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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53화 (53/188)

53화

우주다. 이 목소리 분명, 우주가 날 구해주러 온거야.

{뭐야 저 새끼는! 어이 쿠로! 쿠로?}두목이 부르는 건 분명 밖에 있던 덩치 큰 사내였던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우주에게 급소를 가격당했는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갑작스런 침입에 내 가슴에 손을 댔던 납치범도 벌떡 일어나서는 입구쪽의 우주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아까 뺨을 맞은 것 때문에 아직 어지러워서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간신히 들려오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윤하야! 경찰 불렀어! 이 자식들 내가 전부다 감방에 처 넣어버릴테니까 걱정 마!!"

옆으로 누운 채로 우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공포심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우주야. 진짜로... 고마워.

{저새끼 당장 처리해버려! 빌어먹을!}납치범을 우주에게 보낸 뒤 두목은 벗겨진 내 블라우스를 다시 입히고는 단추 하나를 채웠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 아까 맥이 풀리고 나서 겨우겨우 움직였던 것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야이 새끼야, 겁도 없이 꼬마가 어딜 덤벼?}

[퍽!]

하지만 입구에서 기습으로 덩치를 쓰러트린 것과 달리, 우주는 납치범과의 1:1 대결에서 내리 두번을 얻어맞고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큭...!"

또다시 두목의 어깨에 메쳐진 채로 창고 밖으로 끌려나가려는 듯 했다. 고개가 뒤쪽을 향하고 있어 앞쪽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주가 열세인 건 분명했다.

"악-!"

[쿠당탕]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우주는 납치범의 발차기에 갈비뼈를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헤헷... 걱정 마, 윤하야. 나 말고도 있으니까...!"

그러나 바닥에 엎어진 녀석은 킥킥 웃고 있었다. 누가 더 온다는 말에 난 흐려져가는 정신 속에서 두 사람을 떠올렸다. 경찰을 부른게 아니고 그 사람들을 부른 거야...?

[부아아앙- 끼이익!]

이윽고 입구까지 도착한 두목의 앞에 차가 한대 멈춰섰고, 거기서 내린 사람들로 인해 날 메고 가던 두목은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날 어깨에서 내린 뒤 똑바로 세우곤 내 목에 재빨리 칼을 들이댔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이 여자애 목숨은 없을 줄 알아!!}정신이 혼미해짐과 동시에 눈 앞이 흐려졌다. 워낙 정신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통에 난 목에 칼이 들어온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뭘 해야하는 지는 알고 있었다. 아까 부서진 옥석의 뭉툭한 부분을 손에 꽉 쥔 나는, 반대 손으로 쥔 손을 받친 채로 그대로 날카로운 부분을 내 뒤에서 날 위협하고 있는 두목의 배를 향해 찔렀다.

{크아악!!}

칼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 여러 사람이 소리치는 소리, 우주의 목소리... 수많은 소리가 내 귓전을 맴돌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오전, 근처의 병원에서였다. 일어나자마자 레이 언니에게 이끌려 뇌 촬영을 하는 등 이것저것 치료를 받고 나니 바로 정오였다.

"다행이다. 아무 이상 없대 윤하야."

약간의 타박상 뿐 큰 이상은 없다고 의사는 말했다. 물론 그 말은 모두 외상이 크게 없다는 소리였을 뿐, 이번에 내가 가장 크게 다친 것은 내 마음과 정신이었다.

병실로 돌아온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몸을 덜덜 떨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언니는 손을 잡은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떨고 있는 나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내 순결, 아니 윤하의 순결마저도 잃을 뻔한 대 사건으로 인해, 나의 뇌는 완전히 남자로서의 기능을 멈추고야 말았다. 어제 느낀 여자로써의 공포가 아직도 몸에 그대로 남아 나의 떨림을 멈출 수 없게 했다.

여태까지 쭉 생각했었다. 난 남자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우주랑 친구처럼 지내도 문제없어!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난 내 마음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위험하고, 그러니까 난 절대 남자들을 쉽게 보고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힘으로 난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위협하기 전에 말로써 거리를 둬야만 한다고...

"정말 큰일이다. 이래서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니 윤하야..?"

레이언니가 날 보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성폭행 미수나, 성폭행 당한 사람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겪는다고 하는데,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겪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모든 남자들에게 납치범의 환영이 보이는 무서운 증상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깨어나자마자 우주가 날 보며 안으려고 헀는데 내가 비명을 지르면서 녀석을 밀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주가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았지만, 그가 내 몸을 감싸는 순간 알수없는 공포심과 함께 마치 자석의 같은 극 처럼 그를 밀어낼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날 납치했던 그 일당은 모두 검거되었고, 경찰도 간단한 신문 이후에 스트레스를 걱정해 깊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레이 언니와 같이 있는 이 병실만이 유일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느껴진 건 왜였을까.

*

저녁 나절이 되서야 난 어느정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의사선생님은 외상이 없기 때문에 퇴원하는거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병원에 방문해서 정신치료를 받으라고 당부했다.

우주와 소이치로는 나와 레이언니를 따라 같이 움직이긴 했지만, 딱히 내게 말은 걸지 않았다. 아마도 주의사항을 전달받았기 때문에 말을 걸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딱히 대화까진 상관없지 않을까 했지만, 내가 또 언제 격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고 있는 듯 했다.

택시나 차를 탔다간 내 공포심이 또 유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레이 언니의 집에 도착했다. 우주와 소이치로를 먼저 들여보내고 난 뒤, 난 맨션 밖 벤치에 앉아 레이 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 큰일이네요. 나 이제 어떻해야 할까요..."

아까 우주에게 그렇게 대한 게 미안했던 나로써는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다가가려는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당분간은 거리를 둬야지 뭐. 나도 딱히 조언을 해 줄순 없겠구나..."

레이 언니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날 도와주고 싶은데 뭘 해도 내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참, 한국에 가족들은 잘 계시지?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의지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가족, 그래... 이럴 땐 가족한테 의지하는게 제일 중요하지. 유일하게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나의 사람들...?

"아... 아빠."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혼란했던 머릿속에서 내가 어제 납치당하면서 잊어버렸던 한 가지 할 일이 떠올랐다.

"언니, 나 지금당장 가 봐야 할 곳이 생겼어요. 같이 좀 가줘요."

"엉? 어딘데?!"

"우리 그저께 갔던 호텔이요, 지금 당장 빨리!!"

아저씨에 대한 단서를 잡으려고 분명 난 그저께 묵었던 호텔로 가던 중이었었다. 잊었떤 할일이 떠오르자 순간 내 머릿속의 공포심이 사라졌고, 애타는 마음에 옆에 있는 레이 언니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

가면서 생각해보니 분명 이상하긴 했다. 내가 그날 호텔에서 본 것이 꿈이었다면, 이미 내 뇌리에서 사라졌어야 정상이다. 다른 꿈들이야 윤하의 과거 기억이니까 그러려니 해도, 내 머릿속의 상상이 현실화 된 꿈이라면 하루 지나면 기억이 흐릿한 게 정상이니까.

하지만 아저씨를 본 건 달랐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고,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기억났다.

'분명 꿈이 아니야, 그건 꿈이 아니었어.'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마자 난 접수 데스크의 직원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혹시 8월 8일 숙박 손님중에 한국 손님이 몇 명이나 됐었나요?}

{한 마흔 명 쯤 이었는데요?}

사십 명. 젠장 일일이 캐물어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잖아. 이 직원분들이 손님을 일일히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고!

{혹시 그 사람들 중 혼자 왔던 사람은 없나요?}{아니요, 그 분들 전부 같이 오셨었구요, 따로 오셨던 분은 없었어요. 누구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확인해보고 싶어도 따로 온 사람이 없다는 건 이미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무너져가는 희망 속에서 난 직원의 질문에 내 지갑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대답했다.

{이게 저희 아버진데, 일본 오신 다음에 통 전화를 안받으셔서요... 그저께 이 곳에서 본 것 같은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해서 수소문하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진을 보여준 것이 결정타였던 모양이었다. 사진을 본 그 직원으로부터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 이 분 기억나요! 숙박하신 분은 아닌데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윗층으로 올라가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수상한 느낌이 들어서 보안요원한테 CCTV로 계속 지켜보라고 했는데 한 방으로 들어가시더라구요. 들어갔다가 30분인가 후에 다시 나오셨어요.}

{혹시, 1002호였나요?}

그 말에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무전기로 누군가를 불렀다. 보안요원인 것 같은 사람이 뛰어왔는데, 데스크 직원이 그에게 물었다.

{사사키 씨, 혹시 그저께 그 분 들어가신 방이 몇 호실이었어요?}

{아마 1002호 였을걸요?}

맞다. 분명히 우리가 묵었던 그 방이었다. 그 방으로 분명 아저씨가 들어왔던 것이 확실했다. 내가 확인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레이언니를 봤는데, 그 곳엔 표정이 굳어진 그녀가 서 있었다.

호텔을 나가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언니 왜 거짓말 했어요."

그녀는 한참동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심 끝에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비밀로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어째서 날 속였는지 그 이유는 듣고 싶었다.

"윤하 너, 우주가 처음에 현지인 친척이 도와줄 거라고 말 했던거 기억 나니?"

곰곰히 생각해 보던 나는, 분명히 처음에 여행 출발 전 우주가 얘기했던 것이 기억났다. 확실히 레이 언니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우주는 그 친척 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맞아요, 분명 우주가 말했는데... 설마?"

마치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경비를 대 줄 거라고 했던 현지인 가이드가 레이 언니였다니...

"그래, 그 현지에 사는 친척이 나야. 나름 너희의 여행을 편하게 하기 위기 위해 노력 많이 했지."

하기사, 그녀가 우리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긴 하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서 우리를 구제해 준 것은 그녀가 분명했다.

"그리고, 기억할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11살 때 아저씨 한 분과 창업했다고 했지? 그 때 그 한국에서 왔다는 아저씨 있잖아, 사실-"

"우리.. 아빠죠?"

그녀의 과거 얘기를 듣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계산이 됐다. 그녀가 11살이었을 때가 2000년, 그 해에 만났으니 그 해 일본으로 떠났던 윤하의 아버지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저께 밤에 우리가 나눈 대화도 들었으니 대충 우리가 어떤 관계인 지는 알겠네 그럼."

설마 아저씨는 10년 전 그때 윤하를 우리 집에 버리고 간 게 아니었던 건가? 그저께 들었던 것처럼 '그 날'로부터 윤하를 구하기 위해서 조력자와 함께 방법을 모색한 거란 말야? 그리고 방법을 찾은 뒤 다시 윤하를 데리러 왔던 거고.

도대체 무슨 위험에서 윤하를 구한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날 밤 아저씨를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과거 10년 전 아저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왜 그랬던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아저씨를 주축으로 하는 어떤 계획이 진행중이며, 그 대상자는 다름아닌 나와 재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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