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S] 그녀의 운명은 뭔가 잘못됐다-35화 (35/188)

35화

*

여튼 그렇게 계속 꿈을 꾸다 보니, 난 어느덧 윤하의 과거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알게 되었다. 뭐 완전 엄청나게 꼬치꼬치 알아낸 건 아니고, 두리뭉실하게 과거 내력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갈수록 윤하를 더 이해하게 된다는 느낌이 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 꿈을 꾸면 꿀수록 마치 내가 윤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점점 강해져갔고, 요즘들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 상태다. 마치 내가 윤하가 된 것 같은 꿈의 시점이 바로 원인이었다. 안그래도 여자된 몸으로 8달이라는 시간을 보내 온 내가 그런 꿈까지 꾸게 되니 정말 내가 재희였다는 사실이 잊혀져가고, 나의 과거 16년이 진실이었는지조차 의심되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내가 윤하가 되기 이전의 기억은 이유모를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혀 꺼낼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윤하의 시점으로 과거를 볼 때마다 너무나 신선하게 느껴졌고 내가 윤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맨 처음 재희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뭔가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힘에 의해 내가 이런 상태가 된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윤하의 아버지, 서진 아저씨가 이 말도 안 되는 일의 중요한 단서라는 것도.

"와... 이 많은 데를 정말 다 돌 수 있겠어? 돈도 엄청 들겠는데..."

솔직히 말해, 어째서 아저씨가 해외로 떠나던 그 날 이 사실을 깨닫고 아저씨를 추적하지 않았는지 내 자신이 한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긴 분명 그 때 의심을 했던 건 사실이나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도 있고, 가희와 사귀겠다고 난리를 치는 재희를 막아내느라 신경쓸 겨를도 없었지만... 벌써 세 달 넘게 지난 일이다보니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돈은 걱정 마, 일본에 내 친척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여행경비는 다 대주겠다고 하셨으니까. 기념품 같은거 살 돈만 우린 준비하면 된단 말씀?"

어쨌든, 뭘 설명하려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음. 그래 맞다, 어째서 여행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 그 내막을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왔었지.

"흠... 너만 믿다가 일본에서 돈 없어서 아르바이트 해야 되는건 아닌가 모르겠다."

내막을 설명한답시고 과거를 회상하다보니 이렇게 됬는데, 어째 과거회상을 하다 보니 꿈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요즘 꿈을 통해 느끼는 내 심리 변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것만 알아주길 바란다.

"걱정마~ 정 못미더우면 내가 연락처 알려드릴테니 통화라도 한번 해 볼래?"

아 자꾸만 말이 삼천포로 빠지는구만! 설명은 끝! 이제 아까 하려던 얘기를 하겠다.

"아냐 됐어. 그럼 내 용돈이랑 일본어 공부만 하면 된다는거지?"

"그래 통역은 믿고 맡길께, 난 친척분이랑 경비랑 코스 같은거 상담을 좀 해야 하니깐."

사실 이 여행의 계획은 시험 끝난 바로 다음 날에 수립되었다. 절망과 좌절을 안겨준 가희 사건과, 연타석 재희 사건으로 강한 충격을 먹은 내가 잠을 못 이룬 덕분에 늦잠을 퍼질러 자고 일어난 뒤 단 2분만에 완전 날림으로 계획되었다.

아침에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일어나서 핸드폰을 보니, 반가운 문자가 한 통 와 있었고, 그 문자를 보자마자 답장을 보냈던 것이다. 걸린 시간은 달랑 2분이었다, 그것도 해외 여행 결정을. 누가보면 엄청 잘사는줄 알겠어.

그때 나눴던 문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즁★]

[윤하야, 너무 풀죽어 있지 마. 너 말대로 오해겠지! 기분 풀 겸 여행이나 갈까?]

[답장]

[어 가자. 이왕이면 한국이 아닌 해외로, 일본같은 곳으로.]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분이 다운되어 뭐라도 돌파구를 찾아내려 바둥거리던 상황이었으니 여행에 냉큼 수락한 건 좀 극단적이긴 해도 '재희와 가희가 없는 한국 밖으로 떠난다!'라는 결정이긴 했으니까.

나중에 열흘 쯤 지나 이 사실을 재희와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 낼 것인지에 대해 굉장히 고민했지만, 그 다음 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내게 돌아오는 반응은 의외로 쿨했다.

엄마 아빠는 우주랑 같이 간다니까 내가 시험도 잘 봤고 우주라면 믿을수 있다면서서 용돈까지 줄 테니 재밌게 놀다 오라고 하셨고, 가장 걱정되는 관문이었던 재희 역시 '걱정끼치지 말고 자주자주 전화해서 보고해!'라는 말만 남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설마 엄마 아빠가 내가 윤하랑 바뀌어 있다는 걸 아니까 소꿉친구 우주랑 놀러가는 것에 대해 별 말 안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곧 '설마 부모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어?'하는 철썩같은 믿음 때문에 그 의심은 곧 사라졌다.

"일본 하면 또 온천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말이지..."

여튼 정리하면 그런 과정을 거쳐 방학식 당일인 오늘, 여행 계획을 지금 급하게 짜고 있는 중이었다. 온천 얘기에 찌푸려지는 재희의 표정을 보고 난 식겁했다. 그래도 날 덮친 사건 때문에 내게 웬만하면 터치 안하려고 노력중인듯 한게 쿨한척 하며 여행에 대해 거의 아무 말 안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글쎄... 여름인데 굳이 뜨거운 온천까지 가야 하나?"

난 그래도 녀석을 위해 나중에 다시 집어넣더라고 일단은 계획에서 빼 두기로 했다. 굳이 온천이 아니더라도 한 방 쓰게 될 경우도 생길텐데 저자식은 그건 왜 아무 걱정을 안 하는거야.

"그것도 그러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여름이니까... 그럼 워터파크?"

"...에흠!"

그런데 우주는 그런 재희의 상태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녀석이 신경쓰일 만한 장소를 읊어댔다. 내가 왜 눈치보면서 계획을 짜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이 재희 입장에선 엄청나게 양보한 것이고, 그에 맞게 나도 어느정도는 재희에게 안심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째 내가 24일에 꾼 다섯번째 꿈에서 재희, 아니 윤하의 눈치를 보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내가 웬지 비슷한 분위기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수영장... 어디 잘 아는 데라도 있어?"

아오 엄청 눈치 보이네 이거. 이 두 남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난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원. 나도 한 성깔, 한 자존심 하는데 이래 살아야하나 진짜.

"물론이지. 저기 이케부쿠로 근처에 있는데, 완전 시설도 괜찮고 멋지대. 어트랙션도 엄청나게 많고 말야! 갈거면 내일 수영복도 사러 갈까? 시간도 없는데."

오 마이 갓. 이번 우주의 말은 좀 위험한데? 재희야 인간적으로 행동해라? 응?

"끄응- 야. 나-"

"... 크헴."

그러나 내가 하던 걱정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던 모양이다. 재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우주에게 한 마디 하려던 순간, 그를 꽉 쥐고 있는 여제님께서 헛기침을 하신 것으로 인해, 재희는 바로 깨갱 하고 말았다.

"윤하야, 수영복 사러 가는 김에 나도 같이가자. 나도 올해 입을 수영복 필요한데."

가희는, 그 사건 이후 재희를 완전히 휘어잡았는지 재희가 나와 우주 사이에 끼어들라 치면 바로 제지해버리는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그 때 그 사건 뒤 이틀만에 가희와는 오해를 풀고 다시 원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가희는 그 이후로 내개 재희가 딴 짓 안하나 감시해달라고 단단히 요청 해 둔 상태였다. 역시 난 가희에게 미움받은게 아니었고, 아직 그녀는 날 신뢰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 그럴래? 나야 좋지, 수영복 코너엔 여자끼리 가야지 히히."

그래서인지 가희는 흔들리는 재희를 휘어잡으려고 열심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와 우주의 관계가 좀더 진전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 했다.

"재희야, 가는 김에 너도 가지 그래? 우리도 수영장 한 번은 갈거 아냐."

그렇기에 가희는 나와 우주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대찬성했을 뿐 만 아니라 그 여행을 위한 준비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 이런 재희 모르게 하는 그녀의 밑작업들이 티 안나게 확실하게 재희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임엔 틀림이 없었다.

"... 그러지 뭐. 가는 김에 다같이 가자."

재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 뒤 다시 몸을 돌려 칠판 쪽을 향했다. 그 다음부터 재희는 방학식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얌전했다. 역시 가희 파워!

물론 이 이후에도 재희는 계속 태클을 걸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가희가 가볍게 제지해 줌으로써 일본 여행 계획은 차질없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우주가 지인을 통해 여행 계획을 마쳤다면, 추진하고 계획을 궤도상에 안착시킨 건 가희나 다름없었다.

'고마워 가희야. 덕분에 귀찮은 재희 녀석을 떼어낼 수 있게 됬어!' 라고 소리내어 감사를 하고 싶었지만, 재희 입장을 생각해서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며칠 뒤 여행 출발일이 다가왔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나는 첫 비행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평소 고소공포증은 없었지만, 그래도 하늘을 나는 인공의 운송수단에 몸을 맡기려니 긴장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지만, 긴장 중에는 역시 우주와 손이 닿아있으면 신기하게도 긴장이 풀렸다.

28일 새벽. 인천공항에서 재희와 가희의 배웅을 받으며 탑승한 아시안 여객기 안에서, 난 부푼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일본을 목적지로 삼은 숨겨진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아저씨를... 부디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