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7. 여행은 핑크빛, 예감은 적색신호>
"으아 더워... 더~워~!"
방학식 날 아침. 아침부터 들려오는 은주의 신음소리에, 나도 덩달이 더워지고 있었다. 보통의 7월 말이라면 더운 날씨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장마가 빨리 끝나는 통에 벌써부터 8월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덕분에 방학식 날인 오늘은 정말 엄청나게 휴가 기분을 만끽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좋아... 후지큐 하이랜드는 무조건 가는걸로 결정됬고..."
방학식 시작하기 30분 전, 교실의 풍경은 마치 찜질방의 한 켠 같았다. 남학생들은 대부분 교복 상의 단추를 풀어헤쳐 런닝을 훤히 드러낸 채 공책이며 손바닥이나 부채로 열심히 부채질을 해 대고 있었고, 여학생들은 그러질 못해 미니 선풍기나 아이스 팩을 만지작거리며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나 역시 미니 선풍기를 책상에 세워 두고 하복 블라우스를 쥐고 연신 펄럭이며 힘겹게 더위를 쫓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며칠 전 과냉방으로 인한 누전이 원인으로, 덕분에 학교 전체는 푹푹 찌는 더위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다.
"오다이바도 갈까? 거기도 관광명소중 하나잖아."
옆에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책상에 엎어져 공책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던 우주가 내게 싱긋 웃으며 물어봤다. 그런데 갑자기 웬 오다이바냐구? 이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하려면 또 며칠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
14일 즈음, 난 또다시 윤하의 기억에 빠지게 되었다. 시험 때 꾸었던 꿈으로부터 거의 열흘 만이었다. 다시 꾸게된 꿈에서 맨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얼굴은 아저씨였다.
'아저씨 얼굴도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열흘만인가?'
열흘 전 꾼 꿈에서 이미 봤던 아저씨였지만, 얼마 전 터진 사건 때문에 그 그리움은 배가 된 상태였다. 재희가 날 덮친 이후 재희와는 식사같은 어쩔 수 없는 때 빼고 얘기도 섞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전화나 메신저를 통한 친구들과의 연락에만 의존해 적적한 상태였다.
"윤하야, 그럼 아빠... 간다?"
"..."
아저씨가 아쉽고 슬픈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는데, 처음 내가 봤던 여리고 눈물 많던 윤하는 어디 갔는지, 윤하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저씨 말에 대꾸도 안 하는가 하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홱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게 아닌가! 윤하가 돌아서기 직전 아저씨의 오묘한 표정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내가 아저씨와 처음 만났을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몸이 바뀌자마자 만난 아저씨의 팔불출 첫모습이, 과연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음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다.
'10년 전부터 아저씨가 아주 미움을 받아 왔구만.'
여튼 그렇게 헤어지고 나니, 윤하는... 얼레? 얘가 또 왜 이런대. 매몰차게 헤어진 것과는 또 상반되게 화장실 변기에 앉아 훌쩍거리는게 아닌가.
'그래... 아무리 차갑게 대해고 하나뿐인 혈육인데...'
아저씨가 떠나는 그 뒷모습과, 윤하가 훌쩍이는 그 장면들을 연달아 보고 있자니 내가 울적해졌다. 그런데, 그런 윤하에게 해맑게 다가오는 한 아이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나였다.
"윤하야~. 윤하야~!"
그러나 이 녀석 반응 참. 보는 내가 다 무안해질 정도로 일관성 있게 무시하는구만. 대단하다 한재희, 저런 난공불락의 성으로 접근하다니. 난 역시 한 사람만 보는 일편단심 민들레였나봐.
"가까이 오지 말라구 했다?"
"왜~"
그런데 그 차가운 표정과 싸늘한 말도 어린 시절의 내겐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더 오기가 생겼는지, 녀석은 더욱 더 윤하에게 들이대기 시작했따다.
"언제까지 그렇게 안 웃을 거야?"
"영원히, 쭉, 계속"
계속 두 어린이의 투닥거림을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재희와 윤하의 뻔한 대화 흐름을 따르며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아~ 좀 같이 놀자! 혼자 놀면 심심하잖아!!"
"싫다구 좀!"
[퍽!]
어라 이 전개는 설마-
[우당탕]
-우왁?! 요전번 꿈 때랑 비슷하게 굴러가는구만! 윤하 이 녀석 날 얼마나 세게 밀쳐낸 거야?!
"허억!!"
난 윤하에게 밀쳐져 엄청난 속도로 꿈에서 튕겨져나왔다. 어우 젠장, 이것도 한두번이지 계속 이런식으로 튕겨져 나오다간 내 심장이 멎을 것 같다.
꿈은 이거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열흘 뒤인 24일 새벽에 난 또 한 번 꿈을 꾸었는데, 이번 꿈엔 예상 외의 인물이 또 한명 등장했다. 10년도 더 된 나의 죽마고우였는데, 오랜만에 보는 그 앳된 모습에 굉장히 반가웠다.
"요~ 나 왔어. 뭐해 재희야?"
누군고 하니 요즘 내 시중을 들고 있는 우주였다. 하도 최근 모습만 봤더니 어릴 때의 모습이 적응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어린 우주의 모습은 이상하게 내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 우주! 마침 잘 왔다. 같이 청권2 할래?"
여자로 살아온 지 장장 8개월 쯤 되니, 내 안의 모성애가 기어코 눈을 떠 버린 탓에 우주가 귀엽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결국 내가 우주에게 빠져들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처음 남-녀로 만났을 때 감정이 단지 소꿉친구, 동성친구였다면, 지금 나와 우주는 적어도 단순한 친구의 감정은 아니었다. 물론 누가 내게 물어보면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손사래치겠지만, 내 속마음은 이미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으... 정말 오늘도 졌어! 항복!"
"와핫! 우주야 연습 하긴 한거야?"
과거나 현재나 형편없는 우주의 게임 실력에, 계속 져서 우주가 우울한건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시절의 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내기에 이긴 내가 한 조각 남았던 조각케잌을 집어들고 먹기 시작하는데, 패배의 아픔에 드러누운 우주의 위로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역끼 앙딕은 흔니와 항께 어거아해!"
"야"
대충 간식은 승리가 필요하다는 얘기. 나타난 사람은 누군가 했더니 윤하였다. 자다가 깬 듯한 표정을 보니, 거실 소파에서 낮잠을 자다가 재희와 우주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일어난 모양이었다. 인상을 좀 쓰고 있었지만 그거 나름대로 또 새침했다.
"어...? 미안 깼어?"
얼씨구? 내가 왜 얘한테 사과를 하는겨? 저번 꿈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와 윤하 사이에 이런 묘한 상하관계가 형성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윤하에게 한 발 양보해서 져 주고 있음은 확실했다.
"누구야 얜?"
윤하는 내 사과엔 관심도 없고, 어째 우주에게 약간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평소같은 싸늘한 눈빛으로 돌아온 윤하가 우주를 노려보자 녀석은 약간 두려웠는지 움찔 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얘? 내 친구야. 완전 어릴때부터 친구. 제일 친한 녀석이지!"
우주가 움찔 하건 말건 난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난 너 없어도 놀 친구 많거든!'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어린 마음에 이거라도 윤하에게 이겨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윤하는 그 말에 약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 나는 우주에게 홱 돌아서서는 다시 청권 배틀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째 우주 녀석이 자꾸 빼는게 더 이상 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 우주야 한번만 더 하자!"
"아 싫어-! 오늘은 그만 할래... 자꾸 플레이가 꼬인다구!"
그렇게 내 매달림을 뿌리치고 도망가버리는 녀석을 쫓아 난 부엌으로 가 버렸고, 두 녀석이 빠져나가버린 텅빈 거실에 홀로 남은 윤하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어래.'
헌데 윤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을 하는게 아닌가?
"이게 재밌나..."
굉장히 차갑게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가버릴 줄 알았던 윤하는, 어째 전혀 반대방향인 TV쪽을 향해서 걸어가더니 나와 우주가 가지고 놀았던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는게 아닌가! 난 그녀의 놀라운 행동에 오만감이 교차하는것을 느꼈다.
"... 바보랑 같이 해봐야겠네."
바보? 설마 날 말하는건가 싶다만... 어이, 아무리그래도 바보라니! 쨌든 윤하녀석도 겉으로는 굉장히 차가운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엄청 외로웠던 게 분명하구만. 진즉에 이렇게 나왔으면 어린 내가 엄청 잘 해주고 놀았을텐데 말야.
얼마 안 있어 윤하는 거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나를 찾기 시작했다.
"야! 한재희!!"
그 낭랑하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방에서 우주와 몸싸움을 벌이던 내가 고개를 돌려 윤하를 바라보았고, 나는 꿈속을 헤매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핑그빛이 가득한 귀여운 방 풍경이 펼쳐졌고, 비슷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유사한 느낌으로 소리치는 윤하, 아니 재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서윤하!!"
뭔가 아쉬운 꿈을 놓친 것 같은 느낌에 짜증이 난 내가 재희에게 짜증을 내며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자, 녀석이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지각이라고요."
"뭐엇?!!"
그 후 정신없이 준비해 간신히 지각을 면한 나는, 간만에 땀 쭉 빼고 신나게 달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도 미친듯이 더운 날이어서 학교에 도착함과 동시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땀으로 샤워를 한 나는 점심시간 끝나고 수영부의 샤워 시설을 빌려 샤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