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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40화 (40/188)

40화

다음 날, 아키하바라 역의 아래를 지나는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대한 두 매장, 라디오회관과 게이머즈 앞에서 레이 씨와 소이치로를 만났다. 만화와 게임에는 꽤 흥미가 있었기에 한쪽을 집중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게임 쪽이라면 아무래도 라디오회관 쪽이 더 낫겠음.}

{좋은 선택이군요.}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이 둘은 우리 둘의 전속 가이드라도 된 마냥 같이 상의하고 길을 물으며 우릴 안내했다. 나와 우주는 그들 뒤를 발빠르게 쫓아다니며, 필요한 대부분의 상품을 구경하고 살 수가 있었다. 큰 건물인데도 네비게이션이 2명이나 있다보니 쇼핑 속도는 엄청났다.

그러나 생각없이 막 구입했더니만 어느새 양손이 가득 차 버렸다. 이걸 여행내내 들고다닐수도 없는 노릇인데 난 어쩌자고 이렇게 막 산거람...

{제게 맡기시면 택배로 보내드릴게요.}다행히 레이씨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물건을 안전하게 집으로 배송받을 수 있었다. 내가 주 캐릭터로 이용하는 청권5의 '리리' 넨도로이드 피규어와, 여자의 몸이었기에 한번 입어보고 싶어 혹해서 산 리리 코스프레 세트를 포함해서 그 외 귀엽고 이쁘고 실용적인 물건들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그 외 한국에는 정식 발매되지 않은 DS3의 타이틀도 획득!

"이런 걸 보면 역시 나도 오타쿠라니까..."

그렇게 잔뜩 사서 레이씨에게 맡겨놓고 나니, 그 양이 좀 난감할 정도로 많기는 했다. 본능이 이끄는 귀여운 물건들을 잔뜩 사버렸더니 생긴 문제였다.

{확실히 적은 양은 아닌데... 이왕 온 거 많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음.}소이치로가 최종 구매량을 보고 좀 놀란 듯 했으나 어쩌랴! 언제 다시 일본에 올 지도 모르는데.

{이왕 가는 거 게이머즈와 만다라케도 한 번쯤 들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레이 언니가 내가 산 물건들을 정리하러 간 동안, 우린 소이치로를 따라 그대로 게이머즈와 만다라케를 포함한 아키하바라의 성지라고 불릴만한 곳은 모두 돌아다녔다.

관광이 끝나니 어느덧 오후 네시.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보고 듣고 사진 찍은 것만 다 해도 수두룩했다. 수많은 코스어들과, 전자상가, 게임센터,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쇼핑몰을 기억속에 꾹꾹 눌러담고 나서야 우리는 지하철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 이번엔 내가 졌지만, 다음번엔 절대 안 질거임!}소이치로는 잠깐 게임센터에 들렸을 때 또 져서, 2:0의 스코어가 된 것이 분했는지 역에서 우릴 보내며 방방 뛰었다. 아무래도 나와 더 놀고 싶은 모양인 게 분명했지만, 갈 길이 바쁘기 떄문에 또 만나 이렇게 같이 게임하는 건 힘들 거란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연습 열심히 하고. 신세 많이 지고 간다 혼다!}{소이치로라고 부르라니깐. 언제까지 성으로 부를 거임?}내 마지막 한 마디까지 되받아치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이젠 귀엽기까지 했다.

{소포는 도착일에 맞춰 보내드릴게요. 8월 13일 맞으시죠?}{네, 너무 고마웠어요 레이씨. 덕분에 너무 편하게 놀았어요.}레이씨는 마지막까지 천사같은 모습이었다. 날개만 안 달렸지 내 입장에선 진짜 천사나 다름없었다.

{뭐 저도 이렇게 기세가 엄청난 여행객은 메이드 안내원 시작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요?}

'하하하... 제가좀 이슈를 몰고 다니긴 했죠...'

두 사람과 역에서 헤어지고 나서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둘 뿐인 여행에 두 사람이 추가되어 시끌벅적 했었는데, 그 두 사람이 빠지니 그 시끌벅적함도 같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주도 못내 아쉬웠는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역의 출구 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언제까지 보고 있으려구? 이제 슬슬 가야되. 그래야 저녁 쯤 오사카에 도착하지."

"어, 응."

멍하니 있는 우주가 살짝 놀라는 걸 보고, 얘가 무슨 생각을 이렇게 깊이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오사카에 가 있었으므로 우주의 그런 행동엔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저... 윤하야 말할 게 있는데."

오사카행 특급 열차에 타고 나서야 우주는 내게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고 내게 말했다. 아까부터 고민하던 무언가가 드디어 해결이 된 모양이다 싶어, 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았다.

"레이씨랑 소이치로 말야. 좀 수상하지 않았어?"

"에?"

얘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래. 내 같이 잘 놀아 놓구선 이제와서 음모론이라니, 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지는 몰라도 그럴 리가...

"마치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달까... 그런 모습이 계속 눈에 보이더라구. 계속 귓속말로 뭐라고 말하고, 수신호 같은 걸 주고받고 말야."

아 잠깐. 그러고보니 이 생각... 나도 한 번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내가 본 것보다 훨씬 많은 회수를 우주가 봤다 이 얘긴데. 난 일단 우주가 보여준 엄청난 관찰력에 놀랐고, 나도 모르는 새에 두 사람이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도 놀랐다. 눈치 없기로 소문난 우주가 이런 대발견을 해낼 줄이야.

그러나 이미 헤어진 두 사람을 도로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혹시 다시 도쿄에 가게 된다면 그 때 안내를 핑계로 불러내는 수 외엔 없어 보였다. 우주와 그 문제로 상의한 나는, 일단 오사카 쪽 관광을 마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혹시 둘이 짜고 사기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막연한 의심은 독이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아 그러고보니 레이씨에게 맡긴 내 물건들은...?'

... 제발 별 일 없길 바랄 뿐.

*

꽤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오사카에 도착하고 나니 그렇게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도착한 뒤 묵을 곳부터 찾기 시작한 우리는 긴 시간 걸리지 않아 적당한 곳을 찾아 낼 수 있었다. 한창 성수기라서 대부분의 숙박 업소가 관광객들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단 둘뿐인 이점을 살려서 방 하나인 곳도 찾아 돌아다녀 금방 구한 것이었다.

길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한 방 쓰는 것도 그냥 감내하기로 했다. 저번에 우주와 한 방에서 자다가 벌어진 일이 문득 뇌리를 스쳤으나 이번엔 긴장하고 방어를 제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친구녀석에게 홀랑 넘어갈 수 없는 법, 아무리 불알친구라 해도 그냥 허락할 수 없다고!

"굳이 급하게 관광할 필요 없지? 여유있게 쉬고, 내일 보자 오사카는."

샤워하고 나온 남성미 넘치는 모습의 우주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욕구 같은 게 올라고려고 했으나 간신히 눌러 집어넣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하는 내 내면의 욕구로 인해 곤혹스러울 때가 종종 생기면서, 그것을 억누르고, 막으려는 내 이성적 노력도 계속되었지만, 어째 이 여성적 본능이 여러가지 의미로 굉장했다.

"그러지 뭐. 오사카, 교토, 나라 순서로 하루에서 이틀씩 투자하면 되겠어."

그리고 우주야, 부탁인데 그 훌렁 벗어던진 웃통좀 덮어주면 안 되겠니?! 나 정말 그 균형잡힌 이두삼두와 복근, 활배를 보고 있자니 자꾸 손대고 싶어진다니까? 마치 남자였을 때 여자의 가슴이나 허벅지를 지긋이 바라보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든다니까?!

"너도 얼른 씻어. 물은 진짜 잘 나온다."

이 위기를 피하려면 무조건 씻으러 들어가는 것 외엔 없을 듯 했다. 머리를 탈탈 털면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녀석을 슬쩍 피해서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욕실로 향했다. 자신과 거리를 두며 조심스럽게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는 날 보며 우주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 내 소꿉친구 나우주가 맞는건지 갈수록 능청스러워지고, 능글맞아진다.

'녀석이 갈수록 변하는 이유는... 내가 여자의 몸으로 있기 때문인가? '

문득 되돌아보니, 언제부터인가 샤워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어졌단 걸 깨달았다. 첫 샤워를 할 때 감히 거울을 보거나 아래쪽을 잘 보지 못하고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 난 집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여자로서 지내고 있는건지 새삼 느끼게 되었달까.

확실히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갈 때 옷 벗는 걸 주저하지 않는 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여자가 다 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일종의 지표였다. 그 때문인지 우주는 원체 눈치가 없긴 하지만 내가 재희라고는 전혀 생각 못 하고 있는 것 같고, 되려 사랑에라도 눈 뜬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게 핑크빛이었다.

처음엔 나도 그 호의가 그래도 나름 우정같은 우주의 성의 표시라고 생각했지만, 그 놈의 공주 대접이라는 걸 계속 받다 보니 마인드가 약간 변했나보다. 우주가 내게 마치 여자친구 대하듯 해도 그냥 흐뭇할 뿐이었고, 공주 대접을 해주면 해줄 수록 더 받고 싶고 우주의 목소리와 손길이 그리워지곤 했으니까.

'왜 그럴까... 이젠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걸.'

샤워를 마치고 문 밖으로 나가서 난 또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갈수록 대담해지는 우주의 이런 행동에도 놀랄 노자였지만-

"오 윤하야. 일로 와봐. 오사카까지 왔는데 와인 한 잔 해도 되지 않아?"

아까 내가 샤워하러 들어갈 때 모습 그대로 서 있던 우주는 어디서 났는지 와인까지 한 병 들고 있었다. 제발 웃옷좀 입으라니까... 에어컨도 틀었는데 춥지도 않냐 넌!

"우린 미성년이라구?!"

와인을 권하는 녀석의 모습에 순간 혹해버릴 뻔 했으나, 아직까지는 이성이 본능을 이기고 있었으므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계속해서 이 정도의 타격을 입다간 내 얼마 남지도 않은 정체성이 산산조각 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힘들다 힘들어!

"아쉽다... 한 잔만 하지 딱 한잔."

"됐대두!"

힘들게 녀석을 말려서 가벼운 주스 한 잔으로 대신한 우리는 서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한 개 뿐인 퀸 사이즈의 침대를 놓고 누가 먼저 오를 것인지를 정하지 못한 것이랄까. 그 때문에 미칠 듯한 어색함이 갑자기 몰려왔다.

잠시 후 서로 침대에서 자라고 실랑이를 끝내고 나서야 결국 내가 침대로 올라가게 되었다. 흔히들 말하는 남녀가 한 방에서 자게 될 경우 발생하는 사태라고 보면 편할 듯 하다. 이 어색한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편하게 잘 수 있을텐데 말이지.

"... 잘 자 우주야."

그러나 어째서인지 우주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부스럭]

녀석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하는 짓이...

'잘자, 내 공주님?'

손에다가 손가락으로 꼼지락 꼼지락 적는 것이었다. 나는 금세 알아듣고 녀석의 손을 탁 쳐냈다, 최대한 까칠하게. 그리고 씨익 웃으며 우주에게 말했다.

"그래. 왕자님 고마워."

그 후 녀석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고개를 그 쪽으로 두지 않아서 못 봤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뒤척이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놀람과 기쁨의 중간 그 어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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