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이겼다!! 15연승!!}
차곡차곡 쌓이는 연승 숫자에 반비례하게, 내 체력은 점점 떨어져서 거의 고갈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오락만 했는데 무슨 체력 고갈이냐구? 직접 해보면 안다. 이 날씨에서, 그것도 200판 가까이...
{33연승!!}
상대 플레이어들의 체력바를 0으로 만드는 걸 몇번이나 했을까, 무려 33연승을 찍고 나서야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후- 이제 얼마나 남은거지? 도전하는 사람이 없네."
난 흐르는 땀을 우주가 건네준 수건으로 스윽 닦고 나서 반대쪽을 살짝 봤다. 아무도 의자 근처에 앉아 있지 않은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내게 패배해서 뒤로 물러나 있는 모양이었다.
{응? 이녀석, 아까 그 꼬마 아냐}꼬마? 웬 어린애가 나와 배틀하려고 온 건가 싶어 반대쪽을 본 나는 흠칫 했다. 분명 저 북실거리는 금발머리는 아까...
{헤헤,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진짜네...}와 엄청 해맑아라, 녀석은 나를 보며 실실 웃더니 바로 대전 신청을 했다. 그런데 닉네임을 보자마자 사람들이 너나 할것없이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아 생각났다. 이 닉네임 분명 본 적 있는데. 아마 DS3로 온라인 대전을 할 때였나 그랬을 거란 말이지. 승패도 그렇고 승률도 그렇고 엄청난 녀석이어서 실제로 해 봤더니 엄청난 녀석이었더라, 라고 설명하면 될까 싶다. 실력이 나와 비등비등해서 온라인으로도 자주 만나서 배틀 하고 그랬던 녀석인데, 만날때마다 보이스로 나 때문에 승률 떨어졌다고 징징대던 놈이다. 웬지 들을 때마다 꼬마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진짜 꼬마였을 줄이야.
{이녀석이 '사신의 낫' 이라고?!! 그 클럽 세가의 전설?!}이란다. 으와 아무리 들어봐도 오글거리는 아이디... 그래도 이 녀석 실력 하나는 진짜 인정해줄만 한 녀석이니까 뭐. 여튼, 꼬마가 그런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에 놀랐는지 오락실 내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야~ 실제로 모습을 보이는건 처음이라.. 역시 여파가 큰듯요!}아무래도 이 녀석, 실제로 오락실에 나타난 건 처음인가보다. 뭐 전설이니 뭐니 하는게 무슨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거 보니 확실히 대단한 녀석이긴 한 것 같다.
{'사신의 낫'이라니. 너가 진짜 나왔구나?}{흐흥, 나도 놀랐는데, 설마 그 'Debreath'의 플레이어가 이런 미소녀였다니..}허... 여기서 그 아이디를 공개해도 될런지 모르겠는데. 일단 니가 퍼트렸으니 뒷감당은 알아서 해줬으면 해 꼬마야...
{뭐?! 'Debreath'가 이 소녀라고?!!}이런이런, 역시 닉네임만으론 다들 알고 있었구나. 아차, 그러고보니 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다 했더니만 와서 카드를 새로 만들어서 닉네임이 날아간 덕분이었구나? 하긴 와서는 다른 닉네임으로 만들었으니깐.
뭐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 처음엔 조용히 시작했던지라 좋은 일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몰려드는 인파의 수를 보니 역시 어쩔 수 없는 유명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닉네임과 실제 인물의 매치가 너무나 안 되어 충격을 먹고 있는 사이, 어느덧 대전 준비는 모두 끝나고 서로의 캐릭터가 마주보고 있었다.
{누나, 오늘은 절대 안질 거임!}
{뭐, 해보면 알겠지~}
이 마지막 게임장의 보스가 어떤 녀석일지 굉장히 걱정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잘 아는 녀석이 나타났다는게 나로써는 천만다행이었다. 늘 집에서도 DS3 온라인을 통해서 만나던 녀석이었고, 같이 한 청권 판수만 해도 몇백판은 될 법한 대전 상대였기 때문에 되려 마음이 편했다.
"우와.. 처음으로 윤하랑 막상막하인 녀석이 나타났네."
"아까 그 꼬마분이네요, 게임 센터 앞에서 만났던 금발 소년."
그 덕분일까, 처음 두 판을 가볍게 따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서 나머지 두 판을 내리 지고 말았다. 이런 역시 이 녀석은 잘한다니까! 정신 차리지 않으면...
2:2 동점에 마지막 한 판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 나나 녀석이나 뒤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는 모든 관객들이나, 침 한방울 삼키지 못하고 긴장한 상태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의 체력 게이지가 조금이라도 깎여 나가면 탄성이 터져 나왔고, 여기저기서 이 명승부를 기록하겠다면서 영상기기를 들이대는 모습이 완전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끝이닷-!!"
그러나, 늘 그랬듯이 '사신의 낫'은 내게 마지막 세트에서 약했다. 총 전적으로만 보면 내가 승률 60%정도로 비슷했지만, 실제로 2:2 동점 상황에서 내가 이긴 건 거의 90%에 가까웠으니까 통계상으로 보면 내 승리는 당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돼-!!}
[ K.O. ]
사람들은 승자가 탄생하기가 무섭게 소래기를 쳐 대며 난리법석이었다. 그리고 승자인 나를 향해서 터지는 무서운 카메라 소리와 플래시 세례. 으와 무서워 이거!
녀석은 내게 진 게 분했는지, 내 쪽으로 와서는 계속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런 궁시렁거림까지 다 받아줄 여유가 없었으므로 무시하고 정리하는데, 녀석이 날 잡아세웠다. 벌써 12시라서 슬슬 자러 가지 않으면 안 됬던 나는 녀석을 보며 무언의 메시지를 날렸다.
{잠깐!}
여전히 패배의 분이 식지 않아서 날 보며 씩씩대고 있는 걸 보니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처음 온라인상에서 만났을 때의 그 느낌과 전~혀 차이가 없었는데, 일본 게이머들은 이 녀석을 도대체 몇 살이라고 생각한 거람.
녀석이 자꾸만 날 놔주지 않는 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얘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얘, 나 빨리 아키하바라 관광 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한단 말야!
{나도 데려가여!!}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다메(안 돼)'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녀석의 표정을 보니 사뭇 진지함이 묻어나와서 냉큼 그러지 못 했다. 요 꼬맹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내게 관심이 생겨서 그런 거겠지?
{에- 윤하씨는 이제부터 아키하바라 관광을 해야...}레이씨가 내 바쁜 스케쥴을 생각해서 대신 녀석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이 녀석 게임센터에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아키하바라 거리로 나온 우리들의 뒤를 계속해서 쫓아다녔다. 마지막 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대단한 한 판 이었어'라며 저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해산한 뒤였기에 남은건 꼬마 뿐이었다. 같이 다니던 친구 녀석은 이미 보내버렸는지 노란 곱슬머리 녀석은 혼자서 우리를 밀착 마크하고 있었다.
{뭐 어때? 어쨌든 아키하바라에서 놀거잖아!}
{이 녀석이...}
{워워, 레이씨 일단 데리고 가 봐요. 후후}쫓아내려는 레이씨를 말리고 난 혼다를 내 앞에 데려와 세웠다. 그러고보니 닉네임이 아닌 진짜 이름도 안 물어봤었군.
{이름은?}
{혼다 소이치로. 올해 11살임}
내 이름을 말해주려 했더니, 녀석은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말이지 너 스토커냐?!
{뭐? 아님, 그냥 오프라인에서도 함 보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을 뿐임! 이름은 방금 얘기하는 거 듣고 알아낸 것 뿐임!}{흐응... 그럼 바라는대로 이루어졌다 이거네?}그 말에 레이씨가 약간 흠칫하며 놀라는 것이 보였다. 내가 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소이치로의 등을 콕콕 찔렀다. 어라...? 둘이 뭔가 신호라도 주고받는건가?
{어쨌든, 실제로 만나게 되서 엄청 좋아.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까워 죽겠음}{후후 더 연습해야 할 걸. 아직 내가 승률 더 높잖아.} 그러나 그런 의심은 곧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지켜봐도 별다른 일은 없었던 데다가 이 꼬마녀석이 뭔가를 숨기고 있을 정도로 고단수로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임?}
위쪽에서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은 의외로 귀여웠다. 전형적인 일본 어린애처럼 생긴 애였지만, 그놈의 금발 곱슬이 뭔지, 완전 특별한 이미지를 풍겼다.
{일단 배가 고프니까 배부터 채우고 싶은데...}어짜피 함께 다니게 된 김에 난 소이치로에게 물었다. 수 시간동안 계속 오락실들을 돌아다니느라 뻐근해진 손목과 어꺠를 풀면서 허기진 배도 채울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뭐 먹을래? 이 근처엔 먹거리가 꽤 많지!}아무거나 다 먹고 싶어! 라고 말한다면 웬지 혼날 것 같아서 난 가장 무난한 메뉴를 고르기로 했다. 바로 예상하시는 그것이다. 돈가스&우동.
{굳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는뎀...}소이치로가 더 맛있는 게 많을 거라며 메뉴 선택을 만류했지만, 난 새로워 보이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시간도 아까웠던 터라 빠르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원했다. 그래서 선택된 돈가스&우동은 기대했던 것 이상의 훌륭했다. 확실히 비슷한 맛이어도 현지에서 먹는건 뭔가 틀리다니깐.
{진짜 맛있게 먹었어.}
{뭐, 그럼 다행임. 이제 어디로 갈 거임?}뭐 할지 고민하던 나는, 시계를 보고 나서 일단 쉬기 위한 숙박지를 찾기로 결심했다. 벌써 29일 새벽 1시를 넘긴 늦은 밤이었기 떄문이다.
{오늘은 일단 쉬고, 한숨 자고 나서 내일 라디오회관 쪽을 들르는 게 좋겠어요.}{그럴래요? 그렇다면 쉴 곳을 안내해 드려야겠네요.}레이씨의 길안내를 따라 걷는 동안 난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도 돌아가지 않는 소이치로가 걱정되어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사람이 걱정되서 묻고 있는데... 욘석이.
{나야 뭐 집이 근처니까 괜찮음. 그리고 오늘은 밤샘 허락도 받고 왔지.}10여 분을 더 걸어가 묵을 곳을 발견하고 나서야 소이치로는 우리의 곁을 떠났다. 내일 낮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서, 녀석은 금세 다른 청권 배틀이 잡혔다며 사라져버렸다.
{그럼 저도... 아까 드린 명함으로 전화 주시면 내일 오후에 다시 오도록 할게요~}레이 씨까지 돌아가고 나서야 우린 짐을 풀고 여행 첫날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각자 묵을 방을 따로 잡았으므로, 따뜻하게 샤워를 마치고 난 뒤 2층 로비에서 잠깐 얘기를 나누고 우리는 방으로 헤어졌다.
"후~ 어째 우주 너랑 이야기하는게 엄청 오랜만인거 같다."
"그러게, 난 하루종일 놀라기만 하고 들러리가 된 기분이야..."
하루 내내 정신없었지만, 우주와 잠시 대화를 한 것 만으로 말끔히 정리가 되는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주에게 진짜 신비한 힘이라도 있는 건지 원.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보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여행 목표 중 한가지를 완수했다는 달성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면서 피곤함에 곧바로 잠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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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9 -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