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며칠 전 꿈에서 봤던 아저씨로 인해, 아저씰 만나길 매우 고대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나와 재희가 어째서 몸이 바뀐건지, 돌아갈 방법은 없는 것인지 모두 물어보고 싶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기도 고대했고... 윤하로써 아버지를 너무나 보고싶은 마음에 더욱더 간절했었다. 그러나 어젯 밤 일은 나에게 순간의 희망을 안겨줌과 동시에, 다음날 아침 절망을 가져다 준 셈이 되었다.
{일단 치우자, 체크아웃 해야지.}난 아무도 모르게 눈물방울을 재빨리 훔친 후 벌떡 일어났다. 모두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모두에게 내가 슬픔에 빠졌단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이 방법 말곤 없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니 집에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간 소이치로를 빼고 남은 사람은 세 명이었다. 소이치로와는 돌아가는 날인 8월 12일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뒤여서, 막상 셋만 남으니 딱히 할 게 없었다. 내일은 스케쥴이 계획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딱히 다른 계획이 없었던 관계로 우린 레이 언니가 이끄는대로 도쿄 관광을 하기로 했다.
레이 언니가 이끄는대로 도쿄 관광을 하던 우린 오후 쯤 '오모테산도 힐즈'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6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유명 쇼핑몰이라고 했는데, 굉장히 신기한 건축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꽤나 많았다.
물론 신기한 구조에도 관심이 가긴 했지만, 난 그것보단 끝없이 펼쳐진 옷들이 더 맘에 들었다. 그 당시 아직 어젯밤 꿈 때문에 관광에 집중할 순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 재희와 상의하기 전까진 관광에 집중하기로 결심했으므로 최대한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두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우주가 지름신 강림 직전의 날 말리기 위해 애썼지만, 스트레스와 혼란으로 가득한 뇌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선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뭐라도 집중해서 그 생각을 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열심히 구매해주마~!"
내 초 하이텐션 때문에 두 사람은 좀 어리둥절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난 전혀 신경 안 쓰고 쇼핑몰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몇 분 안돼서 난 두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어라... 너무 빨리 왔나."
뭐 나중에 미아보호소라도 가서 찾아야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난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불과 20여분 만에 쇼핑백의 수가 3개로 늘어나 있었고, 이미 입고 왔던 옷은 쇼핑백에 넣어둔 채 새로 산 옷 중 마음에 들었던 베이지색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시원한 네이비 컬러의 마이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마이는 흰색 단추가 포인트로 눈에 확 띄는 큐트한 디자인으로, 원피스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굳이 여름인데 마이를 입은 이유는, 건물 안의 에어컨 바람이 약간 쌀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럼 구두를 골라 가야지...'
마지막으로 신발을 고르러 자리를 옮겼는데, 층을 내려가자마자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혹 연예인이라도 왔나 싶어 아래쪽을 기웃거리던 나는, 가끔 TV에서 보던 익숙한 배우가 인파 가운데 카메라맨과 함께 서 있음을 깨달았다.
순간 난간에서 내 옆에 서 있던 수상한 남자 한명이 혀를 차며 '멍청한 것들..'하고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았지만 이상함을 눈치채고 돌아보니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웬지 저 쪽의 무리들과 마주쳤다간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든 나는 최대한 빨리 구두를 골라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런데 인파를 피해 달아난 그곳도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쁜 신상 아가들을 보며 콧노래를 부르던 난 뜬금없이 날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라? 윤하 짱 아니야?!}
여유롭게 직원을 이끌고 구경하던 나는 날 부르는 핸섬한 목소리에 그 쪽을 돌아보기가 두려워졌다. 한 번 침을 꿀걱 삼키고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래층에서 인파를 몰고 다니던 그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 만큼의 인파와 카메라맨을 그대로 데리고 온 다른 사람이었다. 젠장 한명이 아니었던거냐!
"마.. 마즈모토 준?"
으악, 하필이면 일본에서 으뜸가는 배우랑 마주치게 될 줄이야. 아무리 운이 좋다고 해도 이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만나는 거 아냐 이거?!
{여기서 뭐 해? 쇼핑하러 온거야?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난 그의 폭풍같은 질문에 어찌 대답할 방도를 못 찾고 어버버 할 뿐이었다.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너무 유명한 사람을 만난 탓에 뇌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카메라가 날 찍고 있었고, 뒤에 따라온 많은 여성팬들이 나를 보며 저마다 가수로 착각하고 떠들어대기 시작한 탓에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져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으면 사칭죄로 경찰서에 잡혀갈 것만 같아서 난 황급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앗, 그, 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엉? 윤하 아니야? 아니, 아니세요?}의외로 이 분은 내가 그 가수가 아니라는 걸 금방 인정했다. 그리고 급 당황해서는 반말에서 존댓말로 어영부영 넘어가버렸다. 동명이인인 그분과 엄청 친하신가 보네...
{한국 관광객인데... 마츠모토 준 씨 맞으세요?}난 엄청 긴장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은 채로 대화를 계속해 나갔다. 물론 이렇게 마주치게 된 거 싸인도 받고 인증샷까지 찍어가는 걸 목표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네 맞는데. 윤하씨랑 정말 닮으셨네요. 정말 본인 아닌 거 맞죠?}사실 확인을 위해 난 여권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는 내 이름을 보고 약간 놀라더니, 이내 내 생년월일을 보고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 모양이었다. 굉장히 아쉬워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오만감이 교차했다.
{그나저나 어쩌다 여기에 계신가요?}보통 톱스타와 마주하게 되면 긴장하는 게 보통사람의 섭리겠으나, 극도로 감정을 조절한 내 얼굴에는 홍조랄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평소대로였고, 그 때문인지 오히려 그가 나를 대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의 약간은 어색한 어감 때문인지 마치 인터뷰하듯이 내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버렸다.
{오늘 촬영이 있어서요. 지금 쥬리씨와 타쿠야 씨도 여기 와 있거든요? 이따 일반인 게스트로 저희 프로그램에 잠깐 참여할래요?}우와 이런 횡재가. 난 쇼핑하러 왔는데 일본의 톱스타를 3명이나 만나고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까지 할 수 있다니! 이런 엄청난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란 것을 예측한 나는 단번에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프로그램 참여 제의를 수락하고 나니, 마즈모토씨가 내게 오늘 활영할 프로그램의 내용을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듣고 보니 굳이 아는 사람을 섭외하려 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런 것. 촬영을 시작할 때 흩어져 섭외 대상을 물색한 뒤, 그 사람을 모델로 삼아 맨 처음 입고 있었던 옷들로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은 후, 그 다음 연예인들이 스타일리스트가 되어 게스트를 스타일링 한 후 그것으로 2차 평가. 마지막으로 연예인과 게스트가 어울리는 옷으로 맞춰 입은 후 마지막 평가를 받는다.
가장 점수가 높은 게스트에게 스타와 일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며, 스타는 오만 엔의 상금을 받는다. 하지만 꼴지를 할 경우 벌칙 의상을 입고 방송을 마쳐야 하는데, 그 벌칙 의상이란 것이 참으로 민망한 옷이었다.
{아무튼, 제가보기에 지금 이 옷 정말 잘 어울리고 세련됬어요. 아마 1차 평가에서 엄청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라구요.} '오호호 별 말씀을~'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위의 이목을 생각해서 일단 목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켰다. 난 빨리 다른 연예인들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나저나 일본의 톱 스타에게 이런 칭찬을 듣게 되다니,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 얘길 재희가 보는 앞에서 들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어라 근데 왜 재희가 떠오르지.
{여~ 쥬리! 게스트 구했어?}
{아 준 오빠. 물론이죠, 이제 타쿠야 오빠만 오면 되겠네요.}{후후, 놀라지 말라구. 우리 게스트를 소개하지!}갑자기 날 앞으로 끌어당긴 덕분에 발사되듯 날아와서 서니, 내 앞에 그 유명한 여배우가 떡하니 서 있었다. 우와, 우에노 쥬리다!
{어... 윤하 짱 아닌가? 어째 많이 닮았는데.}{그렇지? 나도 처음 보고 윤하인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글쎄 같은 한국사람에-}두 사람이 수다를 떠는 와중에 난 상대의 게스트가 누군지 보려고 했으나 이게 웬 걸, 우에노씨 옆에 게스트는 없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거늘, 난 아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반가워요, 우에노 쥬리입니다.}{안녕하세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그녀와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내가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를 봤다는 사실을 알자 그녀는 매우 기뻐했다. 물론 요즘 하는 드라마 외에도 이전의 '요담에 칸타빌레'같은 드라마나 '식인걸즈'같은 영화도 꽤 봤던지라, 실물로 보게 되니 더 신기하고 떨렸다.
{그나저나 너 게스트는?}
우에노 씨가 한창 날 보면서 오늘 질 것 같다고 걱정하는데, 마즈모토 씨가 게스트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도 궁금했던 부분이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아, 게스트 분? 지금 화장실 다녀온다고 했어요, 아마 곧 올텐데...} 그런데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시선이 고정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우에노 씨의 게스트가 저 녀석은 아니겠지... 하고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이런 젠장, 내가 아니길 바란 그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주?!!"
난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아까전에 놓쳐버린 녀석이 나의 생다편 게스트로 나타나니 안 놀랄 수가 있으랴. 게다가 이 말도 안되는 확률로 같은 프로그램에서 만나다니.
"어라? 윤하 너도?"
우리가 서로 어안이 벙벙해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마츠모토씨와 우에노씨가 어리둥절한 듯 우릴 바라봤다.
{어래 서로 아는 사이?}
{알다마다요. 같이 일본여행온 학교 친군데.}이런 어이가 뺨을 때리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얼떨떨해진 난, 아직 연예인 한 명과 게스트 한 명이 안 왔다는 걸 깨닫고, 최악의 시나리오로만 흘러가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렇게 빌고 또 빌었건만, 내가 걱정했던 그 우려의 결과는 결국 이루어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