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럼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은 나라로 가자. 그게 낫겠지?"
"응. 교토에서도 충분히 볼 거리가 더 있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잖아."
오랜만에 방 2개 딸린 호텔에서 묶게 된 우리는 거실에 누워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아직 2주 가까운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워낙 칼같이 일정을 맞추려는 나 덕분에 우주가 평소와는 달리 약간씩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피곤해보이는 우주를 위해서 보양이라도 해줘야겠다 싶어서 사비로 룸 서비스를 불러 영양만점 랍스터를 주문했다. 녀석은 누가 시킨 거냐며 놀라더니, 내가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를 와락 안았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을 당한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고마워... 안그래도 피곤해서 엄청 먹고 싶었는데. 역시 윤하는 센스쟁이라니까."
내 배려가 우주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꿉친구기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 아는건 당연했지만 그래도 고맙게 받아주니 기뻤다.
랍스터를 다 해치우고 나서 조금은 이른 잠을 청했다. 시계는 이제 겨우 9시경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내일을 위해 휴식한다는 생각으로 하루만 푹 쉬는게 현명하다 판단되어 내린 결정이었다.
*
다음날, 새벽부터 예상치 못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는 분명 약한 비라고 했었는데, 하여간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덕분에 이른아침 행동을 개시하려던 우리의 계획에 제동이 걸려버리고 말았다. 우의나 우산 같은 걸 준비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만 가득했다.
그렇게 점심 시간 다 될 때까지 고민만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니 시간이 굉장히 아까워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현관으로 향했다.
"이렇게 앉아있어 봐야 시간만 계속 가겠다. 내가 편의점 가서 우의라도 사 올게."
"어, 어? 안돼, 우주야 지금 비 많이오-."
만류할 새도 없이 우주는 문을 열어놓은 채 호텔 복도로 뛰쳐나가버렸다. 내가 고개를 돌려 문을 봤을 땐 이미 문이 열린 채 우주는 사라진 뒤였다. 난 열려있던 문을 닫은 뒤 우주가 걱정되서 창문으로 호텔의 현관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현관에서 편의점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나는 미리 수건을 꺼내 두는게 좋을 것이라 판단, 화장실에서 수건 세장을 꺼내 현관 입구에 설치했다.
아니나다를까, 정확히 10분 뒤에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우주가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바닥에 수건을 깔아 놓길 잘했지 하마터면 물바다가 될 뻔 했다.
여담으로 비를 쫄딱 맞은 우주는 웬지 모르게 섹시했다.
*
비는 의외로 쉽게 그치질 않았다. 금방 멎을 것 같던 빗줄기는 오락가락하며 긴 시간 계속되었다. 덕분에 공원이 있는 신사에 가는 걸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 곳 부터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늘의 도우심인지 나라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우산을 돌돌 말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흐린 하늘을 보다가 맑은 하늘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먼저 간 '도다이지 사'에서 크기비교 정물화 컨셉의 코믹사진을 여러 장 찍은 뒤, 우리는 약수가 흐른다는 다음 목적지인 '코후쿠지 사'로 향했다. 이상하게 우주는 그곳의 3갈래로 떨어지는 약숫물 중에서도 가운데 것을 유독 집요하게 챙기려고 했는데, 약수의 종류별로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어 안내인에게 물어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이 약수는 각각 의미가 있는데 왼쪽 것은 '지혜', 오른쪽 것은 '장수', 그리고 가운뎃 것은 '사랑'에 효력이 있다는 전설이 있지요. 보아하니 저 학생에겐 가운데 약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니우? 허허허}이녀석이 뭔가 흑심을 품고 이 약수를 노렸음이 분명했다. 이게 무슨 사랑의 묘약도 아니고 한낱 약수일 뿐이거늘. 아니지 이럴때가 아니지, 지금도 약수를 훔쳐가려는 우주를 막지 않으면 녀석의 저주에 걸려 사랑에 빠지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용솟음쳤다.
간신히 우주를 말려서 그 곳을 떠나 목적지인 가츠가타이야 신사로 가려는데, 이놈의 날씨가 또 말썽이었다. 자꾸만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리는 날씨의 변덕에 골치가 아팠다. 시커멓게 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얼굴에도 똑같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필이면 야외 관광이 많은 나라에서 날씨에 발목을 잡혀버리다니...'
우주는 어째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는지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얄미운 녀석, 이런 무방비한 때에 확 덮쳐가지고 놀래켜 줄까 보다.
"으음~ 윤하야-"
가까이 갔다가 녀석의 작은 뒤척임에 화들짝 놀라서 난 바로 나쁜 마음을 고쳐먹었다. 괜히 잘 자고 있는 놈 건드렸다가 역으로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발 우주는 재희처럼 충동적으로 본성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했다.
[거기도 비오냐?]
한적하기도 하고, 딱히 할만한 것도 없어, 무의식적으로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하자마자 이 녀석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헐, 어떻게 알았어? 너 혹시 알고보니 우리 옆 호실에 묵고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
어째 이쪽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게 신기해서 놀란 듯 반응해 주니까 재희는 피식 웃으면서 가소롭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관광 가 있는 애가 한낮에 뜬금없이 전화하는거면 뻔하지 뭐. 여기 어제 비 왔으니까 거기도 오늘쯤 비 오는게 맞을지도 모르고.]
요놈은 참 눈치 하나는 최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몸이 바뀐 후 대면했을 때도 그랬지만 대화하는 상대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저 치명적인 예리함은 정말 대단했다.
[아, 가희 바꿔줄까? 마침 우리도 데이트 중인데.]
내가 바꿔다란 말도 안 했는데, 재희는 알아서 가희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웬지 나랑 통화하는게 점점 귀찮은 듯, 그리고 갈수록 묘하게 여유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참을 가희와 신나게 수다를 떨고 나니 슬슬 국제전화 요금이 걱정이 되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무려 26분 째. 어이쿠야 싶어 급하게 가희와 통화를 마무리짓고 나니 엄청난 정적이 다시 나와 우주가 묵고 있는 방 안을 휘감았다.
'흠... 나도 그냥 잠이나 잘까.'
정적을 느끼는게 너무도 싫었던 나는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한방울, 두방울, 수도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들로 인해 꿈속까지 젖어들기 시작했다.
*
"우-으."
커튼을 너무 활짝 열어놓은 채로 잔 탓인지, 자다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가로등 불빛과 길거리의 간판 불빛들이었다. 그저 은은할 뿐인 간판 불도 자다 깬 나의 시야를 괴롭히기엔 충분했다.
어느덧 밤 늦은 시간이었다. 날짜는 하루 지난 8월 2일. 물론 새벽 시간이라 그닥 날짜가 지났다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던 탓에 전혀 아까 자기 전과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아- 정말 무료하게시리!!
해외라서 친구들에게 문자가 올 리도 없었고, 우주는 여전히 푹- 자고 있어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아, 심심하다, 정말 심심하다, 너무너무너무 심심하다!! 이제 잠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버렸다 이거에요! 그래! 배고프니 일단 뭐라도 먹자.
"오래도 내리는구나... 징하다 비도."
혼자 뷔페에 내려가서 식사를 하고 오니 어떻게든 시 간은 흘러 있었다. 세수하고 이를 닦은 뒤 눈을 감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더니, 다행히 잠이 다시 오기 시작했다.
*
얼마나 더 잤는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창 밖을 보았다. 무심코 바라본 창 밖은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밤 공기가 싸늘하게 내 몸을 휘감았고, 비가 그친지 얼마 안 되었는지, 퀴퀴한 먼지냄새가 코로 들이닥쳤다.
창문을 슬쩍 닫은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여덟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오늘 관광은 글러먹은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우주 이 녀석은 중간에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여전히 자고 있었다.
"우주야 일어나."
내가 툭툭 건드리자, 녀석도 잠을 너무 잔 탓인지 벌떡 일어났다.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날 발견하고는 와락 달려들었다. 왁! 일어나자마자 무슨 생각으로 날 덮치는거얏!
"우, 우주야-! 밤에 산책 좀 하러 갈래? 여행와서- 밤에 논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초인적인 힘으로 우주를 밀어낸 난 여행가방에서 주섬주섬 두터운 가디건을 꺼내며 야간 산책을 제안했다. 녀석은 내가 밀어내자 살짝 멍해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는 자기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가방 속 짐들을 밖으로 차곡차곡 빼내던 우주는 얄팍한 바람막이를 하나 꺼내더니 멋지게 빙그르르 돌려 입었다. 졸린 와중에도 내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생각이었을까?
"자, 잠도 거의 다 깼으니, 나가서 뭐 할까?"
말도 돌려보며 우주로의 흑심을 누르고 있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아까 갑작스럽게 덮친 녀석 때문에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의외로 밤 공기가 찼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모자까지 뒤집어 썼지만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한적한 공원이 나왔는데, 그 쯤 되자 어느새 나도 모르게 우주의 주머니에 꼭 잡은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밤에 공원을 걷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분명 내 생각에도 우주가 밤에 공원을 갈 일이 없었을 듯 하긴 한데 진짜였다니. 물론 같이 갈 사람이 없었던 거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 공원 웬지 우리 동네에 있는 공원과 비슷하게 생겼네.'
그 생각을 하니 문득 우주가 아닌 재희와 얽혀있는 일이 하나 떠올라 버렸다. 무려 다섯 달 가까이 지났지만 그 당시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잊혀지지 않는 바로 그 일이었다. 그 당시 재희에게 깜빡 속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아가 치밀 정도니 잊을 수 있을리가 없긴 했다.
"무슨생각을 그렇게 해?"
우주 녀석이 내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땅만 보고 있자 손을 꼭 잡으며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와 재희의 비밀 얘기였으므로 난 별 일 아닌 듯 슬쩍 넘겼다. 녀석의 표정이 굉장히 석연치 않아 보였지만 너가 그걸 얘기해준다고 믿을 수 있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바스락]
계속 걷고 있던 우린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텅 빈 공원에 사람이라곤 둘 뿐인데 이 소리는 어디서 난 것인지, 갑작스런 두려움에 난 우주에게 찰싹 달라붙어 소리가 난 것 같은 풀숲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야, 무슨 소리야?"
내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려는데, 우주가 날 잡아세우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녀석이 꺼낸 건 동그랗고 납작한 과자였는데, 봉지를 띁으니 담백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뭐야 그건..? 먹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숲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던 물체가 팍 하고 튀어나왔다. 난 빽 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우주가 옆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간신히 버텨 그것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없이 다가와 우주의 손에 들려 있는 무언가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그것은 바로...
"사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