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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45화 (45/188)

45화

"음 그나저나 내일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신가요?"

재빨리 내가 산 물품들의 행방을 묻고 싶었으나 일단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라도 사기라는 조짐이 보이면 바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내일 도쿄 섬머랜드에 가려구요. 여름하면 역시 워터파크잖아요?"

레이 씨는 내 말을 듣고 있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주먹과 손바닥을 탁 부딪치며 말했다.

"그럼 저도 함께 갈까요? 마침 내일부터 금요일이라 휴가를 내면 한 3~4일정도는 여러분과 함께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굳이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레이씨는 기꺼이 우리와 함께 가겠다며 제안했다. 나야 뭐 함께 가면 이동이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에 나쁠 것 없어서 흔쾌히 OK했다.

"자 어서들 들어와요. 사양하지 말고."

게다가 우리가 방 잡는게 힘들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자기 집에서 재워주겠다며 우릴 집까지 끌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 며칠 전에 처음 본 여행자에게 이런 따뜻한 대우라니, 우리가 커플 사기단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구.

"실례하겠습니다..."

게다가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렇게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레이씨를 잠시나마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거실 한쪽엔 내가 샀던 물건들이 박스에 담겨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물건들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둘러본 집 안은 정녕 메이드 카페 점장의 집이 맞는건지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햇다. 거실만 최소 20평은되어 보이는 이 굉장한 아파트는 아무리봐도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비쌀 것 같았다. 그것도 이 땅 값 비싸다는 시부야에서!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레이씨는 그 곳 뿐만 아니라 전국 체인으로 메이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CEO라고 했다. 그것도 나이가 이제 갓 22살인데 말이다. 무, 물론 절대 돈 때문은 아니었고, 너무나도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모습 때문에 좀더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졌다.

"우리 이제 많이 친해졌는데 '~씨'보다는 '언니, 동생'이라고 부르는게 어떨까 싶은데... 어떠세요?"

그녀가 호칭 변경을 요구한 덕에 생각났는데, 내가 그동안 언니라는 단어를 쓴건 손에 꼽을정도였다. 뭐 쓸일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원래 남자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녀와 좀더 가까운 호칭을 쓰려면 이거 하나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의외로 언니라는 단어가 입에 착착 붙었다.

언니라고 부르는 날 보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사람들은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말을 잘 놓지 않는다던데, 이렇게 보니 우린 꽤 친해진 게 맞긴 하는 모양이다.

"자 다 됐습니다~ 레이표 특제 전골!"

"잘 먹겠습니다~!"

최고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그녀의 전골을 먹으니 굶주렸던 위장이 사르르 녹는것만 같았다. 저녁 대용으로 먹은 게 달랑 타코야끼 몇 개 뿐이었기 때문에 더욱 맛있었다. 그녀가 최고의 메이드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었는데, 어쩌면 그녀의 경영 철학이 자기 자신부터 1등급 메이드가 되자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메이드라 함은, 요리도 최상급이어야죠!"

네, 최고에요 언-! ... 그래 언니!

*

다음날 출근해서 카페에 들린다고 한 레이 언니를 워터파크 안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일단 헤어진 상태였다. 다행히 그녀가 알려준 대로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가니 목적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린 여행에 현지인 가이드 유무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 다시한 번 실감하며 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워터파크 안으로 신이 나서 돌격했다.

엄청나게 큼지막한 크기는 아니었으나 실내 워터파크에 불구하고 없는 게 없었다. 특히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다름아닌 워터 슬라이드! 물론 우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일단 기다리자, 레이 누나 오실 때 까진 잘 보이는데에서 기다려야된다구."

이 한마디에 우주의 마음을 읽은 난 씨익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물론 이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

"워터슬라이드는 그래도 후지큐 랜드의 롤러코스터보다는 낫지 않아? 설마 이것도 못 탄다고 빼는건 아니지?"

그러나 우주는 자기도 할 말이 있었는지 뾰루퉁해져서는 반박했다.

"어이구, 그렇게 용감한 윤하 공주님이 어제 '최공전율미궁'에서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으셨나요~?"

아뿔사, 무의식중에 잊고 싶은 어제 일을 떠올려버린 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하필이면 우주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만약 내가 재희라는 걸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부끄러워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그건."

대응을 해야 하는데,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린 난 우물쭈물 하며 우주를 바라보기만 하다 결국 우주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 젠장... 이거야 뭐 예전에 재희에게 말빨로 억눌리던 시절이랑 다를 게 뭐람. 그동안 난 아직도 이런 약점 하나 보완하지 못했다니, 정말 반성해야겠다.

"뭐, 공주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내 등은 언제든지 빌려줄 수 있소만."

기세등등해진 우주가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사극체로 날 놀리자, 난 분한 마음에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이를 부득부득 갈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또 생각없이 말하려다가 역으로 몰릴 게 뻔했으니까. 난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한마디만 툭 내뱉었다.

"됬네요! 내 발로 잘 걸어다닐 수 있거든?!"

콧방귀를 흥 뀌고 나서 홱 돌아 워터슬라이드 쪽으로 가려는데, 누가 날 불러세웠다.

"윤하야~"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 누군가 했더니 레이 언니였다. 오랜만에 가벼운 메이크업만 한 그녀는 홀로 서있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누구지?

"어..? 설마?"

난 골똘히 생각한 후에 그 뒤쪽 사람들 중 한명의 이름이 퍼뜩 기억이 났다. 분명 본 적도 있고, 직접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저 익숙한 목소리도 그렇고, 확실히 내가 기억하는 그녀였다.

"리리 씨?"

"오, 용케 기억하고 있었구나?'

레이 언니는 내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가게에서 일하는 메이드란 것 까진 알아챘지만, 리리 씨처럼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하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리 씨가 내 옷을 세탁해 주었던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내가 주로 사용하는 '청권5'의 캐릭터와 이름까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어쩐일로 다들 오셨어요?"

이렇게 미녀 군단을 끌고 온 이유가 궁금해진 나는 레이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금요일이라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찾을 수도 있는데 이러면 가게는 누가 지킨담.

"아, 오늘 그냥 하루 휴점했어. 우리 스탭들 날도 더운데 일주일에 6일씩 출근하느라 피곤할 것 같아서 이렇게 놀러오는 것도 좋을 것 같더라구."

우와 저렇게 마음대로 쉬어도 되는거엿어?! 그래도 직원을 한 가족처럼 대하는 언니의 마음씀씀이는 정말 멋졌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이 났는지 스탭들은 모두 깔깔대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나는 마냥 웃고 있을수만은 없었는데, 같이 오신 메이드 스탭분들의 몸매가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다들 화려한 비키니를 입고 있는 데다가 그 특유의 눈웃음, 그리고 멋진 S라인 때문에 내가 밀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읏, 미모 경쟁에서 밀릴것 같다니...!'

그런데 문득 정신차려보니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뭐지 나 분명 여기 놀러왔는데 왜 저분들이랑 미모 경쟁을 하려고...

{자 가죠 아가씨~}

{응? 네? 어딜요?}

허나 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스탭들에게 팔장이 끼워진 채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어어? 어? 잠깐만요?! 어디로 끌고 가는거에요!

'그리고 아가씨라니? 여기까지 와서도 직업정신이 너무 투철하신 것 아니에요?!!'

우주한테 공주 대접이란 대접은 지겹도록 받아왔던지라, 메이드 스탭분들이 아가씨 대접 해주는 것 정도는 내게 큰 불편함을 주진 않았지만 나와 우주 옆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녀들 덕분에 워터파크 내에서 엄청난 시선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가보면 우리 엄청난 부잣집 자제들인 줄 알겠네."

우주는 지금 이 상황에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지 어안이 벙벙해서는 스탭들이 가져다 주는 음료수와 간식을 무의식중에 받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마사지 해 주겠다는 그녀들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서는 엎드린 자세로 마사지까지 받고 있는게 아닌가! 난 내가 왜 우주의 헤벌쭉한 모습에 발끈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화가 나고 있었다.

{아가씨도 엎드려 보세요. 등에 선크림이랑 오일 바르면서 마사지 해 줄게요.}{네? 잠시만- 왁! 괜찮아요! 굳이 안 해 주셔도~!!} 그러나 내 속도 모르고, 스탭분들은 나를 태닝의자에서 끌어내려 바닥에 눕히더니 등 쪽에 위치한 비키니 끈을 화끈하게 풀어주시는 친절함까지 보여주셨다.

{엄마얏!}

{와~ 완전 이뻐! 피부 완전 부드러운데요 아가씨?}그러면서 내 등에 두명이 붙어 문지르고, 조물락거리고, 부비고, 마사지하는데 여간해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몰려오는 탓에 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물론 움직이면 가슴보인다고 단번에 그녀들에게 제지당했지만... 여튼 그렇게 박장대소하고 있던 내 귀에 확 하고 들어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우주였다.

"우왓?! 잠시만요, 거긴-!!"

순간적으로 흥분한듯한 우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 이성이 끊어질 뻔 했다. 하지만 난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스탭들이 내 배쪽을 모두 마사지해줄 때 까지 참은 후 끝나자마자 우주에게 돌격했다.

'어쭈, 자? 잠이 오지 지금?'

녀석은 마사지의 기운에 노곤했는지 얼굴에 수건을 덮은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이자식, 어제 그렇게 레이 언니 집에서도 잠만 자 놓고 또 자는거야? 괘씸한 마음에 난 손가락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수직으로 찔렀다. 받아라 지건!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벌떡 일어난 우주는 얼굴의 수건을 바닥에 홱 던지고는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누구야-!!- 윤하구나."

엄청 화가 나서 일어났는데, 범인이 나인 걸 보자마자 우주는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래 나요, 아주 잠이 오지 그냥?"

내가 비아냥거리자 우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웃음으로 대충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난 이번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날 내비두고 스탭들과 히히덕거린 우주에게 벌을 내려야 할 때임이 분명했다.

"자, 워터슬라이드 타러 가자."

"워터슬라이드?"

우주가 질색을 했지만 이번엔 봐줄 마음이 없었던 나였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에게 공포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나에게 엄청 무서웠던 '최공전율미궁'의 복수를 겸해서 좀 전의 일도 보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난 우주의 팔을 덥석 잡아 워터슬라이드쪽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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