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이 이상은 나도 이야기 해 줄 수 없어. 미안해 윤하야."
레이언니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린 집에 돌아올 때 까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배신감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되려 의구심만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나타났던 사람들... 분명 레이언니와 소이치로, 그리고 아저씨였겠지.'
그리고 아저씨를 만났던 그날 나에게 거짓말 했던 우주에게 알수 없는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마 우주도 아저씨랑 한 패인거 아닐까?'
물론 그 날 직접 대화에 끼진 않았지만, 그 상황을 눈으로 봐 놓고도 내게 아무 일 없었던 것 처럼 거짓말 한 걸 보면 엄청나게 수상한 것은 분명했다. 분명 우주 역시 아저씨, 그리고 레이언니들과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자그락]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난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을 슬쩍 꺼냈다. 우주가 줬던 이제는 두 조각 나버린 옥석 팔찌였다.
'... 그래도 네 덕분에 살았으니. 고맙다는 말을 안 할 순 없겠구나.'
*
다음 날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홀로 맨션 밖으로 나와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 날 납치당했을 때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우주의 핸드폰을 대신 쓸 수 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우주?]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괜시리 안심이 되었다. 내 목소리지만 내 목소리가 아닌... 재희의 목소리. 완전히 박살나버린 나의 남성을 유일하게 회고시켜 줄 수 있는 사람.
"재희야 나야, 윤하야. 혹시 지금 바빠?"
[뭔일 있어? 이렇게 아침 일찍. 그것도 왜 우주 폰이냐, 한동안 전화도 뜸하더니만.]
녀석은 왜 우주 폰으로 전화했냐고 궁시렁댔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전화기가 부서져라 소리를 질렀다.
"나 아저씰 만났어. 며칠 전에."
[... 뭐어?!!!!]
난 최대한 재희를 진정시키면서 이야길 계속했다.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은 재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뜬금없이 내 눈 앞에 나타난 아저씨와 내 곁을 지키고 있던 레이언니와 소이치로에 대한 이야기는 녀석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여튼 오늘 돌아가니까, 가서 보고 직접 얘기하자. 아, 그리고 얘기할 거 한가지 더 있는데... 그건 돌아가서 할게."
[응 알았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몸 조심하고]
"응 끊을게."
집에 가서 내 납치 사건을 뭐라고 설명하면 재희한테 안 혼날까 생각하면서 난 맨션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변에 온통 수상한 사람 천지라니!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그들 덕분에 몸 무사히 간수했다는 생각에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다.
공항에 도착한 후 소이치로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아침 내내 그 표정이었던 걸 보니 아마도 레이 언니에게 내가 그들의 정체와 8일 밤에 있었던 일의 진위를 알아냈다는 얘길 들은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소란스러웠을 녀석은 우리가 탑승 게이트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 뿐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레이언니는 내 짐들을 오늘 오후에 부쳐주겠다는 말과 함께, 건강하라고,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 김포공항 행 일본 하네다 발 아시아나 항공 REJ6242번 여객기가 10분 후 출발할 예정입니다. 본 여객기를 이용하시는 손님 여러분께서는 출발 5분 전까지 탑승을 완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안내드립니다. 한국...]
우주는 레이 언니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까? 그래서 내내 내게 아무 말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병원에서 그 일 때문에 계속 내게 말을 걸지 못 하고 있는 걸까.
비행기 안에서 난 옆자리의 우주의 손을 힘겹게 잡았다. 아직 남자 몸에 손 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워낙 강했던지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주야. 너가 왜 날 속였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도 넌 날 위험에서 구해줬고, 여행 내내 굉장히 즐겁게 해줬어. 너가 없었다면 아저씨를 만나지도 못 했겠지..."
"..."
그는 내 손이 살짝살짝 떨리면서도 꼭 잡은 채 놓지 않는 걸 보며 가슴이 아팠는지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말 고마워. 어떤 고맙다는 말로도 다 못할것 같아."
나는 주머니에서 깨진 옥석 팔찌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유리 케이스 안에 담긴 팔찌를 건네받고 우주는 결국 참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미안. 역시 네 마음... 받아줄 순 없을 것 같아. 정말 미안."
내 말이 끝나고, 그는 괜찮다고 나즈막이 말했다. 내가 힘겹게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손을 잡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지, 그는 조심스레 꽉 쥐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고 흐르는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손을 놓고 나서 난 차마 우주의 슬픈 모습을 직접 바라보지 못한 채, 도착할 때까지 창밖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내내 생각했지만 아저씨가 나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윤하가 되고 나서 꾸었던 과거 기억들이 담긴 꿈들 덕분이었기에, 결국은 다음 꿈을 꿀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이 꿈이라는 수단으로 기억하게 되는 윤하의 과거가 비밀의 열쇠라는 말이었고, 아저씨를 만남으로써 증폭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기억이 담긴 꿈을 꿔야만 했다.
"윤하야~ 완전 보고 싶었어!! 헉, 근데 둘다 몸이 왜그래?"
공항에 내리니 재희와 가희가 우릴 반겼다. 가희는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는지 달려와서 날 가볍게 안으면서도 나와 우주가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것에 놀랐던 모양이다. 난 출발하기 전날에 계단에서 굴렀다면서 가희를 안심시켰지만, 자신의 몸을 망가트리고 온 것에 화가 났는지 재희는 약간 분노 상태인 것 같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잘 놀다 왔냐? 하기사 전화도 자주 안 할 정도로 즐거웠겠지 뭐."
가희와 서로 끌어안은 채 빙그르르 돌고 있는데, 재희의 저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무사히'라는 단어로 인해서였는데, 불과 얼마 전 있던 납치 사건 때문이었다.
'아마 그 얘기 하면 재희가 날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하겠지...'
한국에 돌아온 뒤 생각해보니 재희에게 그 얘길 하는게 쉽진 않아보였다. 우주가 저렇게 침묵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아마도 우주의 입으로 재희가 듣게 될 일은 없어보였다. 그래, 우주 네가 얘기했다간 재희한테 죽빵 맞을지도 모르니까 하지 마...
"뭐, 그만큼 즐거웠으니까. 다 이야기 해 줄 테니 걱정 말라구!"
"됐네요. 너네 둘이 놀러갔다 온 얘길 뭣하러 듣냐? 엄마랑 아빠 기다리고 계시니까 후딱 가서 인사나 드리자."
재희는 아침에 전화했던 것 때문인지 아저씨 얘기에 대한 상의가 하고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가장 빠르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내게 제시했다. 눈치 하난 빠른 재희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욱 기특해보이고 착해보이는 착시효과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래 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집에 가야겠다."
재희의 환상적인 눈치 대화법 덕에, 난 가장 빠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녀석과 여행 중 있었던 사건들을 상의할 수가 있게 되었다.
"2주동안 너무 고마웠어 우주야. 진짜 재밌었어."
"나야말로. 이제 속이 좀 후련해졌어?"
우주는 아까 비행기에서 나눈 대화 이후로 마음이 좀 차분해진 모양이었다. 어쩐지 과거의 우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풍기는 그는, 지하철 역에서 헤어질 때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희까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얘기하자면 길어. 가면서 다 이야기 해 줄테니까 니가 더 분석해봐. 내가 알아낸 건 지금 얘기해주는 게 전부니까."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녀석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려는데, '얼마든지 얘기해봐'하는 듯한 재희를 보고있자니 왜일까, 굉장히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습은 날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아무래도 우리 둘만의 비밀에 대해 유일하게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얼마간 나의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되었고, 호텔에서 아저씨를 본 것을 비롯해 수상한 레이 언니와 소이치로의 이야기까지 전부 이야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재희는 얼마 걸리지 않아 내가 알아내지 못 했던 부분을 분석해 내기 시작했다.
"... 너 바보 아냐? 울 아빠가 등장했던 게 온천에서 한 번이 끝이 아니구만..."
"어? 또 언제?"
내가 어벙하게 되묻자 녀석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보면서 이야기했다. 약간 기분이 상한다만... 그래 어디 한 번 얘기해 봐.
"일단 말야. 너 온천 가기 전에 쇼핑하러 간 마트에서-"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뇌리를 스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우리의 무거웠던 짐을 들어주었던 그 사람! 설마 그 사람이 아저씨였단 말야?
"짐 들어준 사람?!!"
"그래, 알고 있구만."
게다가 녀석은 레이언니와 소이치로의 이름에도 흥미를 보였다.
"어째 이 두사람..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한참을 고심하던 녀석은 생각이 나질 않았는지 기억해내는걸 포기해버린 듯 했다. 아마도 기억이 너무 흐릿했던 탓인듯 했다.
"세 사람이 했던 대화들이 마음에 걸려. 뭔가 나와 굉장히 관련성이 깊은 사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거든?"
짜샤, 그건 나도 알 수 있다고. 총수? 두 사람은 왜 아저씰 그렇게 불렀을까, 존댓말까지 쓰는 걸 보면 상당한 지위인 건 분명한데.
"10년 전 그 사건이라 함은.. 운명 우리 엄마 일일 테고, 얼마 안 돼 아빠가 일본에 가서 레이씨를 만난건 창업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겠지. 그건 명분이고, 실제론 다른 무언갈 상의했을거야."
그래도 이 녀석 머리를 얼마나 빨리 굴리는건지, 금방금방 수상한 점들을 정리하더니 어느 부분이 이상하고, 어느 부분이 미심쩍은지 내게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