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러나 그녀를 따라간 지 십여 분 후, 난 이 선택이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저기... 꼭 이거 말곤 없나요?"
그녀가 갈아입으라고 건네준 옷은 일반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과는 딴 판인... 고스롤리타틱한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프릴 드레스였다. 뭐 살다가 한번쯤 코스프레 다들 해보고 싶다곤 해도... 세상 어느 여자가 이런 부담스런 드레스를 던져주고 사람들 많은 데서 입으라고 하면 좋아하겠느냐 이 얘기다! 아 물론 지금 내게 이 드레스를 건네 주신 이 분같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뭐, 저희 가게 옷이 다 이렇죠 뭐~"
당연한 얘기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멋대로 이 분의 메이드카페를 침범한 것도 나였으니 달리 거부할 여지도 없었다. 크으... 저번 체육대회 때도 그렇고 난 왜 자꾸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는 듯 한 이런 이벤트 성 의복을 입게 되는걸까.
"그... 출근할 때 입고 오신 옷이라던가."
"이 옷으로 출근했어요."
"아. 예."
...네? 그 옷 입고 출근하셨다구요? ... 하아 이제 나도 모르겠다.
"어... 그나저나 그 옷을 입으신 덕에 우리 직원이 좀 곤란하게 됬네요."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입구쪽을 보니 직원과 손님인듯 보이는 한 남성이 옥신각신 하는게 보였다. 자꾸 내 쪽을 힐끔힐끔거리는게 나와 관련된 일인가본데...
"아무래도 아가씨를 우리 메이드인 줄 알고 지목하는 모양이네요."
"하하하..."
하긴 내가 엄청나게 아름답긴 하지. 응? 아니 이런 반응하는게 옳은건가? 여튼간에 이 드레스 너무 짧은 것 같다구, 가슴도 탁 트인게 굉장히 드러나고... 여름인데도 에어컨 바람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통성명이나 할까요?"
"아.. 그러고보니. 제 이름은 서윤하, 올해 음... 여기 나이로 15살이네요. 그리고 이 녀석은 어디갔지. 아 저깄- 야! 뭐해 너!!"
소개를 하려는데 우주 녀석이 안보인다 싶었더니만... 뭐 하나 했더니 옆쪽 테이블에서 메이드 한 분과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노닥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얌맛! 지금 내가 이 꼴인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그런데 우주 이 녀석... 누구한테 이런 능청을 배운건지, 말 한번 똑부러지게 잘 한다.
"왜? 내가 온 갈아입는 걸 도와줄 순 없잖아. 그리고 메이드 카페 온 건 나도 처음이란말이야. 좀 놀다 가도 되잖어~."
우어... 한 마디도 안 지고! 그런데 반박도 할 수가 없다. 나 웬지 이 가게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적응도 안 되고, 자꾸만 내 입지가 줄어드는 느낌인걸. 이놈의 옷이 문젠가...
"소개 다 안 끝났다구요?"
앞에선 이 아가씨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고 있고, 옆에선 우주 녀석이 시끌벅적하게 카메라까지 꺼내 들고 메이드 카페를 즐기고 있고... 정말 집중이 될래야 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튼 이 녀석은 나우주. 친구고, 이번에 함께 여행온 친구에요."
"호오~ 남녀 단 둘이서 해외여행이라, 엄청 원숙한 거 아닌가요?"
"악! 그런 거 아니에요!!"
분명 친구일 뿐인데 게속 연인으로 오해받고 있다고! 난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후후. 아무튼 반가워요. 제 이름은 이노우에 레이, 이 메이드카페의 점장이자 직원이죠. 올해로 나이는 스물 둘, 한창때랍니다~."
아니요, 굳이 거기까지 설명을 덧붙이실 필요는 없으십니다만! 그리고 전 지금 빨리 제 옷을 돌려받고 나서 원래 가던 길 가고 싶은 심정이군요...
그나저나... 자세히 보게 된 이분, 화장도 굉장했다. 뭐랄까 눈가라던가, 눈썹이랄지... 두껍고 화려한데다 반짝이기까지... 뭔가 설명하기 어렵지만 암튼 굉장했다.
"그나저나 한국어 굉장히 잘 하시네요."
"그렇죠? 제 어머니가 한국인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요."
그녀는 그 말을 꺼낸 직후부터 굉장히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예전 한국에 대한 기억은 두 살 이전의 기억 뿐이다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 와서부터 학교생활이 어땠고 저쨌고, 계속해서 자기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11살 땐 자기가 이 메이드계에 첫 발을 내딛었는데, 그 때 한국에서 온 어떤 아저씨 덕분에 창업을 결심하고 일하기 시작했다고. 어린 나이에 참 대단하지 않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레이씨는 다른 이야길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오뎅캔 자판기에 얽힌 얘기는 아세요?"
"얘기요? 무슨 전설이라도..."
"아까 그 자판기는 '치치부덴키'라고도 부르는 오뎅캔 자판기인데, 영화 '전차남'에 등장해서 지금도 아키바의 꽤 유명한 장소 중 하나로 꼽히고 있어요."
아까 우리가 뽑아 먹은 자판기를 말하는 건가? 전차남이라, 일본영화라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하다.
{점장님, 빨래가 다 되었는데.. 어떻게 할까요?}{아 이리로 가져오세요 리리씨.} 그렇게 정신없는 레이씨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덧 내 옷이 세탁이 다 되었는지, 종업원 한 명이 내 옷들을 가져다주었다. 우와... 마치 새로 산 것처럼 깨끗하잖아?
{고마워요, 가서 좀 쉬어요 리리씨.}
{네 점장님.}
레이씨는 마음에 드냐며 방긋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엄청 큰 빚을 졌네요..."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별 거 아니라고 깔갈 웃었다. 레이씨는 잠시 찾을 게 있다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함 한 장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명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메이드 가이드 이노우에 레이...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세요?"
아, 그러고보니 아키하바라를 검색하다가 본 기억이 난다. 아키하바라에는 관광객들을 위해서 메이드 찻집의 직원들 중에 가이드 등록을 해서 직접 아키하바라 거리를 안내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사실이었구나.
"예, 원래는 아키하바라 한정이지만, 귀여운 아가씨라면 원하신다면 도쿄 내 어디든지 가능해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가이드 지원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솔직히 다른 곳은 몰라도 이 아키하바라 게임센터들은 확실히 정복하고 싶었는데, 당장 오늘부터 부탁해도 되는걸까? 별로 문제 될 건 없겠지? 후후.
"그럼, 지금 당장 부탁해도 될까요?"
바로 부탁한다는 말에 레이 씨는 좀 놀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메이드복의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한 그녀는 소지품을 숄더백에 넣은 뒤 나갈 채비를 금방 마쳤다.
"물론요, 요금은 시간당 선불이라구요?"
헉,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분을 모시고 다니다간 우리 엄청나게 주목받게 될 텐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우주는 결제를 마친 상태였고, 난 또다시 내 성급한 선택에 아쉬워하며 땅을 쳤다.
"그나저나 그 옷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계속 입고 다니실래요?"
"아뇻!"
그 말에 식겁한 나는 당장에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내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진을 찍어두지 못했던 게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분만 알고 있다면 언제든 입어볼 수 있을 테니 아쉬움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이야... 정말 이걸 단 두시간만에 이렇게 뽀송뽀송하게 만들다니."
"저희 가게 메이드 아가씨들의 능력이죠~. 그래도 아키바에선 꽤 알아주는 데거든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원래 목적지로 출발하려는데, 내내 보이지 않던 우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녀석은 여태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거야?
"자 윤하야, 선물."
우주는 뜬금없이 나타나자마자 내게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건제받은 디카의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은 뭔고 하니... 조금 전 드레스를 입고 있던 내 모습이었다.
"완전 잘 나왔어. 메이드분들도 찍으려고 했더니 촬영은 안된다더라구, 그래서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윤하 너만 잔뜩 찍어뒀어. 맘에 들어?"
"흐하..."
내 허탈한 웃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레이씨가 디카를 보러 왔다. 그녀는 정말 잘 나왔다면서 박수를 쳐 주었는데, 그러면서 웬만한 모델들 보다도 예쁘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걸 기뻐해야 해 말아야 해...
"그럼 가 볼까요? 목적지가 어디라고 하셨었죠?"
"신오카치마치역 근처요. 그곳 오락실 청권을 제패할 겁니닷!"
레이씨는 내가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을 보고는 귀엽다며 깔깔거리셨다. 하긴 나이차이가 7살 가까이 나는데다가 소녀가 오락으로 지역 제패를 하겠다는 말에 내가 귀여워 보였을 수도 있겠다.
"가죠! 따라오세요 여러분!"
그 다음부터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정말 눈 깜짝 할 새였다. 츠쿠바 머시긴가 하는 익스프레스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슝 오니까, 어이쿠 이게 웬 걸, 목적지가 나오는게 아닌가! 우리가 두 시간이나 헤매고 다녔던 아키바 거리를 단지 전철 한 정거장 만에 주파하다니, 역시 현지인!
"자, 청권이 하고 싶다고 했죠? 여기부터 차근차근 격파하시면 될 것 같네요."
역 근처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그녀가 우릴 인도한 곳은 게임 센터였다. 그런데 아키하바라 근방 오락실인 것 치고는 한가한 편이었다. 시간은 오후 3시 반 경. 슬슬 학생들이 신나서 몰려들 시간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난 손좀 풀 겸 비어있는 기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좋았어. 배도 채웠겠다, 원기 충전 완료!"
한국에서도 오락실 갈 때면 늘 들고 다녔던 동전 가방에 100엔짜리 동전을 쌓아 놓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우주가 그냥 보고 있기만은 뭐했는지 반대쪽으로 가더니 나에게 바로 도전을 해 왔다.
"오... 도전?!"
"후후후, 놀라지 말라구. 내가 그동한 연습한 결과를 보여줄테니까."
오호 이 녀석, 그간 연습 좀 한 모양이다. 나몰래 집에서 뭐하나 했더니만, 아키하바라가 여행 계획에 포함된 이유도 알고 있었나보네.
[ Round 1. Get Ready- Fight! ]
"어?"
"와하핫, 걸렸다!"
이럴 수가, 시작하자마자 견제하려고 무심코 넣은 하단 발차기를 당연하단 듯이 흘려버린 우주는 그대로 파죽지세의 공중 콤보를 내게 연타로 히트시켰다.
"이익,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이걸- 앗?!"
다시 일어난 내가 늘 하던 방법대로 페이크를 넣자마자, 예상치 못한 반격이 또다시 들어왔다.
"뭐- 뭐야. 측면으로 피하다니!"
횡으로 슬쩍 피한 우주가 날 다시 띄우고는 그대로 K.O시켜버렸다. 이럴수가... 내가 우주에게 첫 판을 내주다니. 10년 넘게 함께 청권을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