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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36화 (36/188)

36화

*

"우-와..."

공항에 내리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 누가봐도 처음 외국에 나온 촌놈같이 보였을 것이다. 분명 공항이라는 어딜가도 크게 차지 없는 공공 시설물의 한 가운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뺨에 와닿는 느낌은 전혀 한국같지가 않았다.

"신기하다. 나 지금 엄청 두근두근거리는 거 알아?"

내 왼쪽 가슴에서 요동치는 심장이, 지금 이 환경에 내가 얼마나 격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분명, 열도는 나를 반기고 있었다!

"마치 여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반기는 것 같지?"

우주도 감회가 새로웠는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공항 밖으로 튀어나가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난 여행가방을 살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주도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는 출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자. 그런데 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지 않았나?"

"...응? 뭐?"

그러나 우주는 날 바로 끌고 가지 않았다. 뭔가 할 일이 남았다는 듯 내게 말했는데 바로 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며 새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전화 해야지. 재희한데."

아 맞다. 그런 임무가 있었더랬지. 내 정신좀 봐, 완전 까먹고 있었네.

"맞다! 비행기 타고 오면서 밖을 보는데 정신이 팔려가지구 완전 잊고있었다!"

여기까지와서 녀석에게 상황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진 않았지만, 재희도 날 보내는게 끝내 탐탁치는 않았을 것이므로 서로 피장파장인 격. 군소리 없이 전화해주기로 했다.

"여보세요. 어, 나야 윤하."

우주랑 대화할 때랑은 180도 변해버린 그 목소리에 우주는 웃음이 나왔는지, 날 보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이가 나나?

[여튼, 내 몸 관리 잘하고. 이상한 병 같은거 옮아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당근 빠숑이지. 완전 재밋게 놀다 올 거니까 집이나 잘 지키고 계셔."

전화 너머이고, 바다 건너 먼 곳으로부터 공기 중을 가르며 날아와 들리는 재희의 목소리였으나, 난 대번에 녀석의 기분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마치 우울증 걸린 사람같은 목소리 때문에 혹시 이녀석 같이 놀러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고, 매일... 아니다, 가능하면 매일 하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뭐 너무 과하긴 했어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임에 틀림이 없었고, 그 진실된 마음을 느낀 나 역시 진심으로 녀석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옙! 염려 마쇼! 집을 부탁한다 뿅!"

나의 굉장히 들뜬 듯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재희의 '그래' 한 마디에 정말 복잡미묘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끊었어? 뭐라고 해?"

여전히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던 우주가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물어보았다. 이 녀석... 너 여태 웃고 있었어?

"아 뭐... 똑같지 출발할 때랑. 계속 전화하랭."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우주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잠깐 맥이 끊겼지만, 난 도로 발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여튼, 가자 어서!"

"좋아, 미지의 세계로의 출발이다!"

내가 어서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우주도 알았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공항의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육지를 향해 미친사람처럼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이쿠소-!!"

{가자-!!}

<-- 편의를 위해 지금부터 일본어는 {중괄호}로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

보통의 일본 여행은 가장 최단거리로 최대한 많은 장소에 들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짠 계획은 정반대의 노선을 타고 있었다. 동선? 그런 거 조금 생각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이동 경로를 보면 일단 같은 곳을 여러번 지나게 되어있다. 하지만 어짜피 자유여행이기 때문에 언제든 계획의 수정이 가능하고, 우주가 말한 현지 친척분으로부터 최적의 노선을 제공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계획상 가장 먼저 들를 곳은 아키하바라였다. 내 주 관심사인 콘솔 게임과 관련된 여러모로 유명한 이 동네에 대해 알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청권 시리즈의 박물관 격인 게임장 건물이 이 거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욱더 내가 이곳에 오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이쪽인가? 분명 지도에는 이 근처로 되어 있는데."

"잠깐 윤하야, 그 건물이 아니야. 다음 돈까스 전문점 건물 다음 건물일거야..."

허나, 문제는 역시 현지적응! 쉽지 않은 길 찾기로 인해 당초 예정되어있던 도착 시간으로부터 무려 두 시간이 넘게 지연되고 있는 상태였으니... 분명 전철을 타고 '아키하바라'라고 적힌 역에 내릴 때 까지만 해도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역시 실전은 달랐다. 우리가 절대 길치는 아닌데...

"찾았다-? 아니잖아?!"

이상하게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데도 같은 곳을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끙... 여기만 갔다가 다른 곳을 자유롭게 둘러볼려고 했는데 큰일이네..."

결국 나와 우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인파 속에 고립되어 버린 상태. 마땅한 대책을 찾지 못한 가운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안그래도 헤매면서 많이 걸은 탓에 배도 엄청 고팠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그렇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게임장에 찾아가서 청권의 오랜 역사를 느끼고, 엄청난 일본의 맞수들과 대결을 펼치고 싶어 죽겠다는 내 심정을 우주가 알리가 없었다. 지금 내 손이 조이스틱과 버튼을 조작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게 보이지 않-.

"-니 우주야?"

오잉, 내가 멍하니 청권 생각을 하는 동안 이 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설마 너 날 버리고서 진짜 밥 먹으러 간 건 아니지? 설마?

"윤하야~ 여기야, 여기!"

순간 혼자 남겨진 줄 알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다. 다행히도 우주는 멀리 가지 않고 근처의 자판기 앞에서 기웃거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윤하? 설마 가수 윤하?}

{그러고 보니, 좀 닮았는데...?}그런테 큰일이었다. 우주가 내 이름을 크-게 부른 탓에 주변 사람들이 날 동명의 가수 분과 착각하기 시작한 것. 하기사 내가 생각해도 그 분이랑 내가 좀 닮은 구석이 없지는 않다만... 어쨌든 난 본인이 아니므로 인파에 둘러싸이기 전에 난 황급히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여행오기 전 열심히 공부한 일본어가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에- 죄송하지만 그 윤하가 아니고 그냥 한국 관광객이에요~}나의 유창한 일본어에 조금 놀랐는지, 나를 에워싸려던 아키하바라의 여중생들은 한 발 물러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일본어로 했나? 젠장 더 의심하는거 아냐?

{진짜 아니에요? 그래도 너무 닮았는데...}결국 겨우겨우 무마하고 나서 사진 좀 찍어달라는 여중생들의 부탁에 난 흔쾌히 응해 주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연예인 만났다고 자랑하고 다녀야겠다며 신이 나서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소란에 약간 당황했지만,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야 난 우주에게 갈 수 있었다.

"어휴, 위험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 따샤, 너땜시 나 하마터면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윤하의 인기곡인 '비밀번호 486'이나 '혜성'을 불러야 할 뻔 했다구. 그랬다간 길거리 콘서트라도 해야됬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학생들이 날 가수랑 착각했나봐. 그렇게 닮았나?"

"어- 그러고보니 조금 닮은 것 같다. 왜 여태까지 몰랐지?"

정말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우주의 객관적인 대답을 들으니 이해가 됬다. 갸우뚱거리며 날 요리조리 훑어보는 녀석을 슬쩍 봤는데, 손에 무슨 음료수 캔 같은 걸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음료수 치고는 뭔가 알록달록한 무늬 같은게 잔뜩 박혀서 굉장히 귀여워 보였다.

"뭐야 손에 들고 있는거는?"

"아 이거. 여기 자판기에서 뽑은 건데 캔 오뎅이야. 귀엽지?"

캔 오뎅? 그런 물건이 있었나? 난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호기심이 생겨 냉큼 우주에게서 낚아챘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팠던 탓인지

[딸깍!]

"으악!"

"우왁?! 괜찮아 윤하야?"

실수로 캔을 따다가 옷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뜨어! 이 치마랑 티 완전 비싼 옷인데-! 가 아니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헐 잠깐 저기서 접근하는 저분은 또...

{이런이런... 도움이 필요하신가요?}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한 여성에게 난 바로 눈길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와, 이건 또 새삼... 이 거리가 대단하단 걸 실감하게 하는걸.

{으... 네.}

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 옷이 계속해서 오뎅 국물에 젖어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엄청난 복장 때문에 온 시선이 그리로 향해있었다.

우와. 여기 정말 길 한복판이 맞는 거지? 그래 아키하바라, 오타쿠의 성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야 이상할 거 없다구 서윤하! 그래 메이드복이 이상한건 아닐-리가 없지!!

"근처에 저희 숍이 있는데 가서 갈아입을 옷이라도 드릴까요?"

"아... 네. 부탁드려도 될까요."

"따라오세요~."

게다가 갑작스러운 유창한 한국어 때문에 난 계속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뭐지 이 사람 도대체... 아우 모르겠다. 일단 축축한 이 옷부터 어떻게 하고 나서 생각해야지!

============================ 작품 후기 ============================

+14.07.09

작중 일본여행은 2010년 중입니다.

그 다음해에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터졌었죠...10부쯤? 쓰고 있었을텐데 소식 접하고 저도 놀랐었던 기억이 나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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