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그날 오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주가 늦잠을 자는 통에 난 재희와 함께 등교하게 되었고, 가희를 만나기 직전까지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 곳만 바라보며 걸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재희를 볼 수가 없어...'
난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재희는 그런 내 행동에 크게 반응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면 그는 놀라서 먼 곳을 보았고, 행여라도 어색한 상황에 놓이게 될 까봐 단 1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해다.
"... 둘이 싸웠어? 왜 그렇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와."
가희의 그 말을 듣고서야 난 재희와 엄청 멀리 떨어져 걷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나 가희가 이상하게 여길까 싶어 난 바로 재희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응? 아, 아니야. 잠깐 딴 생각좀 하다가... 재희야 이따가 나 수정펜좀 빌려주라. 나 다쓰고나서 사야되는데 깜빡했네."
그러나 내 임기응변에 당연히 받아쳐 줄 것이라 생각했던 재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어정쩡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의 냉철한 그였다면 당연하단 듯이 '어, 그래 맘대로 해.'라고 받아쳤을 터인데.
"어? 어. 어, 어어... 그래 써. 써."
이렇게 우물쭈물 하며 황급히 뛰어가버리는게 아닌가! 이러면 가희가 100%의심할 텐데, 얘가 나중에 뒷수습 어떻게 하려고 이런담?
"... 쟤 왜 저러지. 진짜 아무 일 없었지?"
"어, 아무일도."
미안 가희야 거짓말 하는거 정말 미안하지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간 재희가 탈탈 털릴 것 같아서 말 못하겠어. 솔직히 내 잘못이기도 하고 말이지... 재희는 그저 갑작스럽게 나한테 포옹당했을 뿐이니까.
물론 이 분위기는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난 가희는 물론이고 우주와도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다. 이쯤 되니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게 내 탓이다 싶어 슬슬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어떻게는 녀석과의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점심시간에 녀석을 옥상으로 불러냈다.
"왜?"
그런에 옥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묻는 녀석의 태도가 참 언짢아보였다. 잠깐, 너가 이렇게 나오면 기껏 사과하려고 멘트까지 준비해 온 나는 뭐가 되냐 응?
"아니, 그 아침에 있었던 일 미안-"
그래도 일단은 사과해야겠다 싶어 말을 꺼내는데, 재희는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내게 달려와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버리는 게 아닌가! 야, 야야! 왜 갑자기 그래?!
"야, 그 얘긴 왜 하고 그래?! 가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녀석은 당황해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자기 손을 치웠다. 사과하려던 나는 결국 가희만 신경쓰는 녀석 때문에 사과는 커녕 쓴소리만 가득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여행 갔다오고 나서 이런저런 문제들로 다시 원만한 관계로 돌아오나 했더니만 결국 이렇게 티격태격대는게 정상적인 우리 사이인건지... 나로선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 말은 좀 억지스러웠으나, 난 신경쓰지 않고 일부러 더 몰아부쳤다. 그런데 내가 왜 쓴소리를 하고있는건지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나 뭐 때문에 얘한테 화 내고 있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난 입을 다물었다.
왜였을까, 내가 재희랑 마찰만 생기면 이렇게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의해 부추겨지듯이 난 자연스럽게 화를 냈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마음은 불편해지고 답답해져만 갔다.
"넌 어떻게 저번에는 좀 잘 들어주는 것 같더니만 또 이렇게 까칠하냐?"
"아니 그건 내 원래 성격이라 미안한 건 알겠는데... 고치려고 노력도 많이 해 봤지만 안되는걸 어떻해?"
그래 노력하고 있는 거 내가 모를리가 있겠냐. 그런데 나도 이상하게 너만 보면 좋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나도 굉장히 노력하는 중인데.
"그럼 말을 끝까지 듣기라도 해!"
왜지? 왜 난 너에게 따뜻하게 대할 수가 없는걸까? 분명 널 내 첫사랑이라 믿고 있고, 어렸을 때부터 너만을 좋아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너에겐 갈수록 차가워지는걸까? 제발 대답해줘 재희야, 어째서 우리가 자꾸만 어긋나려 하는지...
"하아.. 됐다. 오늘 아침에 있던 일 때문이라면 됬어, 굳이 말 안해도 잊어버릴 테니까 자꾸 상기시키지 앟아도 된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면 나 간다?"
그리고 내가 까칠해지면 까칠해 질 수록 녀석의 반응도 자꾸만 차가워졌기 때문에, 난 갈수록 주체가 안되는 이 감정들을 절제해야만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희와는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렇게 나 때문에 싸우다간 조만간 남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휑하니 떠나버린 녀석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마구마구 밀려오는 잡념들로 인해 난 밥맛이 뚝 떨어져버렸다. 결국 점심을 입에 대지 못한 난 배가 고픈 나머지 오후 수업 내내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
여튼 다시 원래의 하굣길로 돌아와서, 난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였다. 젠장, 이상하게 여행 다녀온 뒤로 왜 이렇게 재희랑 다투고 나기만 하면 정신을 못 차리겠는거지?
"아... 두통."
난 아픈 머리를 꾹꾹 누르며 터벅터벅 걸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오늘 낮의 내 분노의 원인을 생각하다 보니 앞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도 모르고 걷고 있었다.
[쿵]
"이크."
"꺅!"
생각없이 걷다보니 앞에서 마주오던 사람과 부딪쳤고, 그대로 난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저앉아서 신음소리를 내며 앞쪽을 보는데, 뭔가 굉장히 익숙한 면상이 먼저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아 날 일으켜주는게 아닌가?
'히...히윽!'
큭 근데 젠장, 남자였어! 최근들어 더 심해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인해 난 그가 몸을 일으켜주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쳐냈다. 남자랑 닿기만 해도 공포심이 몰려오는 이 정신질환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아, 아녜요."
손을 화들짝 놀라 쳐낸 것에 사과하고 나니 날 일으켜준 사람이 너스레를 떨었다. 제대로 일어나서 녀석을 다시 봤는데 분명히 아까 본 그 면상이 분명했다.
네녀석이 우째 여기있는거야?! 두번 세번 눈을 부비고 다시 앞을 봤지만, 이 녀석은 틀림없는 내가 알고있는 그 자식이 분명했다.
"윤하야 같이 가자니까! -엉?"
게다가 멀찌감치에서 뒤늦게 날 쫓아온 우주가 달려오다가 이 사람을 보면서 흠칫 하는것으로 보아 확실해졌다. 이 사람은 분명 장민혁... 그 자식이 분명하다.
"야?! 넌 여긴 어쩐일로 왔어?"
"오~ 우주! 못본 사이에 진짜 얼굴 좋아졌는데? 여자라도 생긴 거야?"
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여자라니, 설마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난 민혁이가 우주에게 다가가 반가워서 포옹을 하는 걸 보고는 놀라서 그가 걸어온 방향 쪽으로 재빨리 도망가 근처에 몸을 숨겼다.
"무, 무슨 아니야! 그냥 요새 관리 좀 했을 뿐이지..."
"말주변도 꽤 늘었네. 당장 여자가 있는건 아닌데 신경 쓰이는 애가 있나보구만?"
난데없는 장민혁의 등장에 난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근처에 숨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야만 했다. 우주와 대화하느라고 녀석은 내게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말도안돼. 온서고로 갔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 있는거야 이자식이?'
내가 이 장민혁이라는 녀석을 알고 있는 건, 이 녀석이 재희였을 때의 베스트 프렌드 3인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초장에 설명하기도 했고...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던 우주와 동급인 내 불알 친구다.
게다가 이 자식은 그 세명 중에서도 내가 윤하가 된 후 저-얼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순위 1위였기 때문에 난 더더욱 이놈을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래도? 내가 좀 달라졌기로서니... 너야말로 어쩐일이야."
키는 170센티를 약간 웃도는 정도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여자를 홀리는 기술과 타고난 작업기질로 인해 나에게 여자를 엄청 잘 꼬시는 놈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놈이었다. 늘 여자를 거절했던 나와는 정반대로 이놈은 출중한 외모로 수많은 여자들을 호령했던 문어발 종결자에다가, 귀신같이 여자의 마음을 읽는 눈치 9단이었으며, 엄청난 추리력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명탐정으로 인정받은 두뇌회전력까지 갖춘 굉장한 녀석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녀석은 지금 여자가 되어있는 내겐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였다.
"아, 그러고보니 내가 니들한테 얘길 안했네."
그리고 다음으로 민혁이가 한 말은 겨우 추스린 내 마음에 핵 폭탄을 투하해 버렸다.
"나 영운고로 전학 간다. 온서고 애들 나랑 안 맞아서 짜증나서 도저히 못 다니겠어. 이렇게 재미없을 바엔 차라리 재희랑 너랑 같이 학교다니는게 훨씬 낫지."
"뭐? 전학?"
우주는 엄청 놀란 듯 했다. 숨어있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만 안했지 만약 소리라도 질렀다면 아마 내가 훨씬 더 많이 놀랐을거다. 난 하마터면 눈까지 튀어나올 뻔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