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엇? 잠깐만, 진짜 타려구? 나 못타는 거 알잖아 윤하야~!!"
질질질 끌려가면서도 우주는 안 된다고, 못 탄다고 바둥거렸다. 난 불쌍함을 표출하려는 우주의 말을 최대한 무시하며 워터슬라이드 앞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도착하기 직전까지 우주는 계속해서 안된다며 못 탄다고 우겨 댔지만 결국엔 워터슬라이드의 꼭대기,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자, 한번만 눈 딱 감고 타면 돼. 못하겠어?"
"..."
우주는 난간을 꼭 붙든 채 달리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마치 잘못을 인정하기라도 한다는 듯 날 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알았어, 일단 탈 테니까. 기절하기라도 하면 알아서 업어가야된다."
그제서야 난 얼굴에 미소를 띌 수 있게 되었다. 우주가 내개 해 달라는대로 해준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녀석이 날 위해 자기 주장을 굽힐 수 있게 된게 더 기뻐서였다.
"걱정 붙들어 매셔!"
난 신이 나서 슬라이드 출발 지점에 자리를 잡았고, 우주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내 뒤로 와서 내 배쪽에 팔을 둘러 안 떨어지게 꼭 잡았다.
"간다, 꽉 잡아~!"
"우-와아아아악!!!"
안타깝게도 그 후에 우주는 워터슬라이드가 끝날때까지 악을 써 댔고, 그 때문인지 풀에 빠질 때 물을 좀 먹었다. 녀석을 파라솔 밑까지 부축해서 오자 헤롱헤롱한 우주를 보고 메이드 언니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난 별일 아니라고 하며 수건 하나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우주를 파라솔 밑에 앉혀 등을 팡팡 쳐주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우주는 천정을 보며 신음소리를 냈다. 자유낙하의 공포에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공포를 덤으로 겪었으니 제정신이 아닐 만도 했다. 한참을 천정만 보던 우주가 그대로 돌아서 누워버리자 난 우주에게 가까이 가서 속삭였다.
"괜찮아?"
녀석과 나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웠다. 그런데 그 정도로 가까운데도 우주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난 허탈하게 웃으며 녀석의 볼을 꼬집었다.
"으-."
"얼씨구, 아직 정신이 안 드나 본데."
난 우주를 바로 눕힌다음 조심스레 마사지 해 주기 시작했다. 아까 스탭분들이 하던 마사지를 생각하며 야무지게 녀석의 몸을 주물러댔다. 어라? 몸이 참 탄탄해졌네. 예전엔 키만 커서 허우대라는 말 많이 들었던 녀석이.
"기분 좋다..."
축 늘어져 있던 녀석은 약 5분 정도의 마사지 끝에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우주는 뒤에 있던 나를 슬쩍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깨 좀만 더 주물러주라. 너 손 촉감이 너무 좋아."
어... 어찌 반응을 해야 할까 싶다만, 보통 여자라면 뭐라고 반응했을까. 흠... 이러 생각외로 무진장 고민되는 선택지에 놓여 버렸는걸.
"내, 내 손이 당연히 부드럽지 그럼. 거칠리가 없잖아?"
으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맞는 반응이 아닌거 같은데. 그렇다고 깨 쏱아지게 말하는건 나로썬 절대 불가능이니까 이정도도 선방이야, 그래 선방!
그나저나 우주를 안마해주는 나를 보며 수근거리는 뒤쪽의 무리들이 자꾸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메이드 스탭들이 뭔가 자꾸 꾸미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물론 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몇 분 후에 깨닫게 되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던 나는 그만 우주의 어깨쪽을 꼬집어버리고 말았다.
"아얏!"
"헉, 미안해! 잠시 딴 생각 하느라!"
뭐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이 스탭분들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녀들로 인해 뜬금없이 내가 분노했고, 우주를 워터슬라이드로 떡실신 시킨 후 회복시키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윤하야, 마실 거 사다 줄까? 목 마르지?"
한참동안 어깨를 주물렀더니 슬슬 팔에 무리가 가던 찰나에 레이언니가 음료수를 제안했고, 당연하게도 난 그녀에게 음료를 부탁하게 됐다. 난 이것이 또 다른 미끼였음을 모른 채 우주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몇 분 뒤 매점쪽에서 걸어오는 레이 언니를 보고 있던 나는 그녀가 굉장히 위태위태하게 수영장 가로 걷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나다를까, 풀장 가자리를 빠르게 걸어오던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캔음료를 하늘로 내던지며 그대로 풀장에 빠지고 말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나 말고는 아무도 그녀가 미끄러지는 걸 못 본 상황이었다.
"언니!!"
난 너무나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녀가 빠진 풀장으로 바람처럼 뛰어들었다. 나중에 우주가 말해준 표현을 빌리면, 한마리의 물개 같았다고.
"괜찮아요?"
그러나 생각보다 풀장은 그리 깊지 않아서 발을 바닥에 딛으면 내 쇄골이 보일 정도의 깊이였다. 어? 그럼 당연히 레이언니는 나보다 키가 크기 때문에 빠질리가 없는데?
어째서일까, 내가 뛰어든 그곳에 그녀는 온데간데 없었고, 나 홀로 외로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가슴을 감싸고 있던 비키니의 느낌마저 함께 사라진 이유는 도대체...
"꺄악!!"
난 너무나 놀라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두 팔로 내 가슴을 가렸고, 내 목소리에 놀란 우주가 황급히 달려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내가 입고 있던 비키니가 없어져 가슴쪽이 노출되었던 것은 확실했다.
"윤하야 왜 그래?!! -헉?!"
놀라 달려온 우주는 되려 내 반 나체를 보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오 절대로 이 녀석에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에에!
"이, 일단 이걸로 가려!"
물론 팔로 가리고 있었지만 모두 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우주는 그런 내 모습이 더 야하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린 채 간신히 수건을 건네주었다. 난 잽싸게 수건으로 상체를 가렸고,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까 생각했던 그 음모들, 그것은 실로 사실이었나보다. 놀라서 달려온 스탭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곳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고, 탈의실에서 이야기해주는 그녀들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 점장님의 뜻대로 되었네요, 부끄부끄 섬머랜드 대작전!}
{하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 아가씨의 수영복을 훔쳐간 거, 생각하시는대로 점장님이 맞으니까요.}
{네-?!}
젠장, 결국 오늘 일어났던 해프닝은 모두 레이 언니 때문이었다는 말이었다. 일부러 내가 볼 때 물에 빠졌고, 나 몰래 수영복을 훔쳐서 도망가버리고 우주가 나한테 오게 만들다니. 게다가 이런 말까지 덧붙이며 나를 긴장시켰다.
"오늘 우주가 윤하 세미누드를 봤으니.. 밤에 조심해야겠네. 큰일 치를지도 모른다?"
"와악!! 정말! 그럴리 없어요옷!!"
물론 그 말에 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손을 휘저을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다행히도 그날 밤, 레이언니의 맨션에서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말 때문에 난 밤에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덕분에 오다이바 행 유리카모메의 제일 앞좌석에 앉아 졸 수 밖에 없었다. 우주와 단 둘이었다면 안심이 안 되서 졸지도 못했겠지만, 레이 언니와 함께였으므로 안심하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어제 섬머랜드에서 헤어지면서 레이 언니가 돌아가는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해 주었으므로, 난 화를 풀고 그녀의 부끄부끄 대작전에 대해 일체 말 안 하기로 결심했다.
헤어지면서 리리씨와 메일주소를 교환한 나는 넷상에서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고, 우주 녀석은 엉겁결에 모든 메이드 스탭들의 주소를 따 온듯 했다.
오다이바에 도착한 우리는 레이 언니가 점심을 사러 간 사이에 잠시 근처의 게임센터에 들르게 되었다. 시간이 남아서 손이나 풀어 볼 요량으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오락기 근처에 꽤 모여있었다. 개중에는 여행 첫날 나를 봤던 사람들도 있는지, 알아보는 이도 더러 있었다. 나의 닉네임인 'Debreath'가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니 꽤나 유명해진 모양.
나는 지갑에서 자연스럽게 카드를 꺼내 기계에 넣었다. 이건 소이치로가 헤어지면서 나에게 준 선물이므로 여행중 이걸로 청권하는건 처음이므로 승패는 0/0 이었다.
{아앙?! 뭐야 누나가 왜 여기있는거임?!} 그런데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게임을 시작하려던 나는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반대쪽 플레이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반대쪽에 누가 앉아있는지 확인한 나는 녀석의 닉네임을 확인하고 나서 놀라 소리쳤다.
{사신의낫... 소이치로?!!}
이럴 수가, 이번 여행은 뭐 이리 인연이 굉장하담. 반대쪽에 앉아있던 녀석은 다름아닌 소이치로였다.
{이때가 기회다! 기습 초풍신!!}{왁? 야, 너 치사하게 이러기야?!} 그런데 이 놈, 어째 날 다시 만난것에 놀라긴 커녕 오히려 게임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덕분에 내 캐릭터는 시작하자마자 공중으로 떠올라 마구잡이로 맞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힘겹게 녀석과의 전적이 3:2인 채로 끝을 내고 나니, 레이 언니가 점심을 사 와 우리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소이치로를 보더니 엄청 반가운 듯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품에 안았다.
{오랜만이네요 소이치로군~! 어쩌다가 오다이바까지 왔어요?}{워억! 누님!! 잠깐 이 팔좀 치우고 얘기하삼!!}그나저나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에 우주가 말했던 두 사람이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났다. 뭐 확인할 방법도 없고 하니 일단은 지켜보고 난 뒤에 진실을 파헤쳐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서 여기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또 있었으니, 게임을 하던 나와 소이치로의 아이디를 확인한 다른 청권 플레이어들이 우리를 쫓아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레이 언니가 사온 점심을 먹으면서 오다이바 주변을 둘러보는데, 여기 참 괜찮은 곳이었다. 레저를 위한 공간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주거를 위한 공간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업무 중심지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한게 묘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관람차도 있고... 저기 저 건물은 뭐에요?}마치 최종 보스라도 튀오나올 것 처럼 우뚝 솟아있는 기하학적 모양의 건물을 보고 내가 묻자 소이치로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저기 진짜 최종 보스가 살고 있지.}
{뭣 진짜? 어떤 놈인데!}
그러나 내가 속았다는 걸 알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고, 난 녀석의 등짝을 가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순진한 나를 놀려먹으려고만 한다니까.
{저기에 말이지, 후지 TV의 보스 국장이 있다고! 직원들한텐 공포의 국장으로 불림!}욘석아, 공포가 무엇인지 느낄수 있도록 때려 주리 앙?
{진정하고~ 일단 말 나온 김에 후지TV부터 들렀다 가자.}으르렁대는 날 말리며 레이 언니는 우릴 후지TV로 이끌었다. 시간을 때우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모양인지, 그녀는 이 곳 이후에 갈 만한 장소를 생각해보고 있는 듯 했다. 이런저런 전시품목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소이치로가 금세 지겹다고 투덜댔다. 이 녀석은 게임 할 때만 강한 녀석인가. 하여간 요즘 애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