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9. 미련>
"윤하야, 윤하야?"
"어, 엉?"
난 가희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이미 수업은 다 끝난 지 오래였고, 모두들 집으로 가기 위해 가방을 싸고 있었다. 난 재빠르게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들을 가방과 책상에 쑤셔넣은 뒤 벌떡 일어났다. 나의 얼빠진 행동에 가희는 괜찮냐는 듯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야... 서윤하 정신 좀 차려! 집에 안가?"
그러나 정신 차리라고 나에게 말하는 재희의 목소릴 들으니 오히려 더욱 진정이 안 됬다. 아침이랑 낮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거람?
"뭐가! 나 멀쩡하거든?!"
씩씩거리며 재희를 가볍게 밀치고 교실 밖으로 나온 난 교실 안에서 들려오는 재희와 가희의 대화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엿듣는게 되어버렸다.
"윤하 왜 저래? 아까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었는데? 나도 모르겠어. 쟤 그날인가?"
아무 일 없었다고? 그래 가희한테는 아무 일 없었던 척 하는게 옳긴 하다. 괜히 얘기 꺼냈다가 또 무슨 대폭발 사건을 만들어내려고.
그나저나, 내가 재희에게 오늘 이렇게 유난히 까칠한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아 재희 저 멍청이가 말한대로 생리도 절대 아니었다.
*
시간을 돌려 오늘 새벽으로 가보자면, 난 또 꿈을 꾸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의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를 본 꿈을 꾼지 정확히 열흘 만이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난 이 기억같은 꿈들이 뭔가 규칙적으로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정확히 열흘 간격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저번에 여행중 버스에서 꿈 꾼게 3일, 여행 갔다와서 바로 다음날인 13일에도 꾸었고, 오늘 꾼 것까지 치면 3연속이다. 아니지? 그 이전에도 간격을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꿈들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은 꿈을 지속적으로 꿔 온 거지?
"...엄마?"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 꾼 꿈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지난 꿈들과는 다르게 환상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마치 구름 위를 뛰어다니는 것 같이 연기가 자욱한 언덕을 뛰어다니고 있는 윤하를 보고 있자니, 어째 진짜 꿈 같아서 더욱 안심이 되었다.
"엄마!!"
어째 윤하는 마치 산 속에 구름이 걸린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의 언덕에서 구름을 헤치고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애타게 아주머니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이 꿈의 시점이 언제쯤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윤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언제인지 바로 느낌이 왔다. 이건 분명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다.
"-하야..."
"엄마? 거기 있어?"
작은 소리로 윤하를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릴 들었는지 윤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짧은 다리를 재빨리 놀려 구름을 헤쳐 나갔다.
"윤하야... 이리 오렴."
"엄마!!"
잠시 후 펼쳐진 광경에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열흘 전 꿈에서 보았던 윤하네 아주머니가 금방이라도 살아 올 것만 같은 모습으로 구름 속 초원의 큰 바위 위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열흘 전과는 또다른 이미지였는데, 하늘거리는 새하얀 드레스에 물결진 갈색 긴 머리칼을 가진 마치 여신같은 이미지의 아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자꾸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지? 누군가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봐도 쉽게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서, 난 빠르게 포기하고 꿈에 집중하기로 했다. 또 저번 꿈처럼 중요한 장면에서 튕겨져 나올 순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엄마, 엄마... 진짜 보고 싶었어. 다신 안 돌아올 줄 알았어..."
어린 윤하는 아주머니께 굉장한 속도로 달려가더니 폴짝 뒤어 가슴에 푹 하고 파묻혔다. 어찌나 그리움이 컸는지 윤하는 아주머니의 가슴께에 얼굴을 부벼댔고, 그러면서 또 눈물을 얼마나 흘리는 건지 아주머니의 옷이 축축히 젖어들 정도였다.
"윤하야... 실은 할 말이 있단다..."
"응? 무흔 말?"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시던 아주머니는 하늘 한 번, 땅 한 번, 윤하 한번을 보시고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슬픈 표정만 봐도 윤하에게 들이닥칠 후폭풍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엄만.. 이제 가야해. 이미 죽은 지 49일이나 지났는걸? 오늘이 널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란 얘기야 이해하니?"
"왜?! 왜 가야되는데!! 가지마! 가면 영영 못 보는거잖아!!"
"응. 그렇지. 그런데 이젠 어쩔 수 없단다. '그 분'이 엄말 부르고 있어서 가 봐야 해... 그렇지 않으면 더 슬픈 일이 벌어져 버릴거야."
'그 분'? 더 슬픈 일이 일어난다구...?
"알게 뭐야.. 난 엄마만 있으면 돼, 진짜야 엄마!! 엄마만... 엄마만 있으면 된단 말야... 흐아앙!!"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엄마의 옷이 찢어지도록 잡아당기는 윤하와, 그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강한 슬픔을 참아내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 버렸다.
"정말 미안하구나 윤하야. 하지만 이게 다 윤하 널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단다. 널 위해서...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눈물짓기 시작한 아주머니는 갑자기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하는 그녀에게 감고 있는 팔을 풀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왜... 왜..."
난 아무 생각도 못한 채 아주머니의 입모양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그맣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 때문이었고, 무엇을 말학 있는 것인지 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윤하는 그걸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윤하는 그 말 한마디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주머닐 바라봤고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울음을 뚝 그쳐버렸다.
'더 슬픈 일... 윤하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무슨 말을 하신건지 좀처럼 예상이 되지 않았고, 점점 윤하의 손을 벗어나 하늘로 떠오르고 계신 아주머니는 서글픈 표정으로 그저 윤하만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말이었기에 저 두 사람이... 절대로 떨어질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헤어짐을 결심한 것인지 내 기억만으로는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알았어... 엄마."
"..."
아주머니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윤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빛 사이로 사라져가는 아주머니를 보며 윤하는 끝끝내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엉아! 꼭, 행옥애야애!!!"
얼마 후 아주머니는 구름 사이로 사라지셨고, 윤하는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녀 따라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구름들은 온데간데 없었고, 남은 것은 온통 시커먼 어둠 뿐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는데 윤하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왔다.
"윤하야, 괜찮아?! 야! 말좀 해봐!"
뭉그러진 시야에서 점점 또렷해지는 모습은... 다름 아닌 어린 나였다. 엄청나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엄청 가까운 거리에서 윤하를 보고 있는 날 보니까 문득 몇달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하아... 하아..."
윤하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 보더니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가는 나는, 며칠 전 내가 꿈을 꾸고 나서 몸살에 걸렸을 때 간호해주던 재희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뜨거워... 너 괜찮아?"
내가 윤하를 간호한 적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서로 굉장히 싸늘했던 그 때 나를 간호해 줬던 건 이때 기억이 나서 그랬던 걸까? 분명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긴 하지만 우연이라고만 보기엔 뭔가 마음에 걸린다. 어째서 윤하와 몸이 바뀔 때 내 기억마저 모조리 날아가 버린 것인지... 진짜 기억만 났었어도...
"고마워... 나 좀만 자도 돼...?"
너무 심한 열과 몸살 기운에 몸도 잘 가누지 못하던 윤하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새근새근 잠들어 버렸고, 난 개의치 않고 물수건을 적셔오고, 온도를 재고... 재빨리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왜였을까,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애끓는 감정이 마구마구 부풀어올랐다. 거부하려 해도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그 미련같은 것은 일방적으로 한 사람을 향해서 날 이끌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왜 녀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지 알 길이 없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윤하야. 맘놓고 편하게 쉬어-!!"
그 결정타나 마찬가지인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꿈은 끝나버렸다. 허나 어째서였을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어린 윤하에게 빙의된 것 마냥 내 옆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재희를 꼭 껴안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 또 다른 꿈을 꾸고, 그 상태에서 꿈에서 다시 깨어 현실로 와버린 나는 몽롱한 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 했고, 결국 재희를 안은 채로 몇 분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재희는 그런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비단 잠기운으로 인해서만 재희를 안고 있던게 아니었던 난, 역시 아무 말 없이 미련을 마음 속으로 이야기하며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14.07.10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