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52화 (52/188)

52화

*

정신을 잃었던 내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어느 알 수 없는 어두운 건물 안이었다. 주변이 캄캄해서 몇 시인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뭐야, 팔이 묶여.. 있어!'

게다가 난 팔이 묶인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팔을 움직이지 못 하니까 시계도 볼 수 없었고, 주머니의 핸드폰도 꺼낼 수가 없었다.

'젠장, 누구야. 누가 이런 짓을...'

낑낑거리며 힘들게 몸을 일으킨 나는 문득 정신을 잃기 전 백미러를 통해 봤던 택시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모테산도 힐즈에서 마츠모토씨 보면서 혀를 찼던 그 사람이었어. 설마 그 사람이 날 납치한건가? 뭐때문에...?'

하지만 지금 납치한 이유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 때문에 납치되어 온 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 지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연락할 수단도 방법도 없고 위치조차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난 뭘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다행히 발목까지는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난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안 보였던 주변도 어느정도 적응되서 그런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창고..? 뭐지 여긴?'

굉장히 넓은 공간 안에 뭔가 물건들이 여기저기 구획을 나누어 정리되어있었다. 대강 물체들의 실루엣은 보였지만 뭔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난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 빛이 새어들어오는 곳이 없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찾았다!'

한참을 둘러보니 문으로 보이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건물 안에 날 납치해 온 사람은 없는 듯 해서 난 소리 안나게 빠른 걸음으로 문 앞까지 달려갔다.

빛이 새어들어오는 틈 사이로 밖을 보니 항구 같았다. 컨테이너 박스가 잔뜩 있고, 대형 크레인들이 사이사이 보이는 걸로 보아 큰 항구였다.

'도쿄 근처 항구인가? 날 그렇게 멀리 끌고 오진 않았겠지?'

혹시나 해서 밖에 누가 있나 귀를 기울였지만 딱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난 문을 슬쩍 잡아당겨봤지만 열리지 않고 철컹철컹 소리만 났다. 아마도 바깥에서 잠겨 있는 것 같다.

바깥 날씨로 봐선 분명 한낮이었다. 어젯 밤 내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니 우주와 레이언니도 날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움직이면서 주머니의 감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핸드폰도 없는게 분명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나는 어떻게든 탈출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팔도 묶여 있고, 연락할 수단조차 없는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딱히 뭔가 할 수 있을만한거라곤 없었다.

'... 어떻게든 날 납치한 놈들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나.'

지금으로써 유일한 방법은 납치범들이 문을 열고 돌아올 때 옆에 숨어 있다가 재빠르게 탈출하는 방법 뿐이었다. 내가 묶여 있고 약 기운에 자고 있을거라고 생각할 테니 그 방심한 틈을 노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냐... 그런데 도망치다 잡히면... 어떻하지.'

확실하지 않은 방법, 하지만 실패했다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 하지만 시도해보지도 않고 실패를 걱정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의 기회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성공시켜야만 했다.

{이쪽입니다 형님.}

{그래, 이번에 데려온 애 아주 죽인다면서?}내가 문 뒤에서 상황을 엿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두 사람정도가 나타나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본능적으로 이쪽으로 오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문이 열리면 바로 밖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아니나다를까, 곧 내가 서 있는 문의 반대편에 도착한 납치범들은 잠긴 문을 열쇠로 열기 시작했다. 난 속으로 기회는 한 번 뿐이라고 셀 수 없이 다짐한 뒤에 심호흡을 했다.

[철컥, 끼이익]

커다란 문이 조금씩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두 사람이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그들이 내가 있는 위치를 완전히 벗어난 직후 난 소리나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문을 돌아나섰다. 그러나 안쪽의 두 사람은 날 못봤지만,

"...!!"

밖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게다가 이 사람, 팔에는 문신이 가득했고, 덩치는 산만해서 날 그림자만으로 가리고 있었다. 야... 야쿠자?!

{형님, 도망가려던 거 잡았습니다}

"이거 놔!!"

간신히 도망칠 기회를 잡았는데 한명이 더 있을 것이란 생각을 못한 게 화근이었다. 어떻게든 그 덩치에게서 도망가려 했지만 두 팔이 묶인 채로 바로 앞에서 대치한 상태로 그에게서 도망가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그의 어깨에 메쳐진 채로 난 그대로 다시 창고 안으로 끌려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탈출구였던 문이 다시 닫히고, 창고 안의 불이 켜졌다. 다시 납치범들의 앞으로 돌아온 나는 주변에 가득한 물건들이 무었이었는지 확인하고 나서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뭐야 이거... 세트장? 설마 이 놈들...!'

날 납치했던 놈이 내 뒤로 걸어오더니 주저앉은 내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악!"

난 소리를 지르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하늘을 향해 젖힐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내 머리를 잡아당기는지 고통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났다.

"뭐 하는 놈들이...야 너희들...!"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상태로 어떻게든 내 앞의 또다른 납치범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내 그런 경고는 씨알도 안 먹히는 듯 했다.

{뭐야, 한국 애였어? 너 이새끼 일본 애라며?}{어? 아닙니다 형님, 분명 어제 일본어 쓰는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슴다.}젠장, 한국말로 말해봤자 소용 없겠군. 도대체 뭐하는 녀석들인지 일단 알아라도 놔야 해...

{뭐야 너희들. 정체가!}

{이것 보십쇼. 일본어 엄청 잘하지 않습니까.}{이런 멍청한 새끼... 관광객이 일본어 잘 할 수도 있는거지.}내 앞의 의자에 앉아 있던 두목같은 녀석은 신기하단 표정을 지으며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관광객인 거 같은데 일본어도 잘하고, 가수도 닮았고, 몸매도 좋고, 게다가 어리군... 외국인이라서 상품용은 못 찍어도 레이프 필름은 팔아 치울 수 있겠구만.}

{그렇죠 형님?}

잠깐, 레이프 필름이라니. 가까 세트장 같은 창고 안을 보고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자 내 머릿속은 점점 공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미쳤어?!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얼룩져오는 공포 때문에 난 다가오는 두려움을 억누르려고 어떻게든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제발... 제발 누가 날 여기서 좀 구해줘...!!

{아가씨, 우리가 합법적으로 이런 걸 할리가 없잖아? 우리 나라 애들이면 돈 주고 섭외하는건 가능해도 해외 관광객 대상으론 불법이라서 말이지... 일단 납치했으니 그냥 보내줄 순 없단 말이지?}큰일이었다. 절대로 이 자식들을 말로 설득하는건 불가능해. 하지만 힘으로 내가 이겨먹는것도 불가능해. 지금 윤하의 몸으로 남자를 둘이나 상대하는건 힘에서나 덩치 면에서나 가능할 리가 없어. 탈출구가... 없어...

{야 저쪽으로 데리고 가라, 촬영준비하게.}

{네 형님.}

큭! 젠장, 머리채가 잡혀있는 상태라 어떻게 움직일 수도 없어. 머리가 기니까 이렇게 잡혀버리다니...

{살살 해줄테니 걱정 말라고 아가씨. 우리도 엄청 잔인한 사람은 아니라고? 내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연예인들을 좀 싫어해서말야. 그래서 그놈 가는데마다 따라가면서 여자를 납치해왔지... 이번엔 아가씨가 딱 걸린 거고 말야?}고개를 들린 채로 앞으로 걸어가면서 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납치범을 노려봤다. 이거 놓으라고 바둥대면서 소리 지르는것 말고 할 수 있는게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나약하게 느껴졌다.

{아 물론 촬영 끝나고 집엔 못 보내 줘. 네가 경찰서에 가서 이야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아마 계속 우리와 함께 다녀야겠지. 후후후.}날 매트리스가 있는 바닥에 내팽겨친 납치범은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자 입장에서 본 색욕에 가득찬 남자의 표정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야 준비 됐다. 알아서 요리해.}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공포로 인해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아까전까지만 해도 반격이라고 해보려고 잔뜩 긴장했던 몸에 더이상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로써 몸을 겁탈당한다는 엄청난 공포로 인해 이미 맥이 풀린 지 오래였다.

'아. 안돼. 이 몸 윤하에게 돌려줄 때 까지 잘 지키겠다고 약속... 했는데...!'

바로 그 순간 공포에서 그나마 날 구해낸 건 재희가 떠오른 탓이었다. 우리 서로 몸이 바뀌어있는데, 내가 이대로 당한다면 그녀의 몸을 결국 지키지 못한 거야. 지켜야 해 이 몸을...!

{크, 고년 참 먹고 싶게 생겼단 말이야.}납치범이 내 얼굴을 쓰다듬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의 손은 얼굴에서 점차 내려오더니 내가 입고 있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가기 시작했다. 블라우스가 벗겨지고, 내 속옷이 훤히 드러날 때 쯤 난 초인적인 힘으로 그의 머리를 향해 박치기를 했다.

{저리 가!!}

[퍽]

{악!}

충격으로 내 머리도 엄청나게 아파왔지만 그런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망쳐야 해,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간신히 정신 못 차리는 납치범을 밀어낸 나는 벌떡 일어나서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힘겹게 공포를 이겨내며 달렸지만, 난 얼마 못 가 쫓아온 두목에게 밀쳐져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콰직]

그와 동시에 내 오른손에 차고 있던 팔찌의 옥석이 부서졌다. 부서지면서 조각 하나가 내 팔을 살짝 베었고, 나머지 조각이 덜렁거리면서 여전히 밴드에 붙어있었다. 난 온 몸이 고통을 호소해왔지만 어떻게든 부서진 팔찌 조각을 붙잡아 손에 꾹 쥐었다.

일어난 두목은 내 목을 조르면서 다시 매트리스로 끌고 갔다. 매트리스에 던져진 나는 캑캑대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납치범은 잔뜩 열받은 표정으로 내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 미친년이, 잘 해줄려고 해도 지랄이군.}

[짜악, 짜악, 짜악!]

네 대 정도를 연속해서 맞고 나니 정신이 끊어질 듯 아찔했다. 바닥에 쓰러져 겨우 헉헉거리고 있는 나를 제대로 눕힌 납치범은 내 위에 올라타더니 내 가슴을 가리고 있는 속옷을 힘으로 뜯어내버렸다.

'안돼, 그만... 그만둬...! 제발, 그만... 그만둬!!!'

내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고 납치범이 휘파람을 불었다. 부끄러움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녀석이 날 짓누르고 있어 상체는 아예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아아악!!}

{크하, 죽이는데? 가만히 좀 있어봐~}바로 그 때였다.

내가 모든것을 포기하려는 그 순간, 문 밖에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물체들로 인해 가려져서 내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내 머리속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하야!!"

============================ 작품 후기 ============================

+14.07.10 수정완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