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1초라도 늦었다면 재희와 가희에게 들켜버릴 뻔 했다. 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일단 여기에서 좀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얘들아."
내가 창문 밑에 고꾸라진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이야기하자, 친구들이 그래도 마음은 이해해주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그곳을 벗어났다.
'큰일이다... 이래서야 집에 가서도 걱정이잖아...'
일단 눈 앞의 위기를 피하긴 했으나, 돌아서면서 마지막으로 본 재희와 가희는 서로 목청높여 싸우고 있었다. 가희가 저렇게 화 내는 것도 처음 봤지만, 저렇게 화낼 정도로 이번 사건이 대 사건이라는 걸 다시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젠장, 오늘 낮에 재희를 따라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왜 하필이면 오늘만 녀석의 말을 들어주기로 해서 이런 큰 일을 만들어버린 걸까. 게다가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려고 해도, 뭔가 켕기는게 너무나 많았다. 주 원인은 내 앞으로 들이댄 재희에게 있었지만, 애초에 재희를 섣불리 따라나선 나의 탓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오해야. 우린 절대 오해받을만한 건 하지 않았어. 믿어줘 얘들아... 그리고 다른애들에게는 절대 비밀이야 알았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은주는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으나, 내 깊은 근심은 모두의 대답에도 쉽게 채워지지가 않았다.
"여튼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내일 또 만나서 놀더라도 이 분위기에선 좀 무리잖아."
"그러자, 아무래도 윤하도 많이 정신없을거고."
우주가 나를 감싸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함께 권유해주었다. 고맙다 욘석아, 여튼 나 힘들 때마다 정말 도움이 된다니까.
헤어지고 나서 아쉽고 미안한 마음에 [오늘 미안! 집에서 푹 쉬고 내일 보자!]라고 모두에게 문자를 보내긴 했으나, 모두들 마음이 편치많은 않았는지 답장은 다들 간단했다.
우주까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서야 난 아까 재희와 가희를 보았던 까페로 달려갔다. 우주가 끝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우겼지만, 사태 해결을 위해 어떻게든 내가 혼자 재희와 가희 사이에서 중재를 해 줘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카페에는 내가 찾는 두 사람이 없었다.
'어디갔지? 설마 싸우다 못해 위험한 생각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황급히 주변을 훑어보던 나는, 운 좋게도 집 방향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는 재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뒷모습은 정말 너무나도 측은하고 초라해 보였다. 내가 재희였을 때에 저렇게 축 처진 뒷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함부로 다가가서 말 걸었다간 또 안좋은 일이 생기겠지...'
아까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날까 두려웠던 나는 재희 뒤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녀석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집에 가겠지만, 혹시나 나쁜 맘 먹고 나쁜 짓이라도 저지를까봐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재희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을까. 둘이 싸우면서 무슨 이야길 한 걸까, 설마 헤어지자고 말하지는 않았겠지? 분명 좋은 쪽으로 마무리 됐을 거야... 그럴거야.
난 별 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재희의 축 처진 뒷 모습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를 걸었을까, 다행히도 재희가 도착한 곳은 우리 집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난 놀란 마음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재희가 방의 불을 켤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다가 한창 극성을 모기들에게 여섯 번이나 더 물리고 나서 난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재희 녀석 진짜 충격을 심하게 먹은 모양인걸... 어떻게 자기 방 불만 딱 켜놓고 집안의 불을 아무것도 안 켜놨대. 이런 어둠의 자식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엄마 아빠는 둘 다 어디 가신거지?
[틱]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나는 무언가가 발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숙여 어둠 속 그 물체를 집어든 나는 손 감각만으로 뭔지 알아내려 했으나 무리였다.
'아우 참, 스위치가 여기 쯤 있었는데...'
더듬더듬 힘들게 벽을 짚으며 나아가던 나는 곧 살짝 튀어나와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알게 모르게 묘한 만족감에 휩싸인 나는, 마치 범인을 밝혀낸 명탐정 같은 손놀림으로 스위치를 켰다.
깜빡, 깜빡깜빡. 몇 번 정도 깜빡이던 형광등은 곧바로 불이 켜졌고, 난 기쁨에 차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찾았다!"
"... 뭐야 너."
어... 응? 잠깐 이 목소린 설마.
"우왁!"
뒤를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린 날 한심하단 듯이 바라보는 한 사람이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야 너?! 방에 있는 거 아니었어?"
이 어둠의 자식은 왜 불 끄고 식탁에 앉아서 청승맞게 고독을 씹고 있는거야!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네!
"놀라게 해서 미안하게 됬네 그래."
내가 넘어져서 아픈 엉덩이를 부비며 일어서려는데, 감자기 재희 녀석이 내 뒤로 오더니 내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쑥 집어넣었다. 내가 놀라서 흠칫 하건 말건 아랑곳않고, 재희는 마치 백 허그를 하듯이 날 잡아세웠다. 그렇게 일으켜지니 마치 내가 재희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야, 야! 이거 놔!"
"..."
녀석은 바둥거리는 날 안은 채로 일 분 정도 멍하니 있더니, 내가 낑낑대며 팔을 빼려고 하자 그제서야 날 안고 있던 두 팔을 빼 버렸다.
"에잇 참,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린거야?!"
약간 화가 난 나는 풀려나자마자 녀석과 2m정도 떨어진 후 인상을 쓰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방금 한 말이 조금 심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재희는 이 정도 말로는 평정심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므로 좀더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이 자식아 오늘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거의 100% 네 잘못이라구. 그러니까 내가 미안해 할 필요도 전혀 없는데 내가 너무 착해서 너랑 가희의 관계까지 생각해주다 보니 걱정한 거고 말야.
"흠..."
녀석은 내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더니, 냉장고를 열어 캔 주스를 하나 꺼내 들고 들이키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따서 시원하게 들이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웬지 화내고 있는 내 모습이 바보같이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거... 설마 완전 무시 당한건가?
"야. 한재희 말 좀 해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소리치건 말건 녀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쓰레기통에 다 마신 캔을 버리더니 자기 방으로 도망가버렸다. 이렇게 무시당하니 오히려 내가 더 짜증이 났다.
한재희 이놈은 나랑 오늘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 이건가? 난 너네 둘이 어떻게 된 건지 걱정이 앞서서 이렇게 계속 신경 쓰고 있는데, 별 일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이거지?
"그렇게 나온다 이거냐?"
나 서윤하는 이렇게 무시당하고만은 살 수 없는 성격인지라 바로 녀석의 뒤를 따라 겁도 없이 방으로 쫓아갔다. 뭐랄까, 나도 모르게 녀석의 도발에 또 넘어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이런식으로라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또 나중가서 재희의 버럭질에 당하고 말 것이다.
"야! 자꾸 무시하지 말고 말좀 해!"
어우 깜깜해. 녀석의 방에 들어선 나는 바로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불 켜져 있었는데 언제 또 꺼버린거야?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 거면, 응-?"
[텁]
"-꺄악!"
내가 스위치를 켜려고 뒤돌아섰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엄청난 기세로 무엇인가가 날 덮쳐왔다. 크기와 무게로 봐서 보나마나 재희였다. 그와 동시에 구름에 가려졌던 보름달이 환하게 방 안을 비추었고, 그로 인해 난 재희가 날 눕힌 채로 내 위에 엎드려 엄청나게 가까운 위치에서 날 무서운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익- 너?! 왜 이래 자꾸-!!"
아까랑은 차원이 다른 힘으로 날 누르고 있는 재희 때문에, 난 옴짝달싹 못하고 꼿꼿이 누워 녀석의 눈만 뚫어져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야."
드디어 철창처럼 굳게 닫혀있던 녀석의 입에서 제대로 된 단어로 구성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하는게, 굉장히 뭔가 참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너 왜 자꾸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해. 어?!"
날 노려보며 소리치는 녀석의 말에 난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그치? 오늘 잘못한 사람이 누군지는 니가 더 잘 알지 않냐?
"그게 무슨-"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하려는데, 녀석이 내 말을 끊으며 한 마디 더 했다.
"젠장, 어떻게 되 가는건지 모르겠어... 가희가 좋은데, 그건 확실한데. 넌... 넌 대체!"
그러면서 갑자기 와락 덮쳐오는 녀석의 입술에 하마터면 내 입술이 닿을 뻔 했지만, 입술이 서로 닿기 일보 직전에 깜짝 놀라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오른손이 먼저 녀석의 뺨을 강타했다.
[짜악!]
"너 미쳤어? 왜 그래 정말!!"
너무 놀란 나는 그 상태로 굳어버린 재희를 밀쳐내고, 허둥지둥 내 방으로 도망갔다.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청하려는데,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하아... 잊기로 했으면서 난 왜 그 상황에 흥분을 하는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같이 반응해버린 내 몸이 너무나 야속했다. 침대를 양손으로 두드리며 나 자신을 비난했다. 한재희가 내게 내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내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이 바보 멍청이. 바보...'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잠도 이루지 못한 채로.
<6. 시험과, 시험> End