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우하하핫 어때? 나 좀 늘었지? 이제 정신 차리고 해야 할 걸."
"끄응-."
난 예상치 못한 우주의 거센 반격에 집중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손도 못 써보고 당한 건지 되뇌여봤지만 무슨 영문인지 쉽게 파악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남은 두 판까지 모두 내주고 질 수는 없는데...
"에잇, 그럼 이건 어떠냐!"
그러나 내 예상 못할 변칙 공격이 통했는지, 우주는 바로 방어하지 못하고 몇 대 맞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가! 역시 내 게임뇌는 아직 죽지 않았다니깐, 금세 파해법을 찾아냈구만! 내 본능이 내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다구!!
"어~ 어엇? 윤하 너 갑자기 왜 이래?"
본능적인 직감으로 깨달은 바로는, 우주가 분명 내 평소 스타일을 알고 있었고 그걸 연구해서 대책을 준비했기 때문에 내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우주에게 게속해서 늘쌍 쓰던 패턴으로 덤볐다간 내가 질 건 불보듯 뻔한 일! 당연한 얘기였지만, 그 뒤로 완전히 다른 공격 방식을 써서 우주를 상대한 결과,
"GG..."
"후훗. 넌 아직 멀었어 우주야!."
우주는 그 뒤 내리 3판을 져서 3:1로 나의 승리가 되었다. 솔직히 처음엔 좀 당황했었다, 우주가 그 정도까지 나의 플레이스타일을 파악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많이 늘었네. 날 당황하게 하다니. 다른 사람들이랑 하면 할 만 하겠다."
"그래?"
나의 가벼운 칭찬이었지만, 우주는 실력이 늘었다는 말이 듣기 기뻤는지 금세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녀석은 다시 내쪽으로 와서는 내 옆자리에 앉아 100엔짜리 동전을 넣었다.
"컴퓨터 상대로 연습 좀 더 해야지."
짜식, 그래도 날 상대로 10년 넘게 하더니 보통 이상은 하는구나. 가르친 보람이 있는걸. 내 기억으론 분명히 청권2 나왔을 때 부터 했으니까 저번 꿈에서 봤던 게 아마 청권 시작하고 한 두달쯤 뒤였나?
내가 그렇게 과거 회상에 젖어 잠시 허공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도전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우주는 내 옆에 있으니 우주일리는 없고, 아마도 일본 유저인가 보다.
'어디, 이 동네 실력 좀 볼까?'
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레이씨가 손에 슬러시를 들고 나타났다. 하나가 아니라 3개인 걸 보니 우리도 주려고 함께 사 온 모양이었다.
"어머, 드디어 시작됬나요? 청권 레이스 in 아키하바라!"
하하하.. 그렇게 타이틀까지 붙이니 쑥스럽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 두자구요. 내 실력을 믿으니까 가능한거고, 정 안되면 밤이라도 새지 뭐! 모든 고수들을 격파하는 순간이 내 미션 클리어의 순간이닷!
*
[ Player 2 Win!! ]
{대단해! 22연승이야!}
{뭐야 이 여자애? 본적도 들은적도 없다고!}몇시간 뒤 나의 청권 레이스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여기 '아키하바라 헤이'까지 오면서 물리친 게이머의 수는 자그마치 백 이십 두명. 그리고 쌓아올린 연승의 수도 무려 121연승 되시겠다!
"정말 굉장하네요! 지치지도 않나봐요."
"뭐 저녀석이 좀 잘해야죠. 원조 국가에서 이정도라니... 이건 저도 전혀 예상 못했네요. 특히, 우릴 따라다니는 이 인파들..."
그렇게 게임 센터에서 청권 좀 한다는 녀석들을 격파하며 오다 보니, 마치 이것이 무슨 이벤트라도 되는 마냥 나에게 패배한 게이머들이 하나 둘 씩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가면 갈 수록 어디에선가 전화를 받고 고수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났고, 그 녀석들도 격파해버리자 그 녀석들까지 내 뒤를 쫄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도장 깨기 같은 느낌이네요. 패배한 사람들도 결과가 궁금해서 떠나질 못하고 있는걸 보니 후후."
"맨 처음 신오카치마치에서 27연승을 인증하는 사진을 찍을 때 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게속 고수들이 몰려왔지만, 난 아무런 문제 없이 고수들을 하나 둘 씩 물리쳤고, 그런 내 플레이를 보며 사람들은 게속해서 감탄을 거듭했다. 그래서인지 어느덧 나를 쫓아 아키하바라를 누비는 사람의 수는 자그마치 오십명이 넘기에 이르렀다.
{이겼다!! 그녀가 '헤이'의 왕 '학살자 D'를 격파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오락실의 보스 격 고수들을 쓰러트릴 때 마다 응원 소리는 점점 커졌고, 보스 격 고수들은 한국에서 온 무적소녀인 나와 기념촬영 하기를 원하는 등 굉장히 사태가 재밌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 23연승 인증샷"
"흐흐, 진짜 완전 뿌듯하다. 이제 얼마나 남았죠 레이씨?"
일본의 게임 매니아들은 한국에서 건너온 청권 미소녀의 실체가 궁금했는지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본 이 놀라운 광경들을 기록 보존하기 위해 휴대폰에서 카메라까지 가지각색의 기기들이 동원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봐야겠네요. 이곳 아키하바라의 격투 게임가라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는 시험장 격인 곳이죠. 물론 몇 군데 더 있겠지만, 지금 몰려든 인파가 계속해서 주고받는 통신 덕분에 멀리까지 안 가도 알아서들 찾아 올 거에요."
난 점점 신이 나고 흥이 났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 캄캄한 어둠을 바탕으로 가로등 불빛과 상가, 게임숍들의 화려한 조명들이 그 위에서 춤추듯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바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저기 우리가 맨 처음 내렸던 아키하바라 역이 보였다. 아키하바라 역 근처니까 사람도 많고 고수도 많겠지?
"짜잔, 여깁니다. 아키하바라 클럽 세가~"
"와, 엄청 크다!"
"놀라긴 아직이에요, 일단 마지막 승부를 봐야죠? 그래야 아키하바라 구경도 마저 다 할거 아니에요~."
아참 그렇지, 놀라긴 이르다! 내 미션도 드디어 마지막! 이 곳의 보스만 이기면 '청권 레이스 in 아키하바라'도 무사히 끝을...
{헤~ 이 누나야? 그 귀여운 청권 소녀}{응, 나도 전혀 이길수가 없었다구..}어라,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은 누구지. 세가 클럽으로 들어가려는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소년 두명이 길을 가로막았다. 머리는 금발에, 북실북실한 파마를 했는데, 자세히 보니 굉장히 앳되 보이는게 중학생 쯤 되는 것 같은 소년 하나와, 한명은 내가 아까 '헤이'에서 이기고 온 녀석이었다.
그런데 내가 비켜달라고 말하려는데, 뒤쪽에서 사람들의 분노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이, 빨리 비켜!!}
{감히 청권소녀 가는 길을 가로막다니!!}거센 반발에 소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하... 나도 설마 이런 전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아- 정말! 알았음! 비킬 생각이었음!}우주와 레이씨는 그 광경을 보며 내 뒤에서 키득거렸다. 불쌍한 녀석들... 군중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누나! 좀 이따가 봐염~}
금발 소년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깐족을 떨다가 게임 센터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별난 놈일세.
"어쨌든 들어가자구요? 최종전인데 마음 단단히 먹고 가봅시다!"
너무나 긴장되는 나머지 손이 약간 떨렸지만, 어째서인지 몸은 달라올랐다. 여태까지 쓰러트린 수많은 플레이어와의 가슴뛰는 대결 때문이었을까?
"힘내세요. Impossible is Nothing! 알죠?"
레이씨가 나를 보며 응원해주었다. 처음엔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레이씨의 동행도 계속 같이 보다 보니 익숙해졌다. 게다가 이 분 정말 메이드라고 해도 속을 정도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특급 미녀 메이드나 다름없었던 지라, 난 아까 레이 씨가 했던 과거 이야기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경험을 무시할 순 없겠지. 어떤 아저씨인지 정말 대단한 인재를 발굴했구만...'
그렇게 레이 씨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옆으로 와서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뒤돌아보니 나와 비슷한 키의 남성이 날 부르고 있었는데 'CEGA'라는 로고가 적힌 빨간색 직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리인인 모양이었다.
{여깁니다.}
그 직원분은 날 게임센터 한 가운데에 있는 청권 기계로 안내하더니 흔해빠진 동그란 오락실 의자가 아닌 어디서 구해왔는지 편한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몇 시간 동안 계속 불편한 의자에 쭈그려 앉아 조이스틱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된 일이었다. 아마도 매장 측에서도 이건 놓치면 안 될 하나의 빅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앉아서 주위를 한번 쭉 둘러보았다. 마치 출근시간 1호선 지하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대단한 광경이었다. 나를 따라온 사람들 중 못 들어온 사람들까지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서 오락실 내부는 내가 앉은 기계 주변 말고는 정말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저래서들 보이기나 할런지...
[위이이잉]
갑자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 돌아봤더니, 우주가 어디선가 낑낑대며 선풍기 한 대를 들고왔는지 내 옆에다가 놓아준 모양이었다. 안그래도 사람들로 가득 차서 에어컨 바람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자, 이거라도 있어야지. 안그러면 탈수현상 일으키겠어 너..."
밀려오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옆에 두었던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나저나.. 다들 눈치만 보고 선두로 나서는 사람이 없네요."
그러고 보니, 내가 들어와 앉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누구하나 나오질 않았다. 다들 타지에서 온 미지의 고수와 대결하러 선뜻 나서기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 정말, 언제까지 숙녀를 기다리게 할 생각인거에요?}내가 한마디 툭 던지니까 바로 반응이 왔다. 누군가가 내게 대전을 신청한 것!
{좋아, 누구도 도전 안한다면, 나부터 시작하지!}굉장히 자신감 넘쳐보이는 녀석이라서 꽤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3:1 승리, 한 판 내준 것도 내가 목말라서 음료수 마시다가 실수한 것이다.
"음... 이 상태라면 더위와 싸우는 게 가장 문제네..."
물론 우주가 엄청난 인파를 뚫고 이온음료를 두 병 더 사다 주긴 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할 지 확실하진 않았다. 푹푹 찌는 찜질방 같은 오락실 내부의 온도는 인파로 인해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전해왔고, 쉴틈도 없이 10여 판을 내리 이긴 나는 헉헉대며 또다시 이온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다. 가볍게 시작했으나, 어째 갈수록 점점 힘들어지는게.. 이러다가 최종전에서 말리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