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8. 만남은 녹색신호, 진실은 어둠속에>
꿈을 꾼 그 날로부터 이틀 후인 8월 5일. 전날 야간 버스를 타고 신주쿠에 도착한 뒤 관광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주변 산책을 하며 하루를 쉬었다.
운 좋게도 신주쿠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재일교포 친구들 덕에 마치 MT온 듯 한 기분으로 놀았던 터라 여행이 더 즐거워졌으며 그 아이들로부터 오늘 갈 '후지큐 하이랜드'를 즐기는 법을 배워두었기 때문에, 난 오늘 일정이 너무나도 기대됐다.
"우주야, 진짜 미친듯이 탈거다? 괜찮겠지?"
그러나 어째 이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들을 사악 훑어본 우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게 맞다면, 이 녀석 분명히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저 엄청난 롤러코스터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끄응... 우리, 저건 안 타는거지? 완전 위험해보이는데."
약간 겁먹은 듯 한 우주의 표정을 보고있자니, 불쌍하다기 보다 어째 더 괴롭혀주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크으~ 어째 이렇게 귀여운 표정을 하고 있는거니 우주야!
"왜? 당연히 타야지! 특히 여기의 3개 놀이기구들은 꼭 타야 한다구."
내가 놀이기구를 워낙 좋아하는 탓에 혼자서라도 모든 놀이기구를 타야겠다는 집념으로 온 놀이공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유명한 놀이기구 3종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난 우주를 넉다운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오늘을 즐기겠다는 각오로 힘차게 전진했다.
이 후지큐 하이랜드는 무섭기로 유명한 놀이기구 '에에쟈나이카', '도돈파', '최공전율미궁'등 3종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후지산이 바로 옆으로 보이는 일본의 유명 테마파크이다. 이미 국내의 놀이공원이라고 불릴만한 곳은 수도 없이 다녀봤던 나였기에, 해외 놀이공원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그럼... 이것부터 타 볼까."
마음같아서는 저 하늘높이 솟구친 롤러코스터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우주를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의미에서 약한 것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나 자신의 인자함과 자비로움에 다시한 번 감탄하며 난 바이킹을 향해 우주를 이끌었다.
*
약 세시간 후, 개중에는 우주에겐 힘들었을 법한 놀이기구들이 몇몇 있었지만 내겐 너무나도 약한 놀이기구들을 전부 섭렵하고 나자 결국 최후의 3종 어트랙션만이 남았다.
"좋아, 그럼 '에에쟈나이카'부터..."
허나 세시간동안의 중간강도 놀이기구를 타는 것만으로도 지쳐버렸는지, 우주는 그닥 원치 않는 표정이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멋있었던 녀석이 어쩌다 이리 초췌해졌는지. 뭐 원인을 따지자면 나 때문이겠지만...
"저.. 윤하야 나 잠깐 화장실 좀."
안색이 좋지 않아서 배가 아픈 것으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소꿉친구인 내가 녀석의 본심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배 아픈 척 하며 저 공포스러운 어트랙션에 올라타는 것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피하게 할 순 없지!
최고 높이 76미터까지 올라가는이 초고공 롤러코스터는, 그 높이와 낙하 속도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좌석을 자랑하는 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트랙션의 이름을 번역하면 관서지방 사투리로 '좋지 아니한가'정도의 뜻이겠는데, 나 같은 사람 아니고서야 절대 이 어트랙션을 보고서 그런 말이 나올리가 없었다.
'특히 우주같은 애들이 더욱 그러겠지만...'
그렇지만 무섭다고 다 피해선 안 되는 법. 남자가 말이야 깡다구가 있어서 무서운 것도 좀 참고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법 아이간!
"안돼, 이건 꼭 다야돼. 아님 이거 말고 도돈파나 최공전율미궁중에 하날 꼭 타던가."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우주는 몇 분간 고민하며 에에쟈나이카와 도돈파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이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결심이라도 한 듯 내게 이야기했다.
"그.. 최공전율미궁에 같이 들어갈 테니까 롤러코스터 2개는 피하게 해주라..."
그래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우주 녀석은 결국 그나마 나은 공포체험관인 최공전율미궁에 들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하기사, 고소공포증이 있는 니가 이런걸 탈 수 있을리가 없지... 결국 롤러코스터는 나만 타기로 결정했다.
우주가 줄을 서주기로 했기에, 내가 허기지고 지쳐있던 녀석을 달래는 차원에서 먹거리를 공수해 오기로 결정했다. 뭘 살지 고민하던 나는 먹기도 편하고 허기도 채워줄 있는 핫도그로 골랐다.
"약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데... 이제 도돈파 쪽으로 가 있을까?"
"나야 고맙지!"
핫도그를 다 먹고 나서 다시 할 일이 없어진 우주가 기특한 얘기를 했다. 아마 내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놀이기구들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려는 배려인 듯 싶었다. 물론 나야 고마운 일이지만 기다리는 우주 입장을 생각해보면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심심한 우주와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앞의 두 롤러코스터들을 제압해야겠군.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심심하면 과자라도 까먹고 있지 뭐."
아아... 우주야 너 지금 고개숙인 남자의 뒷모습을 하고있구나... 내가 최대한 빨리 갈게!
*
내가 그렇게 다짐하고 약 30여분 뒤, 도돈파의 출구에서 우주를 만났을 때, 녀석은 어찌나 그리웠던지 내 손을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그러나 난 방금 타고 내려온 롤러코스터의 파괴력에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여서 우주가 손을 잡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후와. 진짜 완-전 재미있었어. 우주 너도 같이 타면 좋았을텐데."
마지막 목적지라고도 할 수 있는 최공전율미궁으로 향하면서 내가 신나서 얘기하는데, 우주는 그 얘기만으로도 무서웠는지 몸서리를 쳤다. 하여간 짜슥이... 이럴 땐 어찌보면 재희가 더 믿음직스럽다니까.
꽤나 먼 거리를 걸어 도착한 그 곳은 정말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려버릴 것만 같은 병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주는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쉬었고, 난 어찌 말로 표현 불가능한 전율을 느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완전 재밌어 보여!!' 정도?
"좋아. 주의사항이라...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 등..."
뭐 외관만 봐도 귀신의 집 스타일의 공포 어트랙션임은 분명했다. 당연히 주의사항도 심장이 약하신 분은 자제를 요하는 글이었을 게 뻔했다. 주의사항을 대강 읽어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직원이 다시한 번 물어봤다.
{혹시 심장질환을 앓고 계시거나, 심장쇠약이 있진 않으신가요?}당연히 내 대답은 No. 우주는 어땠을 지 모르겠지만, 난 무서운 걸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 머리속엔 오로지 '전진'이라는 명령으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내부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 쯤에 난 겨우 우주의 손에서 약한 떨림이 느껴지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이녀석, 언제부터 떨고 있었던거야.'
그러나 벌써부터 이래서야, 무려 900m에 다 도는 데만 60분가까이 걸린다는 코스를 어찌 다 돌려고 이러는지.. 심히 우주의 안위가 걱정이 되는 나였다.
그렇지만,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난 너무나 빠른 시간 뒤에 깨달아버렸다. 우주를 걱정하기는 커녕 내가 되려 겁먹어 버릴 정도로, 이 '최공전율미궁'은 너무나도 무서웠다아-
"-아아악! 꺄아아아아악!-!!!"
"으악-!! 악!!"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과 우리 다음에 들어온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사방팔방으로 울려퍼졌고, 그 중엔 우리의 비명소리도 중간중간 섞여있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울음소리도 심심치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윤하가 된 이후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기는, 예전에 처음 우리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재희의 반 나체 해프닝으로 인해 소리질렀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절반 가까이 지나갔을 때 쯤 내 목은 거의 쉬기 일보 직전이었다. 겁에 질린 나머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우주의 바로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그런지, 우주가 오히려 겁이 없어진 듯 묵묵히 내 앞에 서서 날 이끌고 있었다.
'나 분명 이런거 아무리 봐도 소리 하나 안 질렀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무서운거야아아아....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무서워!!!'
난 최대한 우주에게 밀착해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걸어갔고. 우주도 날 앞에서 최대한 감싸며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이쯤되니 처음에 들었던 이 어트랙션의 설명이 대강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 900m밖에 안되는데 왜 한 시간이나 걸리나 했다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냣!!!'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고 무서움을 이겨내려 애썼지만, 남은 400m를 지나면서도 난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댔고 마지막 출구 직전에 한 스태프의 눈속임에 제대로 당해 결국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난 '최공전율미궁'을 우주의 품에 안긴 채로 나와야만 했다.
그 뒤 전철에 탑승하기 전까지 난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했고, 결국 업힌 채로 우주의 뒤통수만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혀야 했다.
*
우리가 정말 우연히 레이씨를 다시 만난 건 그날 저녁이었다.
후지큐 하이랜드에서 쭉 전철을 타고 오던 우리는 다음 날 계획되어 있던 워터파크에 가기 위하여 신주쿠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저녁을 못 먹어서 간식이라도 먹을 겸 타코야끼를 사 먹으려고 했는데, 하필 수중에 현금이 없었던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뒤를 돌아보니 레이 씨가 서 있었다. 내가 그 때 레이 씨를 보고 든 생각은 딱 두가지. 하나는 '내 물건들은 잘 있나?' 였고, 다른 하나는 '이 분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만 나타나시는구나..'였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서 기뻐요 여러분~"
레이 씨는 엄청 기뻤는지 우리를 한 번씩 꼬옥 안아주고는 배시시 웃었다.
"에.. 그나저나 퇴근하는 길이셨나요?"
내가 이런 질문을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그녀의 복장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눈에 확 띄는 메이드복이 그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의 메이드복이 그때와는 다르게 그나마 조금 얌전한 편이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