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내가 누워있는 곳은 아까 밥을 먹던 거실이 아니었다. 누군가 잠든 날 방으로 옮긴 뒤 이불을 덮어줬는지 난 바로 누워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눈을 떳지만 시야가 굉장히 흐려서 거실로부터 새어들어오는 불빛이 뿌옇게 보였다. 게다가 정신도 굉장히 몽롱했기 때문에 간신히 익숙한 목소리들만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익숙한 목소리 사이에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냥 저대로 두실 생각이신가요?}이건 레이 언니의 목소리고,
{제 생각엔 이대로 뒀다간... 외람된 말이지만 10년 전 '운명의 날'과 동일한 참사가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어서 조치하고 대응책을 강구하는 게...}이건 소이치로의 목소리인데,
{아니다.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할 때야. 분명 '그 날'이 되면 윤하의 힘으로 인해 '그 사건'때와는 다르게 될 거다. 이미 내가 할 준비는 해 두었기 때문에 '그 날'이 되었을 때 재희의 몸을 받게 된 윤하가 어떤 힘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다.}이 목소린 설마?
{이 작전이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총수님?}
{가능성이라...}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두번 세번, 한없이 되뇌여봤지만, 이 목소린 분명히 그 분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이름을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내 마음 속 깊숙히 박혀 있는 그 목소리, {반반이네,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는...}아저씨다. 이 사람은 무조건 서 진 아저씨야. 어째서 아저씨와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분명 이 목소리는 아저씨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가 힘들었고, 게다가 세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도통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반반이라.. 장담 못하신다는 거군요.}{어쩔 수 없지... 과거 '저주의 날'에 운명지어진 우리들의 미래로 인해, 우리들은 꿈을 꾸어도 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버렸으니까.} 그런데, 정말 술 기운이 너무 셌던 탓일까, 일어나 아저씨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내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모든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말을 듣지 않는 몸 때문에 난 허탈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전대 총수이셨던 총수님의 아버님 덕분에 저희들은 그나마 구원받을 수 있었지 않았습니까. 분명 저희가 그분께서 알려주신 방법이라면 그 아이도 운명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판단력이 흐려질 수 밖에 없는 몽롱한 상태에서 이대로 아저씨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거실로 나가려고 낑낑대던 난,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우주?'
녀석은 이부자리 위에 앉아 거실과 우리가 있는 방을 가르고 있는 문의 틈새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내가 낑낑거리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부디 그래야지, 난 10년 전 '운명의 날'이후로 오로지 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만 전념해 왔으니까. 만약 다가올 '그 날'에 이 작전마저 실패로 돌아간다면... 난 더이상 살아가고 싶은 마음마져 잃고 말 테니...}{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아이가 많이 보고싶으셨나 보군요.}
'!!'
난 갑자기 이쪽을 돌아보시는 아저씨 때문에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눕히고 황급히 이불을 덮어썼다. 내가 다시 자는척 하기 무섭게 우주도 세 사람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재빨리 이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와중에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좀 났지만, 아저씨와 레이 언니, 소이치로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하.. 그렇지 뭐. 저 아이는 내 자식은 아니지만... 이제 내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말야.}{그나저나, 저 아이는 지금 이 일에 대해 모르고 있죠?}아저씨는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난 눈을 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벽쪽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제발, 들키면 큰일이다!
[드르륵]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아저씨는 우주 머리맡을 돌아 내 곁으로 와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으나, 간신히 참아낸 나는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르고 있겠지만... '그 날'이 되면 이 아이는 분명 나에게 엄청나게 고마운 존재가 되리라는 것 만은 확실해.} 그러나 들키지 않으려고 굳이 숨죽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아저씨의 따스한 손길에 저절로 긴장이 풀려버린 난, 하마터면 맥이 풀려 눈물을 한바탕 쏟아낼 뻔 했다. 어째서인지 고민해보지 않아도... 그 해답은 아저씨가 했던 말 중에 있었다.
'내 부모님은 아니지만... 이제 우리 아빠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 마치 아저씨께 바뀐 내가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듯이...'
그리고 내 곁을 떠나며 말하는 아저씨의 한 마디를 끝으로, 내 기억은 뚝 끊겨 버렸다.
"힘내거라 재희야. 조금만 더..."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니, 난 어제 기억나는 것과 다르게 거실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밤에 느꼈던 거실의 느낌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난 굉장히 어색함을 느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실의 테이블 위나 주변이나 맥주병이 가득했고, 안주들은 사방팔방 흩어져 바닥은 부스러기와 쓰레기들로 가득한 난장판이었다. 레이 언니는 우주와 언제 또 술을 마셨는지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자고 있었고, 우주는 그 맞은 편 바닥에 큰 대 자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소이치로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난 소이치로를 찾는다는 핑계로 벌떡 일어나 거실과 방에서 아저씨를 찾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의 흔적이 어딘가에는 있으리란 신념 하나로 주변을 뒤지길 20분, 난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풀이 죽어 우주의 옆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겨우 만났는데 대체 어제 왜 숨은거람...!'
허나 그걸 이제와서 후회하면 무엇하리오. 난 어제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듣고 싶어서 하염없이 잠만 자고 있는 우주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분명 이 녀석이라면 내가 기억이 끊긴 뒤로도 들었을 테니까.
{워, 워! 그러지마 누나!}
그런데 우주를 식혜 흔들듯이 흔들던 나를 멈춰세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 막 밖에서 돌아온 소이치로였다. 그렇지 이 녀석은 애초에 아저씨와 같이 있었으니 모든 걸 알고 있겠지. 너 당장 불어, 어제 무슨 얘기를 한거야 아저씨랑!
{너, 어제 밤에 레이 언니랑 우리 아빠랑 무슨 얘기를 한거야 도대체?}난 단도직입적으로 소이치로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 녀석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한 표정으로 쌩뚱맞게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게 아닌가.
{뭐? 무슨소리야? 난 어제 셋이 술먹는거 보다가 졸려서 잤는데. 자다가 새벽 세시쯤 일어나보니까 우주 형이랑 레이 누나는 여전히 술 마시고 있더라구. 그래서 그냥 DSP 꺼내서 게임하다가 날새서 잠깐 마실 것 좀 사러 나갔다 온 거야. 그래, 저 두사람은 한 네시쯤 곯아떨어졌고.} 그러나 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잠에서 깨어나 안방에 있었을 때는 세시 경이었고, 그 시간에 우주는 방 안에서 내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이치로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시나리오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설마 어제 그게 꿈이라고? 그렇지만 배경도 그렇고... 너무나 현실 같았는데 꿈이었다고?'
신뢰가 가지 않는 녀석의 말 때문에, 어제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든 나는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내 눈에 잡힌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방금 전의 소란으로 잠에서 깬 레이 언니였다.
{아음... 무슨소란이야...}
그녀는 일어났지만 술기운이 너무 강해서인지 비몽사몽간에 일본어로 웅얼거렸다. 단박에 그녀에게로 날아간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턱 얹은 후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니, 어제 우리 아빠랑 만났죠? 밤새 소이치로랑 언니랑 셋이서 이야기했잖아요. 전 잠들어서 안방에다 재웠구요. 우주도 분명 제 옆자리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어나보니까 전 거실에서 맨바닥에 자고 있었고 우주도 저기 저 자리에서 자고있었다니까요?} 그러나 나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답은 간결했고 흔들림 없었다.
{... 그럴리가 있니? 어제 너 거실에 누워서 자고 나서 난 우주랑 계속 맥주 마시다가 늦게 잤는데... 널 안방에 들여놨다가 다시 데리고 나올 겨를도 없었다구.}분명히 굉장히 피곤해보이는 가운데에도 그녀는 어젯 밤 일에 대해 다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술기운 때문에 몇 시간 전까지는 전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지만, 이 얘기까지 듣고 나니 점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제 일이 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우주라면, 옆에서 보고 있었던 녀석이라면 알고 있겠지...'
난 마지막 희망을 걸고 바로 옆에서 자고 있던 우주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제발, 우주야, 네가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저씨를 찾을 수 있어. 제발 일어나서 어제 봤던 모든 일에 대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이야기 해 줘!
"끄응... 왜 윤하야..."
우주는 머리가 아픈지 한 손으로 머리를 주무르며 일어났다. 어젯밤에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 정도인지... 난 혹시나 술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젯밤에, 우리 분명 저 안방에서 자고 있었잖아. 그리고 레이언니와 소이치로는 어떤 아저씨랑 얘기하고 있었고, 그렇지?"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램과 달리, 우주가 들려주는 얘기는 소이치로나 레이 언니가 해주었던 말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똑같았다. 마치 내가 기억하고 있는게 틀렸다고 말해주는 것 처럼.
"아니, 난 어젯밤에 술 마신 기억밖에 없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어째서, 아저씨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믿었는데... 한낱 꿈이었단 말야? 어젯밤에 그저 술기운에 아저씨가 너무 그리워서 헛된 꿈을 꿨던 거라 이 얘기야?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꿈일리가 없어, 꿈일리가 없다구...!!
"아니야...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세 사람의 하나같은 증언으로 인해, 난 너무나 낙심한 나머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트릴 뻔 했지만 힘겹게 눈물을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만 했다. 즐겁게 여행 왔는데 아무 사정도 모르는 이 세사람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내 욕심때문에 세 사람을 꿈 속에서까지 불러들였다는 미안함에 한동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환상까지 보게 되었을까 하는 자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윤하야? 괜찮아?"
우주가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흘러내린 머릿결을 귀 뒤로 넘겨주고 나서야, 난 간신히 마음을 정리하고 원래 내 페이스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저씨 꿈을 꿨는데 그게 너무 진짜 같아서 그만..."
우주도 내가 아저씨 없이 홀로 재희네 집에 얹혀 산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그 말을 듣고는 말 없이 날 꼭 안아주었다. 정신적으로 지쳤던 내게 그 품 속은 너무나 따스해서, 마치 아저씨와 함께 잤던 출국 전날 밤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