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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47화 (47/188)

47화

{소이치로! 왜 이렇게 보채! 느긋하게 관광을 못 하겠네 정말}난 결국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성을 냈다. 이 놈이 말야, 자꾸 관광 온 우리를 방해하려고 하는구만!

{윽, 알았음 누님.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대들 것이라 생각했던 소이치로는 되려 얌전했졌다. 내 진심이 통한 것인지, 녀석은 조용히 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저녁 먹기 전까지 여유롭게 오다이바 전체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황홀한 레인보우브릿지 근처의 야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보며 우주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계속 밖을 보며 소릴 잘 듣지 못하던 나는 우주가 5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 나름 괜찮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정도면 우수하지. 이 여세를 몰아 저녁엔 오에도 온천으로 놀러갈까?"

우주와 단둘이 이야기하는데 고새 또 소이치로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 오에도 온천으로 가게? 좋아, 굳이 얘기 안 해줘도 코스를 잘 고르는 걸?}

{너한테 얘기 안했거든!}

물론 나도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묵을 곳으로 정한 터였다. 그러므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소이치로의 이런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이언니는 소이치로가 있기도 전에 이미 매수해 두었던 상태였으므로 소이치로까지 합세한다면 더욱 계획이 수월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나야 좋지. 온천욕 마다할 사람이 어딨어."

우주가 흔쾌히 수락했기 때문에 소이치로를 꼬드겨 우주를 최대한 늦게 방으로 돌아오도록 만들면 되겠구만. 일단 레이 언니와 마트에 가서 저녁 때 필요한 것을 준비해야겠어. 그러려먼 일단 소이치로 녀석을 구워삶아야겠지?

{야, 소이치로. 잠깐 일로 와 봐.}

{응 왜?}

나에게 불려진 이후 녀석은 잠시동안 내 설명을 듣더니 청권 5승을 담보로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건 조건이 맘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준다고 하니 나로선 기특하고 오랜만에 이뻐보이기까지 했다.

얼마 뒤 소이치로가 온천 근처 호텔에 체크인 하겠다며 우주를 데리고 가자, 나와 레이 언니는 마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가는 쇼핑에 나도 웬지 즐거워졌다.

"그럼 갈까요? 오늘밤 우주를 위한 쇼킹 생일파티 대작전!"

"좋았으-!"

모든 것은 오늘 밤 우주를 위하여! 오늘 밤 미션 클리어를 위하여 레이 언니와 나는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

나와 레이언니는 장보기가 끝나고 터질 것 같은 봉지를 하나씩 들고 호텔 객실로 돌아왔다. 여행 와서 거의 사 먹기만 했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만들어 먹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17번째 생일을 맞는 우주를 위한 것이므로 이정도 쯤 감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행히도 어떤 친절한 아저씨가 우리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었기 때문에 크게 힘들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굉장하네. 우주도 정말 좋아하겠다."

"그렇죠?"

어찌어찌 온천에다가 식재료를 준비해 놓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이치로가 우주를 데리고 8시까지는 버텨 준다고 했기 때문에 남은 한 시간 동안 빠르게 준비해야만 했다. 마치 요리 경연대회나 다름없는 속도로 나와 레이언니의 생일파티 준비가 시작됬다.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한창 미역국이 끓고 있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레이 언니는 본능적으로 위기의 순간임을 깨닫고 바로 방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아니나다를까, 우주와 소이치로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커짐에 따라 목소리도 함께 커져가고, 우리들의 심박수도 빨라졌다.

{잠깐, 잠깐. 두 사람은 아직 안 왔다니까?}얼마 후 호텔 방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주가 보관하고 있던 키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없지? 8시에 만나기로 해서 미리 와 있을 줄 알았더니... 문자나 전화 한 통도 없구 말야. 흠.. 이건 무슨 냄새지?}아차! 미역국 냄새! 정말 엄청난 위기상황이라고 느낀 난 황급히 위기탈출을 시도했다. 우주가 호텔방 문을 열기 일보 직전, 소이치로가 들고 있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문은 열리다 말았고, 난 레이 언니에게 재빨리 그녀의 전화기를 넘겨 주었다.

{여보세요? 누님, 어디세요. 우주 형이 무진장 걱정하는데.}다행히 소이치로도 최대한 연기를 하며 우리의 비밀 작전을 숨기는데 일조했다. 짜식 이런 데 눈치 하나는 무진장 빠르구나, 누구랑 다르게 말야.

{어~ 지금 근처인데, 윤하랑 여자끼리만 볼 게 있어서! 좀만 더 있다가 와 8시쯤~}레이 언니도 그에 맞장구 쳐주며 최대한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분명 우주는 우리가 안에 있다는 건 생각 못했겠지? 난 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소이치로가 우주를 데리고 우리가 있던 층을 벗어나고 나서야 우린 조심스럽게 벽장에서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우리는 뭔가 거슬리는 냄새를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밥이 타고 있었던 거다!

"와악!! 탄다?!!"

겨우겨우 탈 뻔한 밥을 수습하고 모든 파티 준비가 다 되었을 쯤, 난 소이치로에게 우주를 데려오게 했다. 전화를 받는 소이치로의 목소리는 굉장히 지쳐 보였는데 아마 우주가 우리가 걱정되어 심하게 닥달한 듯 싶다.

"자, 이거 입어 윤하야."

그런데 우주를 맞을 준비를 하던 중에 갑자기 레이 언니가 옷 한 벌을 건네주셨다. 이게 뭔가 싶어 펴보던 나는 폄과 동시에 으악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뭐, 뭐에요 이 드레스는?!"

그것도 가슴골이 훤히 보이도록 앞이 패여있고, 등도 허전한데다가, 치마도 굉장히 짧으면서, 큰 리본들이 쓸데 없이 잔뜩 달려있는 엄청난 물건을 내게 입으라고 준 것이었다. 난 그녀가 준 이 요물을 어떻게든 퇴치하려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생일인데 이 정도도 못해주면 안 된다면서 어떻게든 입히려고 나를 잡고 놓아줄 생각을 안 하는 그녀 덕에 난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무엇보다 내가 그 옷을 입기가 싫었던 것은 전체적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그 옷과 대조적으로, 우주가 오늘 입고 있는 옷은 전체적으로 턱시도를 연상시키는 블랙 계통의 세미 수트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신혼 부부도 아니고 내가 굳이 입을 이유는 없잖아요-! 언니 분명 이거 노리고 있는거죠 그렇죠!!

"여튼 입어봐!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아니, 그래도 또 이런 거 했다가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런 일 당하면 어떻하라구요!"

게다가 바로 어제 있었던 그런 일까지 자꾸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내심 걱정이 되었던 탓에 난 함부로 이 옷을 몸에 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던지, 옷의 단추를 막 풀어헤치며 나를 압박해왔다.

"괜찮아, 우주의 반응을 보니까 절대 그런 일 없을거라니까-!"

"어떻게 확신해요?!! 꺄악 그만 벗-"

[드르륵]

"윤하야 나 왔어!!"

그런데 하필이면 우주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방에 들어오고 말았다. 왜 넌 내가 레이언니에게 강제로 옷이 벗겨지고 있는데 들어오고 그래!

"꺄악-!"

"어머! 빨리 나가 나우주!!"

"와악?!!"

불과 3초 밖에 안되는 시간에 세 사람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고, 레이 언니 때문에 거의 속옷만 입고 있던 난 또다시 트라우마가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아- 정말, 왜 자꾸 우주한테 노출된 모습을 보여주는거야...

결국 이렇게 된거 난 레이 언니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하고, 결국 그 메이드복인지 드레스인지를 입기로 했다. 우주의 생일이라는 점도 감안한 결정이었으므로, 내가 좀 양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나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기도 했으니 뭐... 흠 흠.

다행히 우주도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내 행복해 보였다. 하필 우주가 그 타이밍에 들어온 탓에 서프라이즈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생일 만찬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본 우주는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냐며 정말 기뻐해주었다.

"진짜 이쁜데. 윤하 너 당장이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마치 요정이나 천사같다는 우주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것은 내가 거의 여자로서 거듭나고 있다는 뜻이겠지. 얼마전까지만 해도 최소한의 거부감은 들었건만... 이제 그것마저도 없어진단 말인가.

"... 생일이고, 언니의 부탁이라서 친히 입어준 거니까 기쁘게 즐겨!"

분명히 얼마 전만 해도 녀석에겐 모든 것을 내주지 않은 영원한 친구로만 지내리라 믿었는데, 몸과 마음 사이의 괴리감이 점점 사라져감에 따라 그 다짐도 차차 무너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거울을 보는 그 순간 난 스스로를 보며 반해버릴 정도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은 바로 내 첫사랑의 이미지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내 모습들엔 그닥 흥미가 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가끔씩 이런 특이한 옷들을 입을 때면 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미칠 듯한 윤하에 대한 욕망에 참을 수 없이 마음이 요동쳤다. 하지만 아무리 내 자신을 만져보려고 해도 그것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일 뿐, 가질 수 없는 환상속의 존재가 되어버리곤 했다. 물론 며칠이 지나면 그 아쉬움마저 모두다 부서져 흩어졌지만...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슴당!}

나와 레이 언니가 단시간에 준비했던 음식은 조리가 잘 되었는지 남자 둘에게 대 호평이었다. 특히 우주는 자기 엄마가 끓여준 것보다 더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짜잔, 생일인데 좀 마셔야 하지 않겠니?"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이 갑자기 레이 언니로부터 튀어나왔다. 동으로보나 서로보나 맥주가 확실했다.

"윽, 저희 미성년자인데요?"

하지만 어떻게든 빼려던 나와는 달리, 우주는 그것의 등장을 매우 반기는 듯 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니, 게다가 안주도 이렇게 잔뜩 사왔는걸?"

설마, 아까 나한테 안 들키게 몰래 바구니에 쑤셔넣던 물건들이 저 안주들이었단 말인가요 언니? 땅콩에 오징어에 나초에... 마른 안주란 마른 안주는 총 집합이잖아.

"그리구 맥주는 별로 안 세서 괜찮아. 너희 곧 성인이잖니? 소이치로만 안 주면 되지 뭐."

나는 한사코 잔을 받기를 거절했으나, 우주의 애원하는 듯한 표정에 못이겨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놈의 생일이 뭔지, 파티도 괜히 해 준거 아닌가 싶네 이거. 아우, 그나저나 분명 언니가 맥주는 별로 안 세다고 했는데 ... 왜 이렇게 어질어질하지?

"으음... 우주야- 너 안어-지러-워-?"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난 눈앞이 흐려지면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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