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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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가츠가타이야 신사에 도착하자 전날 밤에 보았던 사슴과 사슴 먹이가 수도 없이 많이 보였다. 우주가 쥐고 있었던 그 동그란 물체는 바로 '사슴 센베'라 불리는 과자였는데, 하나에 50엔정도 하는 사슴들 간식이었다. 원래 이 나라라는 도시에 사슴이 많은 탓인지, 신사 주변의 공원엔 온통 사슴 천지였다.
"낮에 보니까 이쁘긴 하다. 수가 엄청 많다는게 흠이긴 해도..."
쭈욱 걸어가다 보니 신사의 입구라는 것을 알리는 도리가 그 붉게 물든 두 다리로 떡 하니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딱 알수 있는 눈에 확 띄는 디자인이었다. 얼마 더 나아가자 또 사슴들이 잔뜩 있었다.
"우왁! 우주야, 센베이좀 더 줘봐~!!"
계속 사슴들에게 센베이를 나누어주는데, 생각없이 주다 보니 사슴들이 다 가기도 전에 센베이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 놈의 사슴들이 내 옷을 죽죽 잡아당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오늘 입고 나왔던 옷이 얇은 티셔츠였던 관계로, 찢어질까봐 걱정이 된 나는 황급히 우주가 들고 있는 센베이를 낚아채 내게 달라붙은 사슴들과의 거리를 두었다.
겨우겨우 떼어낸 사슴들은 그것까지 다 먹고 나더니 저만치 떨어져 과자를 주고 있던 커플에게 우르르 몰려가 또다시 받아먹기 시작했다. 이런 인간 속세에 찌든 사슴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사슴들을 눈앞으로 스쳐보내며 신사 한 켠에 도착하자 뭔가 나무판자들이 잔뜩 걸린 희안한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하트와 '영원히', '사랑해' 등의 오글거리는 멘트들이 가득한 소원 나무판 같은 것이었다.
'사랑 전설이란 말이지. 우주가 쓸데없는 짓을 할 것 같으니 빠르게 지나가야...'
그러나 내 은밀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그 짧은 시간에 짧은 일본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해석했던지, 갚자기 앞으로 가던 내 팔을 턱하니 붙잡았다. 엄청난 제동력에 하마터면 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물론 우주가 가뿐하게 받아준 덕에 엉덩이에 멍이 드는건 면했다.
"왜, 왜그래?"
"이거 하자 윤하야. 왠지 굉장히 하고 싶어 이거, 그렇지 않아?"
"아니야 굳이 안해도 될거 같은데, 왜 굳이-"
아- 젠장,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힘으로 날 이기려고 하기 시작한건지... 그 때문에 내가 힘으로 이기는 예전의 그림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대로라면 우주를 이기려면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아니 한재희도 그렇고 왜 내 주변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격해?!
"됐다."
우주가 기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었다. 수많은 나뭇판자들 사이에 우리의 이름이 새겨진 판자조각이 떡하니 걸려 있는 걸 보니 약간 가슴이 아팠다. 만약 이루어진다는 생각도 안 한 이런 사랑전설 따위에 하느님이 힘이라도 쓴다면 정말 우주와 연인사이가 되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주와 정말 친구로만 지내고 싶었지만, 오늘 나는 그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우주♡서윤하라니... 하아...'
그 이후에 200엔을 내고 점괘를 보고 나서야 우리의 나라 관광은 모두 끝이 났다. 점괘를 뽑아 나온 '대흉'이라는 글자 때문에 놀랐지만 나무에 묶어놓고 왔기 때문에 별 일 없으리라 믿고 도쿄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부시럭]
'물론 다시 뽑았을 땐 '대길'이 나왔으니까, 괜찮겠지...' 라고 주머니속의 점괘를 만지작거리면서 난 생각했다.
*
다시 도쿄로 돌아갈 때 어떤 수단을 이용할 지 고민하던 나와 우주는 가격도 저렴하고, 수면시간도 줄일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과연 이 방법이 절약한다는 면에 있어선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나, 편의성과 안락함에 있어서는 별로 추천할만한 코스는 아니었다. 뭐, 돈 많고 편하게 흔들림 없이 이동하고 싶다면 역시 신칸센을 타는게 최고니까.
솔직히 난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잘 수 있는 능력을 가져서 버스를 타나 신칸센을 타나 그게 그거였으므로 별 생각 없이 가까운 버스 터미널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편히 자면서 도착할 수 있을거라 믿었건만, 예상외로 내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가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 난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어째 눈을 떠 보니 밤이 아니라 낮이었고, 버스가 아닌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 자다가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닐지 싶어 약간 걱정은 했지만, 이내 내 의지와 다르게 돌아가는 시야에 잡히는 익숙한 모습에 안도하게 되었다.
'아우, 아저씨구나..'
운전석에서 차를 운전하던 사람은 다름아닌 아저씨. 일 주일 전 여행 출발 전에도 꿈에서 한 번 봤던 그리운 모습이었다. 아저씰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갑자기 많아졌다. '설마 아저씰 만날 수 있을 거란 예시라도 되는걸까?', '이제 뭔가 중요한 얘기를 들을 수 있으려나?', '이 꿈이 사실은 꿈이 아니라 아저씨가 내게 계시를 주는 거라던가...' 등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내 막연한 기대였기 때문에 가능성도 그만큼 희박했다.
그나저나 어째 어딘가를 가고 있는 부녀의 모습 치고는 대화가 너무 적었다. 꿈 속에서 난 말할수 없었지만 마치 귀마개를 끼고 있는듯 한 고요함에 나도 모르게 따라 침묵하게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지, 침묵을 깨고 윤하게게 말하기 시작한 건 아저씨였다.
"윤하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댔지...?"
그러나 어째 침묵으로 일관하는 윤하를 보니, 굉장히 화난 상태인 것 같았다. 웬지 익숙한 느낌의 윤하를 보며 잠시 생각해 보니 이게 언제쯤인지 느낌이 딱 왔다.
'아, 윤하가 우리집에 맡겨지게 된 그 날인가?'
내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지금, 아빠의 정말로 친한 친구의 집으로 가고 있거든... 당분간 아빠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윤하 널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야... 아빤 정말 헤어지기 싫은데 우리가 좀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년 동안은 해외에 가 있어야하거든...? 그러니까 거기서 아저씨, 아줌마 말 잘 듣고... 거기 있는 네 또래 친구와도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던 아저씨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시려는데, 난 무심코 본 백미러에서 가슴아픈 장면을 보게 되고 말았다.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에, 내 가슴이 격하게 요동쳤다.
"절대 혼자라고 기죽지 말고, 절대 엄마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절대 힘든 일 혼자 떠안으려 하지 말고... 꼭 전화하렴. 아빠가 언제든지 무슨 어리광이든 다 받아줄 테니까. 꼭, 꼭! 전화해야 한다? 그리고... 네 친구와 서로 도와주며 잘 지내렴... 녀석이 그래 보여도 너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많은 도움을 줄 거란다."
이런 힘든 마음을 업은 채로 우리집에 왔었던 거구나... 그래서 그 때 그렇게 표정이 어두웠고, 윤하가 헤어진 후 눈물을 쏟았던 이유였어. 나와 아저씨가 처음 만났을 때 나의 변한 태도에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했던것도 다 이해가 간다.
"... 몰라, 알아서 할 거야."
하지만 엄청나게 까칠한 태도로 반응하는 윤하를 보며 난 생각했다. 지금 윤하의 마음은 거짓이며 그녀도 이를 악물고 이별의 슬픔에 대처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힘든 시기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아저씨가 진짜로 미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애정표현 하나 없이 차가운 부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빠랑은... 다신 웃지 않을거야."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아내를 잃고 딸을 친구에게 맡겨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비수가 되어 깊숙히, 깊숙히 꽃혔다.
"다신 같이 놀지도 않을 거고."
안돼, 그렇게 말하지 마 윤하야! 그러면 너 밖에 없는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지잖아...
"다신 손도 잡지 않을거야...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아빠가 아내를 죽게 내버려두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어린 윤하에게는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고, 결국 아저씨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버리는 일종의 안정을 위한 도피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윤하는,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한 걸지도 모른다. 다만 어려서 그 방법이 가족에게 상처를 입혔던 것 뿐인 것이다.
"미안하다 윤하야... 아빠가 미안해..."
아저씨는 마냥 눈물만 흘리며 묵묵히 운전만 했다. 곧 익숙한 풍경들이 차창밖으로 보였고, 난 꿈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도 무의식중에 알아채고 있었다. 분명 이 다음에 이어질 기억은 저번에 꾸었던 그 꿈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차가 천천히 멈추며 난 시야가 흐려짐을 느꼈다.
'계속되는 꿈을 보면... 아저씨와 윤하 만들어진 골을 내가 대신 짊어지는 느낌이 들어...'
아저씨를 너무나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곧 정신을 잃듯이 난 꿈에서 깨어났다.
<7. 여행은 핑크빛, 예감은 적색신호> End
============================ 작품 후기 ============================
+14.07.09 -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