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하아! 그래도 모르겠네 젠장. 1년간 일본에 간다고 했었을 때 의심해 봤어야 하는건데. 이번 여행에 내가 따라갔었으면 아빨 잡을 수도 있었을 거 아냐!... 아오 아까워라."
재희는 분통을 터트리며 궁시렁댔다. 마지막 단서나 다름없는 아저씨를 놓친 것이 안타까웠는지 연신 주먹으로 콩콩 책상을 쳐 댔다.
"아... 그 글구 얘기할 거 하나 더 있는데."
난 숨겨왔던 납치 사건을 얘기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냈다. 재희가 어떻게 난폭하게 변할지 몰라 두려웠지만 내 정신상태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게 나한테 편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아니나다를까, 재희는 당장에 그 납치범들을 세상에서 소멸시켜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워댔다. 내가 힘겹게 허리를 붙잡고 말린 덕분에 녀석은 약 오분만에 분노 상태를 해제했다.
"와. 진짜 빡치네. 야 너 우주한테 고맙다고 했어?"
"어, 응... 당연히 했지. 우주 덕분에 살았는걸."
"우주 걔 분명 너 가고 나서 택시 타고 쫓아왔던 게 분명하네. 너가 진짜 친구 하난 잘 뒀다."
재희는 씩씩거리면서도 혹시 내 몸에 무슨 일 있던거 아니냐며 추궁했지만 난 절대로 아무 일 없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어... 그래 가슴 노출... 그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어쩐지 공항에서 보자마자 왜 그렇게 둘다 만신창인가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니."
"하하... 진짜 무서워 죽는줄 알았어 나도... 다시 생각하기 싫다..."
내가 또 그 일이 떠올라서 몸서리를 치자 녀석은 갑자기 날 꽉 껴안았다. 윽! 야 너 그러면 나 정신장애가 또 터진다...고...?
"바보야, 그러니까 항상 조심하라고 했잖아! 여자 몸이니까 조심하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이젠 좀 알겠어? 내 몸 조심히 간수해 앞으로 알았지?"
뭐야. 어?? 어어???... 어 그러고보니 아까 재희 길길이 날뛸때 말릴 때도 손 댔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어? 지금 얘가 날 안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잠깐만, 수첩에다 적어놔야지. 까먹을라."
재희는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으로 잠깐 사라진 녀석은 수첩을 하나 들고 오더니 분석한 내용을 휘갈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상해. 왜 재희는 몸에 닿아도 아무 느낌 없는거지..? 설마 내 몸이라서 그런건가?'
녀석의 행동에도 아무 반응 없는 내 몸을 더듬거리며 난 혼란에 빠졌다. 분명 우주나 다른 남자들이 손대면 미친듯 반응하던 몸이 재희에게만은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걸 도대체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야 너도 빨리 적어놔. 까먹기전에!"
난 재희의 일갈에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최대한 적어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숄더백에서 펜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숄더백을 뒤지던 나는 뭔가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여행가방까지 다 뒤집어 온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는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라 어디 갔지? 내 대길?!!'
갑자기 웬지모르게 불길함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
분명히 다시는 못 볼줄 알았는데,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를 다시 보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저 운 좋게 꿈에서 보게 되었을 뿐이지만, 이 기억을 봄으로 인해서 난 한가지 궁금증이 풀려 있는 걸 깨달았다. 내가 꿈을 꾼건 바로 여행에서 돌아온 그 날 밤이었다.
'설마 어제 재희가 기억 못했던 게 이건가?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한 게 아니라 아예 면식이 있었던 건데...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희미했다 이거지...'
지금의 꿈에서 앳되 보이는 레이 언니와 돌이나 지났을까 싶을 정도로 갓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소이치로를 보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려 10년 전에 윤하와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아저씨가 '계획'이란 걸 위해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를 고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잠깐, 그럼 레이 언니는 창업 때 처음으로 아저씨를 만난 게 아니란 거잖아. 재희가 이야기했던 대로 메이드카페는 명분이라는 게 맞는거네? 그렇다면 내가 일본여행을 간건 아저씨 입장에서는 변수였던건가...? 아니면 계획에 있던 일?'
"이야~ 아유 씨. 소이치로 그새 정말 많이 컸네요."
"세이카씨도 참. 그러고보니 레이는 이제 숙녀 다 됬는걸요?"
서로의 아이를 데리고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표시하던 부모님들은 나와 아저씨, 그리고 아줌마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예의를 갖추었다. 어? 아주머니가 계시잖아?
"오셨어요? 총수님 일가 내외분. 윤하는 아주 건강해 보이네요."
문득 무던한 꿈이라 생각하고 있던 내 몽롱했던 정신을 깨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될 정도로 미인이셨다. 늘 지갑 속에 가지고 다니던 사진으로 보던 그녀지만, 이렇게 꿈을 게기로 살아 생전의 모습을 보게 되니 나도모르게 기뻤다. 분명 우리 엄마도 아니고, 실제로 뵌 적도 없는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우리 엄마가 앞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내가 잠시 아주머니의 모습에 정신 팔려 멍하니 있던 사이, 세 가족은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고, 신나서 들떠 있는 윤하와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와는 다르게 어른들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무튼 애들 노는 것보단 어른들의 대화가 더 궁금했지만, 윤하의 시점을 따라가는 꿈이라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윤하야, 소이치로 봐봐. 자꾸 뭘 달라는데?"
"헤헤 그러네... 우부부~ 까꿍!"
"꺄하!"
아기 소이치로를 품에 안은 레이 언니의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다들 일본인이었는데 엄청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세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보고 있으니 또 하나 확실하게 각인되는 것이 있었다.
'확실히... 소이치로와 레이언니는 나와 재희가 바뀐 걸 알고 있었던 걸까? 항상 넷상에서 함께 청권을 했던 건 윤하가 아닌 나였으니 소이치로가 아는건 확실하겠지?'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소이치로를 보고 있자니, 오에도 온천에서의 밤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녀석인데... 그 때의 표정은 11살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시니컬했단 말야.
'어쩌면 내가 모르는 많은 걸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탓인지도..'
어찌 어찌 소이치로를 재우고 나자 윤하는 레이 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그런데 요새 이상하게 자주 보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는거야?"
"무슨 일?"
궁금한 게 많아보이는 윤하와는 다르게 레이 언니의 표정은 윤하의 질문으로 인해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 언니는 결국 심오한 한 마디를 던졌다.
"아마 너희 어머니 때문일 거야. 어제 밤에 우리 부모님이 얼핏 말하는 걸 들었는데, 운명이 어쩌구... 하고 얘기하더라구. 너무 어려운 얘기라 잘 모르겠어."
"우리 엄마?"
그 말과 동시에 윤하의 표정이 굉장히 찡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난 지금 레이 언니가 말한 윤하 어머니에 대한 일이라는 게 어느정도는 예상이 되었기 때문에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그런데 분명 윤하는 이 때 모르고 있었을 텐데... 표정이 왜 저런 거지?
'그냥 나쁜 예감이 든 건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내가 한가지 간과하고 넘어갔던 게 있었던 모양이다. 윤하의 썩 좋지 않은 표정을 보며 미래에 벌어질 불행한 일이 떠오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뇌리를 스치는 한 가닥 생각을 잡을 수 있었다.
'아니, 가만... 분명 지금 윤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이잖아.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야 정상 아닌가? 어째서 레이 언니 가족은 그걸 알고 있는거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레이 언니의 부모님이 예언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정말 예언자라도 되는건가?
"우-으"
바로 그때였다. 곤히 잠들어 있던 소이치로가 살짝 눈을 뜨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리고 만 것. 레이 언니는 화들짝 놀라서 소이치로를 다독이며 좌우로 흔들어 보았지만, 어째 녀석의 울음은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윽, 빨리 아주머니에게 데려가야겠다-."
"그래, 얘 배고픈가봐."
윤하는 양 팔로 소이치로를 안고 뛰어가는 레이 언니의 뒤를 따라 쪼르르 쫓아가다가, 그만 갑자기 멈춰버린 레이 언니의 등에 쿵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멈춰 선 그때 소이치로는 울음을 뚝 그친 상태로 말똥히 윤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딪혀 아픈 코를 만지작거리면 윤하도 이내 무슨 상황인지 보려고 레이 언니를 올려다봤다.
"언니?"
"잠깐, 윤하야. 조용히 해 봐."
"무슨 일이길래 그래?"
충분히 말소리를 낮춘 윤하가 조심스럽게 레이 언니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없이 길 건너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고,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윤하의 시선도 조심스레 옮겨갔다. 정확히 5초 뒤 윤하는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그 엄청난 광경을 눈에 담으려고 함과 동시에 주변이 마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놈의 꿈이 자기 멋대로 기억을 중단시키려 하는 통에 볼 수가 없엇다.
'윽! 도대체 뭘 본거야... 나도 봐야 하는...데!'
얼마나 꿈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애 썼을까, 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다시 깜빡였을 때 내 양 팔은 깜깜한 내 방의 천장을 향하여 쭉 뻗은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약 2분간 팔을 허공에 든 채 멍 때리던 나는, 힘없이 두 팔을 떨어트렸다. 한숨을 크게 내 쉬고 나서 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우... 좀! 진실이 너무 깜깜한 거 아니냐구!!"
정말이지 풀리지 않는 답답함 때문에 시커먼, 아주 시커먼 '암흑'같은 느낌이었다.
<8. 만남은 녹색신호, 진실은 어둠속에>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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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10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