 무려 8달 가까이 단련한 내 팔, 가슴, 어깨, 등!"
아... 내 팔이 어쩌다가 저렇게 우람하며 변해버린거야! 한재희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몸을 다른 사람으로 개조시키...가 아니지 지금 이걸 걱정할 때가 아니고, 야임마 내가 어딜봐서 귀엽고 여성스럽다는거야?!
"야 잠깐... 내가 귀엽다고? 여자같아?"
내가 제발 그 말이 거짓이길 바라며 되묻자, 재희는 뭘 새삼 물어보냐면서 추가적으로 붙여주지 않아도 될 첨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뭐 처음 바뀌고 난 후에 비하면 많이... 지금은 뭐 그냥 약간 좀 남자 같은 취향을 가진 아리따운 소녀? 아 그러고보니, 그 민혁이란 놈이 너한테 찝적거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겠다. 너... 그때 납치 사건 때문에 아직 남자들 몸에 닿기만 해도 끔찍하다며. 이참에 호신 무술이라도 가르쳐 주랴?"
아까 앙탈 부리지 말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그나마 여행갔을 때 내가 얼마나 여자 다 됬는지 스스로 인정했는데, 최근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나버렸다.
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또 앙탈을 부렸다.
"아... 그런거 걱정 안해도 된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